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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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회화에 헌정된 푸른 월계관

  • < 노성두/ 미술사가·서울대 미학과 강사 > nohshin@kornet.net

    입력2004-09-30 16: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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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세기 회화에 헌정된 푸른 월계관
    아틀리에 풍경! 이것은 17세기 미술에서 일대 사건이었다. 화가와 모델이 새삼스러워서가 아니다. 작품의 생산 과정을 보여주는 화가의 작업실 풍경이 바야흐로 미술시장에서 경쟁력 있는 소재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향긋한 꽃이나 싱그러운 미인들만 그림 소재가 되는 줄 알았던 그 시대 사람들은 베르메르의 아틀리에 풍경을 보고 “어, 이런 것도 그림이 되네?” 하면서 이마를 쳤을 것이다. 이것은 마치 시인이 시작 과정을 소재로 시를 짓거나, 마술사가 제 호주머니를 다 뒤집어 툭툭 털어 보이는 것만큼 놀라운 일이었다.

    베르메르는 붓질이 퍽 침착한 화가다. 자연의 터럭 하나도 안 놓치는 기막힌 눈썰미가 그의 장기로 알려져 있다. 물감 한번 바르는 데 뜸을 얼마나 들이는지 모델들 사이에서도 악명이 높았다. 1년 꼬박 달라붙어 고작 두어 점 그리는 게 전부였다니, 같은 네덜란드 화가라도 연간 수십점씩 그려 짭짤한 수입을 올렸던 렘브란트와 비교하면 거의 굼벵이 화가였다. 하긴 렘브란트도 두어 시간 만에 그림 한 점을 뚝딱 완성하는 이탈리아의 루카 조르다노나 귀도 레니에 대면 별것도 아니지만.

    그러나 베르메르에게는 남다른 미덕이 있다. 뜸을 진득하게 들인 만큼 발효가 잘 되어 있다는 점이다. 1665년께 그린 ‘회화예술’은 남아 있는 그의 원작 35점 가운데 가장 곰삭은 작품이다. 목젖이 매캐할 만큼. 사실 이 그림의 제목이 ‘회화예술’로 밝혀지기까지는 말이 많았다. ‘화가의 아틀리에’니 ‘회화의 알레고리’ ‘회화의 승리’ 같은 제목을 여럿 달고 있었다. 그러나 베르메르가 죽은 뒤 그의 아내와 장모가 유품관리자에게 맡긴 목록에 그때까지 안 팔리고 남아 있던 이 그림을 놓고 ‘회화예술’(Schilderconst)이라는 제목을 달았던 사실이 최근 확인되면서 제목에 얽힌 논쟁도 깨끗이 정리됐다. 그림의 제목은 베르메르가 직접 붙였을 가능성이 크다.

    17세기 회화에 헌정된 푸른 월계관
    그렇다면 ‘회화예술’은 누가 주문했을까? 베르메르는 왜 죽을 때까지 그림을 못 팔고 끌어안고 있었을까? 지금은 빈 미술사 박물관의 보물이지만, 당시에는 영 찬밥 대접을 받았던 모양이다. 만약 주문작이 아니라 베르메르가 마음대로 그린 그림이라면 1년 동안 헛고생한 셈이니 이슬처녀를 데리고 살지 않는 한 바가지가 요란했을 테고, 주문작이었다면 십중팔구 클레임이 걸렸던 모양인데 그 까닭이 궁금하다. 아무리 뜯어봐도 그림에 시비 걸 만한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화가는 뒤로 돌아앉았다. 빨간 양말이 눈에 띈다. 얼굴을 좀 보여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베르메르의 심술도 여간이 아니다. 돌아앉은 화가를 두고 베르메르의 자화상이라는 주장도 있고, 화가 직종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재현이라는 반박도 있지만 뒤통수만 가지고 결론을 내리기는 무리다. 화가는 이젤에 캔버스를 기대놓고 오른손에 붓을 쥐었다. 손바닥 밑에 받침막대를 대고 신중하게 붓을 놀리는 참이다. 캔버스 위에 흰색으로 그린 모델의 윤곽이 희미하게 보인다. 모델이 머리에 쓴 월계관부터 색을 바르기 시작한다.



    모델은 눈을 내리깔고 서 있다. 왼손에는 두꺼운 책을, 오른손에는 트럼펫을 들었다. 모델의 정체는 금세 밝혀졌다. 체사레 리파의 도상사전 ‘이코놀로지아’의 뮤즈 편에서 똑같은 차림새의 여인이 확인된 것이다. “우리는 클리오(Cleio)를 머리에 월계관을 얹은 소녀로 표현하자. 또 오른손에는 트렘펫을 들고 왼손에는 책을 들고 있어야 한다. 책에는 투키디데스라고 적는다.”

