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이틀 아니 한 달의 시간이 흘렀지만 생산직에 나이 마흔이 넘은 내가 다시 취직할 만한 직장은 나타나지 않았다. 17년의 경력마저도 인정해 주지 않는 현실, 누구보다 열심히 일할 수 있는 나이인데 한물간 사람으로 취급받는 현실이 지금 나를 초라하게 만들고 있다….’(대우자동차 희망센터 300일간의 아픔과 보람에 대한 비망록 ‘여보!! 내일부터 출근이야!’ 중에서)
지난해 5000여명을 퇴직시키며 노동계 태풍의 눈으로 등장했던 대우자동차 노동자들. 정리해고에 반대하는 핏발선 함성도, 들끓던 파업 열기도 잦아든 지금 이들은 모두 어디에 가 있을까. 대우자동차측은 2월 말 현재 4509명의 퇴직자 중 1700여명이 창업과 재취업에 성공했다고 밝히고 있다.
공장 멈출 때 정비학원서 땀방울
2000년 12월 대우자동차 품질관리1부에서 15년간의 ‘대우가족’ 생활을 마감한 박재현씨(42)는 동료 퇴직자들 사이에서 ‘창업 도우미’로 통한다. 지난해 9월 일산 신도시에 자신의 이름을 내건 카센터 ‘박재현 오토 리페어(AUTO REPAIR)’의 문을 연 데 이어 자신과 비슷한 시기에 대우자동차를 자의 또는 타의로 떠난 동료들의 창업을 돕는 일에까지 적극 나서고 있기 때문.
대우차 출신 퇴직자 9명이 모인 ‘카시스 공동창업 모임’에서는 이미 박씨를 포함해 4명의 ‘사장님’이 탄생했다. 박씨는 이 모임의 초대 회장. 창업 성공자 4명 중 2명은 아예 고향인 구미와 충주에서 카센터를 열어 ‘귀향’과 ‘창업’이라는 목표를 동시에 달성했다.
박씨와 그의 대우차 시절 동료들은 지금도 한 달에 한 번 모임을 갖고 창업에 관한 정보를 교환하고 먼저 창업한 사람의 경험을 전수받고 있다. 박씨는 같은 부서에 근무했던 정홍기씨(42)를 잘 아는 카센터 사장에게 부탁해 취업시키고 창업 전 경험을 쌓게 하는 일에도 발벗고 나섰다. 가장 먼저 창업한 박씨의 경험담이 다른 회원들에게도 소중한 자산이 되는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박씨 역시 쉽게 창업에 성공한 것은 아니다. ‘자동차 회사에서 10여년 일했다고 모두 창업에 성공한다면 뭐 하러 고단한 직장생활을 하겠느냐’는 게 박씨의 지적. 박씨의 이 말에는 밤낮을 뒤바꿔가며 고생한 지난 3년의 흔적이 묻어 있다.
97년 말 IMF 체제가 터지고 국내 경기가 수렁으로 빠져들자 당장 일거리가 줄어들었다. 공장 라인은 멈추는 일이 잦아졌고 출근하지 않는 날도 늘어났다. 현장 근로자들은 모여 술추렴을 궁리하는 일이 잦아졌다. 그러나 박씨는 여기에 동참하지 않았다. 오히려 위기를 기회로 만들기 위한 노력을 시작한 것. 일거리가 줄어들고 남는 시간이 늘어나자 그는 가장 먼저 자동차 정비학원에 등록했다. 주간근무가 있는 날은 해저물녘 학원으로 향했고, 야간근무가 있는 날은 학원 수업을 듣고 피곤한 몸으로 다시 작업대에 섰다. 목표를 정한 이상 박씨의 도전에는 한계가 있을 수 없었다. 그 다음에는 인천기능대학에 진학해 기능장에 도전했다. 지금도 박씨는 기능장 자격을 딴 것이 창업을 결심하는 데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고 기억한다.
“대우차가 워크아웃에 들어간 뒤에도 파업이다 집회다 해서 근로자들이 시위에 휘말린 적이 한두 번이었습니까? 하지만 학교 다니고 시험공부 하느라 파업 현장에는 가볼 시간도 없었어요. 그때 파업 현장만 쫓아다녔더라면 이렇게 창업에 성공하지도 못했을 겁니다.”
