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서는 핫도그(hot dog)에 넣는 소시지를 프랑크푸르터(Frankfurter)라 했다. 미국인들은 다리가 짧고 몸통이 긴 닥스훈트(Dachshund)라는 독일산 개와 비슷하게 생겼다고 이를 ‘닥스훈트 소시지’라고 불렀다. 20세기 초에 시작된 프로야구장에서 대단한 인기를 끌었는데, 판매원들은 이를 뜨거운 물통에 넣어가지고 다니면서 “뜨끈뜨끈한 닥스훈트 소시지요!”를 외치다 손님이 부르면 빵에 끼워주었다. 어느 만화가가 야구장에 갔다 이 광경을 보고 다음날 신문에 그렸다. 빵 사이에 ‘닥스훈트 소시지’가 아니라 ‘닥스훈트’라는 개를 그린 뒤 “뜨끈뜨끈한 개(hot dog) 드세요!”라고 썼다는데, 대개 닥스훈트를 어떻게 써야 할지 철자법을 몰랐기 때문이라 전해진다. 이 만화는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이후 ‘닥스훈트 소시지’ 대신 ‘핫도그’라는 이름이 정착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미국에서는 개를 먹는다는 것은 그 발상만으로도 엄청난 일이었던 모양이다.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 그러한 만화가 센세이션을 일으켰는지도 모른다. 프로이트식으로 농담을 하자면, 미국인들은 잠재의식 속에 너무나 개를 먹고 싶은 욕망이 깊이 숨어 있기 때문에 오히려 남들이 개를 먹는 것에 대해 그리도 민감하게 반응한다고 할 수 있을까? 핫도그를 먹는 것은 상징적으로 개를 먹는 행위라고 우길 수도 있겠다.
올해는 문화와 문명에 대한 논란이 어느 해보다 많았다. 문명의 충돌로 떠들썩하다 급기야는 보신탕이 다시 문화 문제로 부각되었으니 말이다. 몇 년 전에도 외국인들이 보신탕을 문제 삼은 적이 있었다. 몇몇 문화인류학자들은 외국인들이 한국의 식문화를 자신들의 잣대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를 해달라는 요청을 매스컴 등으로부터 받기도 했다. 문화상대주의와 자민족중심주의가 일반에게 널리 알려지는 계기는 이렇게 견공(犬公)에 의해 뜻하지 않게 마련되기도 했다.
아프간 사태와 더불어 드디어 문명의 충돌이 시작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있었을 때, 문명간 대화를 강조하는 목소리도 아울러 높아졌었다. 우리 사회 일각에서도 그동안 이슬람을 너무나 몰랐다는 반성이 일어났다. 또 이슬람의 시각에서 세상을 보아야 한다는 주장도 설득력을 얻기 시작했다. 드디어 문화상대주의가 평화와 인권, 타문화 이해 등과 관련하여 진지한 관심의 대상이 되나보다 했었다.
그런데 얼마 후 보신탕과 관련된 발언과 보도가 알려지면서 문화상대주의는 또다시 보신탕과 관련되어 강조되기 시작했다. 안타깝기 짝이 없는 일이다. 보신탕에 불만이 있거나 하찮게 여겨서가 아니라, 보신탕 이야기가 나올 때만 문화상대주의를 강조하기 때문이다.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의 구별은 문화마다 다르며, 다른 문화를 가진 사람들의 식습관을 아무렇게나 경멸하거나 비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 해도 왜 우리는 보신탕 문제가 나올 때만 문화상대주의를 찾는 것일까?
문화상대주의는 다른 문화를 이해하는 일종의 방법론이다. 다른 문화의 제도나 행위, 가치나 규범을 그 문화의 관점에서 이해하자는 것이지, 다른 문화의 것이니까 무조건 존중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남의 문화에 대해 함부로 평가하거나 간섭하는 것도 금지하고 있지만 “내 문화니까 상관하지 말라”는 태도를 정당화하는 것도 아니다. 도덕적 상대주의와 혼동해서도 곤란하다. 특히 유리할 때만 찾다가 불리할 때는 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인간의 삶은 언뜻 보면 문제투성이지만 그래도 나름대로는 좀더 나은 삶, 좀더 인간다운 삶을 지향하려는 노력의 소산이기도 하다. 그러한 진지한 노력은 마치 ‘경작’(cultus)과도 같기 때문에 ‘문화’(culture)라는 말이 등장했던 것이다. 소위 미개인이라 생각되던 사람들의 삶의 방식도 나름대로 그러한 진지한 노력의 소산이라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인간집단의 삶의 방식을 일반적으로 문화라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보신탕이 문제 될 때만 문화상대주의를 찾을 것이 아니다. 우리보다 정치·사회·경제적으로 불리한 처지에 있는 외국인들을 대할 때야말로 문화상대주의를 생각할 일이다. 우리가 보신탕에 분개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의 자민족중심주의적 태도에 분개하는 외국인들이 얼마나 많을 것인가.