    클리오는 헬리콘 산에서 아폴론의 시중을 드는 아홉 뮤즈 가운데 역사가들에게 영감을 불어넣는 일을 담당한다. 체사레 리파의 도상사전이 네덜란드어로 출간된 것이 1644년, ‘회화예술’이 그려지기 20년 전쯤이니 베르메르도 틀림없이 이 책을 구해 읽었을 것이다. 들고 있는 노란 책에 투키디데스라는 글자는 빠져 있지만, 월계관과 트럼펫을 보면 클리오가 분명하다. 역사의 뮤즈가 이렇게 참하고 싹싹한 줄 알았더라면 역사 시간에 졸지나 말걸, 뒤늦게 후회가 든다.

    그런데 궁금한 것이 하나 있다. 뮤즈는 미술에서 늘 예술가나 시인에게 영감을 주는 자세로 등장하게 마련이다. 복음서를 쓰는 마태오의 손을 거드는 천사의 자세와 비슷하다. 그런데 여기서는 제 직분을 깜빡 잊고 다소곳이 포즈를 취하고 있으니 별일이다.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 아니라 예술적 재현의 수단으로 전락했다.

    17세기 회화에 헌정된 푸른 월계관
    어쨌든 그림 해석은 여기까지 별 탈 없이 진행되었다. 그러다가 그림 왼편 탁자에 가서 꽉 막히고 말았다. 묵직한 나무탁자 위에 잡동사니를 잔뜩 쌓아두었는데, 뭐가 뭔지 읽어내기가 마땅치 않았다. 아니, 별별 억측들이 다 나왔다는 게 맞겠다. 먼저 탁자 위의 뒤죽박죽이 이탈리아 미술 이론을 설명한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에 의하면 펼친 스케치북은 소묘예술, 누운 석고 가면은 모방예술, 세워둔 책은 회화 수칙, 길게 늘인 비단직물은 장식예술의 원리를 각각 대변한다.

    또 트렘펫이 역사의 뮤즈 클리오의 소지품인 것처럼 탁자 위 소품들이 다른 뮤즈들을 연상시킨다는 제안도 나왔다. 가령 책은 변론술의 뮤즈 폴뤼힘니아, 악보는 음악시의 뮤즈 에우테르페, 석고 가면은 희극의 뮤즈 탈리아의 상징물로 보는 식이다.

    그런데 석고 가면에 돋보기를 대고 보니 눈을 감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뮤즈 이론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공연용 마스크라면 눈 부분에 구멍이 뚫려 있어야 마땅하니, 이것은 조각예술로 바꾸어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친김에 스케치북에다 끼적거린 것을 건축 설계도면으로 간주한다면, 이 그림에는 회화예술과 더불어 두 자매 예술인 조각과 건축이 그림에 다 들어가 있다는 이야기였다.

    또 가장 최근에 나온 해석은 베르메르가 델프트의 화가 조합인 루카스 길드에 가져다 걸려고 ‘회화예술’을 그렸다는 것이다. 그림 왼쪽 맨 앞의 큼직한 휘장과 붉은 가죽을 댄 의자부터 시작해서 탁자 위의 잡동사니를 거쳐 천장에 붙은 샹들리에와 뒷벽에 걸린 네덜란드 지도까지 모두 루카스 길드가 관장하던 관련 직종을 망라하고 있다는 것이다. 양탄자 직조, 비단 자수, 동판화, 조각, 예술 인쇄, 서적 거래, 미술품 거래, 지도 제작에 이르기까지 예술과 공예의 전 분야를 쓸어 담았다는 이론이다. 1988년 독일 미술사학자 헤르만 아제미센이 내놓은 마지막 주장에 대한 반론은 아직 나오지 않은 상태다.

    ‘회화예술’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아무래도 네덜란드 지도다. 정교하게 그린 대형 지도는 같은 크기의 유화 못지않은 가격에 팔렸지만 호사가들의 인기 수집품이었다고 한다. 항해와 모험을 동경했던 17세기 네덜란드인들에게 해안선이 구불구불한 지도는 그 자체로 도전적 삶과 꿈을 의미했다. 베르메르의 유품 목록에도 암스테르담의 클라스 얀츠가 제작한 똑같은 지도가 들어 있었다니 화가는 실제로 이런 지도를 집 안에 걸어두고 살았던 모양이다.

    지도는 바다를 위로 보면서 누워 있다. 지도 한복판에 예리하게 접힌 자국이 그 당시 북부의 자유 일곱 주(州)와 스페인 합스부르크의 치하에 있던 남부 열 주의 경계를 그리고 있는 것은 베르메르의 역사의식을 말해 준다. 지도에서 뮤즈 클리오의 트럼펫이 가리키는 토프 반 홀란트와 화가의 받침막대가 가리키는 토프 반 브라반트가 북부 자유 네덜란드의 행정 수도와 남부 스페인 지배 구역의 식민 대표시라는 사실도 짚어볼 대목이다.

    베르메르는 화가의 작업실에 설립 쉰 돌을 맞는 루카스 길드의 직종들을 흩어놓았다. 그리고 분단 네덜란드의 가슴 아픈 현실을 정면 벽에 걸어두었다. 화가는 입을 다문 역사의 뮤즈를 대신해 붓으로 증언한다. 그렇다면 그림 속의 캔버스에 그려 넣은 푸른 월계관은 누구의 영광을 위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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