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혹 정색을 한 비평이 그 자체로 코미디가 되는 영화가 있다. ‘패트리어트’가 그런 예다.
역사 서술에 대한 방법론적 오류를 지적하자니 사료의 리얼리티 수준이라는 것이 워낙에 볼품없고, 가족 보호라는 개인적 신념의 성취와 자유 수호 의지의 관계를 살피기에는 전시에 가족 이기주의를 등에 업고 뛰는 가장의 모양새가 워낙 단단(?)하므로, 이럴 경우 대개는 맥을 놓고 웃으며 그저 약간의 시니컬함만을 견지하려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 편하게 보고 즐기자는 데 웬 진지함? 하며 대중도 요구하지 않는가.
그러니 대충 액션 스펙터클의 규모와 테크닉을 ‘역사’라는 반찬에 비벼 음미하는 제스추어가 무난하기로야 으뜸일 게다.
감히 충고하자면 그러나 이것은 즐기는 태도의 최선이 못 된다. 게임을 소비하는 최상의 방도로는 아무래도 직접 참여하는 것만한 게 드물다. 대중문화 산업의 메커니즘에 개입하는 일은 소비자로 머무르는 것보다 몇 수 위의 즐거움을 줄 터이니, 우린 다시금 표정을 가다듬을 필요가 있겠다.
사우스캐롤라이나의 평범한 농부가 영국 군인에게 아들을 잃고 독립전쟁에 뛰어드는 과정을 그린 영화 ‘패트리어트’가 내세우는 장기는 무엇보다도 물리적 구경거리다. 시야를 여는 밀밭과 농지, 목가적인 해변에서의 휴가, 농촌의 사랑과 결혼, 늪지대 호숫가 병참 기지에서의 인간적인 갈등, 아담하게 꾸며진 전원 주택. 그 가운데 압권은 단연 울창한 산간 지대에서 총격전을 벌이고 함성과 함께 대지를 누비는 성난 병사들의 백병전이다.
그 점에서 ‘패트리어트’의 상술은 ‘브레이브 하트’의 그것과 닮은 구석이 꽤 많다. ‘브레이브 하트’에서 스코틀랜드의 자유를 위해 전장에 뛰어들었던 멜 기브슨이 ‘패트리어트’에서는 미국의 독립혁명 한가운데로 날아가 민중의 지도자가 되었다. 주인공이 같다는 이유 외에도 두 영화의 진정한 공통점은 주연으로서의 학살과 복수 장면, 거기에 양념으로서의 희생적 사랑과 영웅주의적 자유, 가족의 평화가 끼여 있다는 점이다.
그럼 그게 뭐가 문제인가. 필자는 오래 전에 ‘브레이브 하트’에 대해 이렇게 썼었다. ‘폴커크 전쟁과 스털링 전쟁은 정의로움, 굳셈, 화통함 등의 명분하에 머리를 베고 가슴을 찌르고 손목을 끊고 눈을 쑤시는 온갖 잔혹한 전투신으로 구성된다. 역사는 오로지 이 살인의 쾌감을 위해 존재할 뿐이다. 이 영화가 관객에게 제공하는 유일한 팬서비스는 이 전투장면이다. 그건 반성 없이 폭력과 살인의 속도를 즐기게 하는 것이다. 왜 ‘반성 없이’인가 하면, 월레스의 행위를 선(善)과 자유를 위한 투쟁, 즉 정의로움에 근거한 싸움으로 설정해 놓았기 때문이다. 적은 교활하며 월레스는 선하다는 하나의 구호 아래 스코틀랜드의 장정들과 영화는 뭉쳐 있다.’
고유명사 몇 개만 바꾸면 ‘패트리어트’에도 그대로 적용되겠지만, 지금은 정면으로 들어갈 필요성을 느낀다. 봉건 시대 영주의 폭정이나 ‘프리마 녹테’와 같은 부당한 법제에 대한 항거가 ‘브레이브 하트’의 관심이 아니듯, 미국 독립전쟁 이면에 놓여 있는 조세제도나 식민지 토지 소유권 분쟁, 제재업과 낙농업 등 경제지배 체제의 선점 문제 따위에 ‘패트리어트’는 흥미도 없다. 나 역시 마찬가지.