언젠가 닥쳐올지 모를 ‘독립선언’을 위해 남몰래 준비해 왔던 박씨가 ‘공동창업’이라는 아이디어를 얻은 것은 대우자동차 희망센터. 대우차 희망센터는 인천시와 노동부가 대우차와 함께 해고자 취업 지원을 위해 문을 연 전직(轉職) 지원센터. 희망센터의 창업 컨설팅 과정에서 인연을 맺었던 전직 지원(아웃플레이스먼트) 업체 DBM 코리아의 조혁균 컨설턴트로부터 ‘공동창업’이라는 아이디어를 전해 들었을 때 박씨는 ‘아, 이거다!’는 생각이 퍼뜩 스치고 지나갔다고 한다.
그러나 DBM 코리아측의 컨설턴트와 박씨가 머리를 맞대고 고안해낸 공동창업은 기존의 프랜차이즈 창업과는 형태가 다른 것이었다. 프랜차이즈 창업이 가맹비 부담이 따르는 점을 감안해 업소 운영은 각자 알아서 하되 물품 구매나 홈페이지 운영, 1588 서비스 등만을 공동으로 운영하는 방식. 말하자면 자영업과 체인영업의 장점만 살린 ‘제3의 창업’ 형태인 셈이다. 결국 부지 물색과 점포 임대 등은 철저히 박씨 몫이었다. 박씨가 점포 부지 물색을 위해 3개월간 서울과 주변 위성도시 중 찾아가보지 않은 곳이 거의 없었다. 경기도 분당은 무려 일곱 번이나 방문했고 부천 상동 신도시, 수원 영통지구, 안산 시화지구 등을 모조리 훑었다. 게다가 경기도 양평, 퇴계원, 금곡까지 사정권 안에 드는 곳이면 마다하지 않고 찾아다녔다. 그렇게 경기 일원을 온통 헤매다 결국 놀고 있는 밭뙈기를 사서 건물을 올린 곳이 고양시 대화동. 박사장은 여기서 창업한 지 6개월 만에 이미 손익분기점을 돌파했다.
직장생활과 비교하면 이제 돈 버는 일만 남은 것 같은데도 그는 오히려 앞으로 할 일이 더 많다며 고개를 가로젓는다.
“한번은 기사가 퇴근하고 혼자서 밤 12시까지 카센터를 지키고 있는데 원당에서 펑크난 차가 타이어를 고치러 일산까지 왔어요. 지나가다 우리집이 늦게까지 영업하는 걸 본 적이 있다면서요. 5000원짜리 손님이지만 눈물이 핑 돌더군요. 이게 바로 ‘고객만족’이구나. 대우차 시절 자동차 조립라인에서 강조했던 ‘고객만족’은 그냥 구호일 뿐이었어요.”
지난해 5000여명을 퇴직시키며 노동계 태풍의 눈으로 등장했던 대우자동차 노동자들. 정리해고에 반대하는 핏발선 함성도, 들끓던 파업 열기도 잦아든 지금 이들은 모두 어디에 가 있을까. 대우자동차측은 2월 말 현재 4509명의 퇴직자 중 1700여명이 창업과 재취업에 성공했다고 밝히고 있다.
공장 멈출 때 정비학원서 땀방울
2000년 12월 대우자동차 품질관리1부에서 15년간의 ‘대우가족’ 생활을 마감한 박재현씨(42)는 동료 퇴직자들 사이에서 ‘창업 도우미’로 통한다. 지난해 9월 일산 신도시에 자신의 이름을 내건 카센터 ‘박재현 오토 리페어(AUTO REPAIR)’의 문을 연 데 이어 자신과 비슷한 시기에 대우자동차를 자의 또는 타의로 떠난 동료들의 창업을 돕는 일에까지 적극 나서고 있기 때문.
대우차 출신 퇴직자 9명이 모인 ‘카시스 공동창업 모임’에서는 이미 박씨를 포함해 4명의 ‘사장님’이 탄생했다. 박씨는 이 모임의 초대 회장. 창업 성공자 4명 중 2명은 아예 고향인 구미와 충주에서 카센터를 열어 ‘귀향’과 ‘창업’이라는 목표를 동시에 달성했다.
박씨와 그의 대우차 시절 동료들은 지금도 한 달에 한 번 모임을 갖고 창업에 관한 정보를 교환하고 먼저 창업한 사람의 경험을 전수받고 있다. 박씨는 같은 부서에 근무했던 정홍기씨(42)를 잘 아는 카센터 사장에게 부탁해 취업시키고 창업 전 경험을 쌓게 하는 일에도 발벗고 나섰다. 가장 먼저 창업한 박씨의 경험담이 다른 회원들에게도 소중한 자산이 되는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박씨 역시 쉽게 창업에 성공한 것은 아니다. ‘자동차 회사에서 10여년 일했다고 모두 창업에 성공한다면 뭐 하러 고단한 직장생활을 하겠느냐’는 게 박씨의 지적. 박씨의 이 말에는 밤낮을 뒤바꿔가며 고생한 지난 3년의 흔적이 묻어 있다.
