사상 최고의 흥행작 ‘타이타닉’ 이후 소강상태를 보였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제 세상을 만난 듯하다. ‘캐치 미 이프 유 캔’에서는 흥행의 귀재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과 호흡을 맞추더니, 이번에는 뉴욕파 거장 마틴 스코시즈 감독과 팀을 이룬 ‘갱스 오브 뉴욕’으로 관객과의 만남을 기다리고 있다.
스코시즈는 흥행성적과는 무관하게 영화를 가장 잘 만드는 감독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힌다. 이는 스필버그의 영화들이 주로 산업적 측면에서 논의되고 있는 반면, 스코시즈의 영화들은 미학적 성취도의 측면에서 거론되고 있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비열한 거리’(1973) ‘택시 드라이버’(1976) ‘분노의 주먹’(1980) 등과 같은 초기의 걸작부터 ‘좋은 친구들’(1990) ‘순수의 시대’(1993) ‘쿤둔’(1998)에 이르는 후기의 걸작 목록들은 스코시즈의 위상을 잘 말해준다.
‘갱스 오브 뉴욕’은 그가 필생의 역작으로 한번쯤 만들어보고 싶었다던 비교적 스케일이 큰 대작이다.
때는 1840년대. 지금과는 달리 슬럼가에 불과했던 뉴욕의 한 지역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갱스 오브 뉴욕’은 일단 당시의 분위기를 생생하게 전달해주는 완벽한 세트로 관객을 압도한다. 특히 살인, 도박, 매춘 등 범죄행각이 끊일 새가 없는 비열한 곳 파이브 포인츠의 모습은 이곳이 과연 오늘날 뉴욕의 맹아적 모습일까 하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킬 정도다. 스코시즈 감독은 번영을 구가하고 있는 미국 사회의 양지보다는 음지에 초점을 맞추어온 사회파 감독답게 그 어둠의 심연에서 꿈틀대는 인간 군상들의 탐욕과 생존욕구를 생생하게 재현해내고 있다.
부분적으로 실화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하나 영화의 줄거리는 지극히 관습적이다. 신천지를 찾아 물밀듯이 밀려오는 아일랜드 이주민들과 자기 터전을 지키려는 뉴욕 토박이들 간의 피비린내 나는 생존투쟁이 영화의 골간을 이룬다. 두 집단 간의 끊임없는 마찰과 갈등은 마침내 집단 패싸움을 불러오게 되고, 이 과정에서 이주민파(일명 데드 레빗) 지도자인 발론(리암 리슨)이 토박이파 지도자인 부처(다니엘 데이 루이스)에게 살해당한다. 그 결과 토박이 세력이 득세하게 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이 싸움은 대를 물려 전개된다. 어렸을 때 아버지의 참혹한 죽음을 목격했던 암스테르담(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이 성장하여 복수의 칼을 갈게 된 것.
그러나 자신의 뜻과는 달리 암스테르담은 오히려 철천지원수인 부처의 후견을 받으며 심복 행세를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게다가 그와의 악연을 모르는 부처는 그를 양아들로 삼을 정도로 그에 대한 신임이 두텁다. 결국 암스테르담은 아버지를 죽인 삼촌을 차마 죽이지 못하고 갈등하는 햄릿의 또 다른 버전인 셈인데, 이처럼 살부(殺父) 모티브를 살짝 변형한 양부 살해 모티브는 최근 한 경향으로 발전할 만큼 자주 보인다. 얼마 전 국내에도 개봉되었던 샘 멘데스 감독의 ‘로드 투 퍼디션’이 단적인 예다.
누아르 영화의 한 코드인 팜므 파탈 (Femme Fatale·위험한 여자)의 등장도 관습적이긴 마찬가지다. ‘갱스 오브 뉴욕’에서 암스테르담과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는 제니(카메론 디아즈)는 사실 부처의 정부(情婦)였던 것. 말하자면 부하가 넘봐서는 안 될 보스의 여자와 눈이 맞는다는 설정인 셈이다.
어쨌든 앞서 거론했던 초기의 걸작들과 비교해볼 때 이 영화는 누아르 영화의 장르적 관습이 다분히 이어지고 있다. 그동안 상업성보다는 작품성에 더 치중해온 스코시즈의 입장에서는 불가피한 타협의 산물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특히 최고의 스타 디카프리오의 파격적 기용은 이 작품의 대중적 지향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러나 그것은 스코시즈에게는 일종의 모험이었고, 그에 따른 부작용이 일부 드러난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불타는 복수심과 양부에 대한 의리 사이에서 번민하는 햄릿이 되기엔 디카프리오의 연기 연륜이 너무 짧은 느낌이다.
한편 그야말로 인정사정없는 인간백정 부처 역의 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관록 있는 연기는 디카프리오의 빈틈을 메우기에 충분하다. 디카프리오의 상대역인 카메론 디아즈도 농염한 창녀 역을 무리 없이 소화해내고 있다. 몸매 하나로 때웠던 ‘마스크’ 시절에 비하면 괄목상대할 만한 연기를 보여준다.