이렇게 미국에서는 개를 먹는다는 것은 그 발상만으로도 엄청난 일이었던 모양이다.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 그러한 만화가 센세이션을 일으켰는지도 모른다. 프로이트식으로 농담을 하자면, 미국인들은 잠재의식 속에 너무나 개를 먹고 싶은 욕망이 깊이 숨어 있기 때문에 오히려 남들이 개를 먹는 것에 대해 그리도 민감하게 반응한다고 할 수 있을까? 핫도그를 먹는 것은 상징적으로 개를 먹는 행위라고 우길 수도 있겠다.
올해는 문화와 문명에 대한 논란이 어느 해보다 많았다. 문명의 충돌로 떠들썩하다 급기야는 보신탕이 다시 문화 문제로 부각되었으니 말이다. 몇 년 전에도 외국인들이 보신탕을 문제 삼은 적이 있었다. 몇몇 문화인류학자들은 외국인들이 한국의 식문화를 자신들의 잣대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를 해달라는 요청을 매스컴 등으로부터 받기도 했다. 문화상대주의와 자민족중심주의가 일반에게 널리 알려지는 계기는 이렇게 견공(犬公)에 의해 뜻하지 않게 마련되기도 했다.
아프간 사태와 더불어 드디어 문명의 충돌이 시작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있었을 때, 문명간 대화를 강조하는 목소리도 아울러 높아졌었다. 우리 사회 일각에서도 그동안 이슬람을 너무나 몰랐다는 반성이 일어났다. 또 이슬람의 시각에서 세상을 보아야 한다는 주장도 설득력을 얻기 시작했다. 드디어 문화상대주의가 평화와 인권, 타문화 이해 등과 관련하여 진지한 관심의 대상이 되나보다 했었다.
그런데 얼마 후 보신탕과 관련된 발언과 보도가 알려지면서 문화상대주의는 또다시 보신탕과 관련되어 강조되기 시작했다. 안타깝기 짝이 없는 일이다. 보신탕에 불만이 있거나 하찮게 여겨서가 아니라, 보신탕 이야기가 나올 때만 문화상대주의를 강조하기 때문이다.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의 구별은 문화마다 다르며, 다른 문화를 가진 사람들의 식습관을 아무렇게나 경멸하거나 비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 해도 왜 우리는 보신탕 문제가 나올 때만 문화상대주의를 찾는 것일까?
문화상대주의는 다른 문화를 이해하는 일종의 방법론이다. 다른 문화의 제도나 행위, 가치나 규범을 그 문화의 관점에서 이해하자는 것이지, 다른 문화의 것이니까 무조건 존중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남의 문화에 대해 함부로 평가하거나 간섭하는 것도 금지하고 있지만 “내 문화니까 상관하지 말라”는 태도를 정당화하는 것도 아니다. 도덕적 상대주의와 혼동해서도 곤란하다. 특히 유리할 때만 찾다가 불리할 때는 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인간의 삶은 언뜻 보면 문제투성이지만 그래도 나름대로는 좀더 나은 삶, 좀더 인간다운 삶을 지향하려는 노력의 소산이기도 하다. 그러한 진지한 노력은 마치 ‘경작’(cultus)과도 같기 때문에 ‘문화’(culture)라는 말이 등장했던 것이다. 소위 미개인이라 생각되던 사람들의 삶의 방식도 나름대로 그러한 진지한 노력의 소산이라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인간집단의 삶의 방식을 일반적으로 문화라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보신탕이 문제 될 때만 문화상대주의를 찾을 것이 아니다. 우리보다 정치·사회·경제적으로 불리한 처지에 있는 외국인들을 대할 때야말로 문화상대주의를 생각할 일이다. 우리가 보신탕에 분개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의 자민족중심주의적 태도에 분개하는 외국인들이 얼마나 많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