97년 말 IMF 체제가 터지고 국내 경기가 수렁으로 빠져들자 당장 일거리가 줄어들었다. 공장 라인은 멈추는 일이 잦아졌고 출근하지 않는 날도 늘어났다. 현장 근로자들은 모여 술추렴을 궁리하는 일이 잦아졌다. 그러나 박씨는 여기에 동참하지 않았다. 오히려 위기를 기회로 만들기 위한 노력을 시작한 것. 일거리가 줄어들고 남는 시간이 늘어나자 그는 가장 먼저 자동차 정비학원에 등록했다. 주간근무가 있는 날은 해저물녘 학원으로 향했고, 야간근무가 있는 날은 학원 수업을 듣고 피곤한 몸으로 다시 작업대에 섰다. 목표를 정한 이상 박씨의 도전에는 한계가 있을 수 없었다. 그 다음에는 인천기능대학에 진학해 기능장에 도전했다. 지금도 박씨는 기능장 자격을 딴 것이 창업을 결심하는 데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고 기억한다.
“대우차가 워크아웃에 들어간 뒤에도 파업이다 집회다 해서 근로자들이 시위에 휘말린 적이 한두 번이었습니까? 하지만 학교 다니고 시험공부 하느라 파업 현장에는 가볼 시간도 없었어요. 그때 파업 현장만 쫓아다녔더라면 이렇게 창업에 성공하지도 못했을 겁니다.”
언젠가 닥쳐올지 모를 ‘독립선언’을 위해 남몰래 준비해 왔던 박씨가 ‘공동창업’이라는 아이디어를 얻은 것은 대우자동차 희망센터. 대우차 희망센터는 인천시와 노동부가 대우차와 함께 해고자 취업 지원을 위해 문을 연 전직(轉職) 지원센터. 희망센터의 창업 컨설팅 과정에서 인연을 맺었던 전직 지원(아웃플레이스먼트) 업체 DBM 코리아의 조혁균 컨설턴트로부터 ‘공동창업’이라는 아이디어를 전해 들었을 때 박씨는 ‘아, 이거다!’는 생각이 퍼뜩 스치고 지나갔다고 한다.
그러나 DBM 코리아측의 컨설턴트와 박씨가 머리를 맞대고 고안해낸 공동창업은 기존의 프랜차이즈 창업과는 형태가 다른 것이었다. 프랜차이즈 창업이 가맹비 부담이 따르는 점을 감안해 업소 운영은 각자 알아서 하되 물품 구매나 홈페이지 운영, 1588 서비스 등만을 공동으로 운영하는 방식. 말하자면 자영업과 체인영업의 장점만 살린 ‘제3의 창업’ 형태인 셈이다. 결국 부지 물색과 점포 임대 등은 철저히 박씨 몫이었다. 박씨가 점포 부지 물색을 위해 3개월간 서울과 주변 위성도시 중 찾아가보지 않은 곳이 거의 없었다. 경기도 분당은 무려 일곱 번이나 방문했고 부천 상동 신도시, 수원 영통지구, 안산 시화지구 등을 모조리 훑었다. 게다가 경기도 양평, 퇴계원, 금곡까지 사정권 안에 드는 곳이면 마다하지 않고 찾아다녔다. 그렇게 경기 일원을 온통 헤매다 결국 놀고 있는 밭뙈기를 사서 건물을 올린 곳이 고양시 대화동. 박사장은 여기서 창업한 지 6개월 만에 이미 손익분기점을 돌파했다.
직장생활과 비교하면 이제 돈 버는 일만 남은 것 같은데도 그는 오히려 앞으로 할 일이 더 많다며 고개를 가로젓는다.
“한번은 기사가 퇴근하고 혼자서 밤 12시까지 카센터를 지키고 있는데 원당에서 펑크난 차가 타이어를 고치러 일산까지 왔어요. 지나가다 우리집이 늦게까지 영업하는 걸 본 적이 있다면서요. 5000원짜리 손님이지만 눈물이 핑 돌더군요. 이게 바로 ‘고객만족’이구나. 대우차 시절 자동차 조립라인에서 강조했던 ‘고객만족’은 그냥 구호일 뿐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