스코시즈의 야심작 ‘갱스 오브 뉴욕’에는 오늘날 뉴욕이 겪은 아픔까지도 껴안으려는 거장의 의도가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다. 영화의 라스트 신에선 테러로 현실에선 사라진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의 모습도 보인다. 피로 세워진 거대도시 뉴욕에 아직도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유령이 배회하고 있는 셈이다.
스코시즈는 흥행성적과는 무관하게 영화를 가장 잘 만드는 감독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힌다. 이는 스필버그의 영화들이 주로 산업적 측면에서 논의되고 있는 반면, 스코시즈의 영화들은 미학적 성취도의 측면에서 거론되고 있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비열한 거리’(1973) ‘택시 드라이버’(1976) ‘분노의 주먹’(1980) 등과 같은 초기의 걸작부터 ‘좋은 친구들’(1990) ‘순수의 시대’(1993) ‘쿤둔’(1998)에 이르는 후기의 걸작 목록들은 스코시즈의 위상을 잘 말해준다.
‘갱스 오브 뉴욕’은 그가 필생의 역작으로 한번쯤 만들어보고 싶었다던 비교적 스케일이 큰 대작이다.
때는 1840년대. 지금과는 달리 슬럼가에 불과했던 뉴욕의 한 지역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갱스 오브 뉴욕’은 일단 당시의 분위기를 생생하게 전달해주는 완벽한 세트로 관객을 압도한다. 특히 살인, 도박, 매춘 등 범죄행각이 끊일 새가 없는 비열한 곳 파이브 포인츠의 모습은 이곳이 과연 오늘날 뉴욕의 맹아적 모습일까 하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킬 정도다. 스코시즈 감독은 번영을 구가하고 있는 미국 사회의 양지보다는 음지에 초점을 맞추어온 사회파 감독답게 그 어둠의 심연에서 꿈틀대는 인간 군상들의 탐욕과 생존욕구를 생생하게 재현해내고 있다.
부분적으로 실화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하나 영화의 줄거리는 지극히 관습적이다. 신천지를 찾아 물밀듯이 밀려오는 아일랜드 이주민들과 자기 터전을 지키려는 뉴욕 토박이들 간의 피비린내 나는 생존투쟁이 영화의 골간을 이룬다. 두 집단 간의 끊임없는 마찰과 갈등은 마침내 집단 패싸움을 불러오게 되고, 이 과정에서 이주민파(일명 데드 레빗) 지도자인 발론(리암 리슨)이 토박이파 지도자인 부처(다니엘 데이 루이스)에게 살해당한다. 그 결과 토박이 세력이 득세하게 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이 싸움은 대를 물려 전개된다. 어렸을 때 아버지의 참혹한 죽음을 목격했던 암스테르담(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이 성장하여 복수의 칼을 갈게 된 것.
그러나 자신의 뜻과는 달리 암스테르담은 오히려 철천지원수인 부처의 후견을 받으며 심복 행세를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게다가 그와의 악연을 모르는 부처는 그를 양아들로 삼을 정도로 그에 대한 신임이 두텁다. 결국 암스테르담은 아버지를 죽인 삼촌을 차마 죽이지 못하고 갈등하는 햄릿의 또 다른 버전인 셈인데, 이처럼 살부(殺父) 모티브를 살짝 변형한 양부 살해 모티브는 최근 한 경향으로 발전할 만큼 자주 보인다. 얼마 전 국내에도 개봉되었던 샘 멘데스 감독의 ‘로드 투 퍼디션’이 단적인 예다.
누아르 영화의 한 코드인 팜므 파탈 (Femme Fatale·위험한 여자)의 등장도 관습적이긴 마찬가지다. ‘갱스 오브 뉴욕’에서 암스테르담과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는 제니(카메론 디아즈)는 사실 부처의 정부(情婦)였던 것. 말하자면 부하가 넘봐서는 안 될 보스의 여자와 눈이 맞는다는 설정인 셈이다.
어쨌든 앞서 거론했던 초기의 걸작들과 비교해볼 때 이 영화는 누아르 영화의 장르적 관습이 다분히 이어지고 있다. 그동안 상업성보다는 작품성에 더 치중해온 스코시즈의 입장에서는 불가피한 타협의 산물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특히 최고의 스타 디카프리오의 파격적 기용은 이 작품의 대중적 지향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러나 그것은 스코시즈에게는 일종의 모험이었고, 그에 따른 부작용이 일부 드러난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불타는 복수심과 양부에 대한 의리 사이에서 번민하는 햄릿이 되기엔 디카프리오의 연기 연륜이 너무 짧은 느낌이다.
한편 그야말로 인정사정없는 인간백정 부처 역의 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관록 있는 연기는 디카프리오의 빈틈을 메우기에 충분하다. 디카프리오의 상대역인 카메론 디아즈도 농염한 창녀 역을 무리 없이 소화해내고 있다. 몸매 하나로 때웠던 ‘마스크’ 시절에 비하면 괄목상대할 만한 연기를 보여준다.
스코시즈의 야심작 ‘갱스 오브 뉴욕’에는 오늘날 뉴욕이 겪은 아픔까지도 껴안으려는 거장의 의도가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다. 영화의 라스트 신에선 테러로 현실에선 사라진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의 모습도 보인다. 피로 세워진 거대도시 뉴욕에 아직도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유령이 배회하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