내가 겨냥하는 과녁은 이런 것이다. 어린 ‘남성’꼬마에게 장성한 샤를롯과 온 식구의 안전을 부탁하는 등 대단히 보수적이고, 흑인 노예의 자유를 운운하는 등 기만적이며, 액션의 절정, 마지막 반전에서조차 제이슨 이삭이 한참 뜸을 들여 역습을 당하는 등 졸렬한 수법을 남용하는 영화가, 살육의 유희를 위해 가족과 자유와 역사라는 테제를 주물러대는 어이없음. 자유와 진보의 이름 아래 역사의 상대적 측면을 모조리 가리고 표백하는 오만함.
흠, 얼굴색이 어떠해야 할지 좀 난감해지지 않는가. 고로 이렇게 적어두자. 실소할 ‘거리’가 마땅찮다면 이 영화를 보기를 권한다. 왠고 하면 ‘패트리어트’는 분노하고 화낼 영화는 못 되기 때문이다.
역사 서술에 대한 방법론적 오류를 지적하자니 사료의 리얼리티 수준이라는 것이 워낙에 볼품없고, 가족 보호라는 개인적 신념의 성취와 자유 수호 의지의 관계를 살피기에는 전시에 가족 이기주의를 등에 업고 뛰는 가장의 모양새가 워낙 단단(?)하므로, 이럴 경우 대개는 맥을 놓고 웃으며 그저 약간의 시니컬함만을 견지하려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 편하게 보고 즐기자는 데 웬 진지함? 하며 대중도 요구하지 않는가.
그러니 대충 액션 스펙터클의 규모와 테크닉을 ‘역사’라는 반찬에 비벼 음미하는 제스추어가 무난하기로야 으뜸일 게다.
감히 충고하자면 그러나 이것은 즐기는 태도의 최선이 못 된다. 게임을 소비하는 최상의 방도로는 아무래도 직접 참여하는 것만한 게 드물다. 대중문화 산업의 메커니즘에 개입하는 일은 소비자로 머무르는 것보다 몇 수 위의 즐거움을 줄 터이니, 우린 다시금 표정을 가다듬을 필요가 있겠다.
사우스캐롤라이나의 평범한 농부가 영국 군인에게 아들을 잃고 독립전쟁에 뛰어드는 과정을 그린 영화 ‘패트리어트’가 내세우는 장기는 무엇보다도 물리적 구경거리다. 시야를 여는 밀밭과 농지, 목가적인 해변에서의 휴가, 농촌의 사랑과 결혼, 늪지대 호숫가 병참 기지에서의 인간적인 갈등, 아담하게 꾸며진 전원 주택. 그 가운데 압권은 단연 울창한 산간 지대에서 총격전을 벌이고 함성과 함께 대지를 누비는 성난 병사들의 백병전이다.
그 점에서 ‘패트리어트’의 상술은 ‘브레이브 하트’의 그것과 닮은 구석이 꽤 많다. ‘브레이브 하트’에서 스코틀랜드의 자유를 위해 전장에 뛰어들었던 멜 기브슨이 ‘패트리어트’에서는 미국의 독립혁명 한가운데로 날아가 민중의 지도자가 되었다. 주인공이 같다는 이유 외에도 두 영화의 진정한 공통점은 주연으로서의 학살과 복수 장면, 거기에 양념으로서의 희생적 사랑과 영웅주의적 자유, 가족의 평화가 끼여 있다는 점이다.
그럼 그게 뭐가 문제인가. 필자는 오래 전에 ‘브레이브 하트’에 대해 이렇게 썼었다. ‘폴커크 전쟁과 스털링 전쟁은 정의로움, 굳셈, 화통함 등의 명분하에 머리를 베고 가슴을 찌르고 손목을 끊고 눈을 쑤시는 온갖 잔혹한 전투신으로 구성된다. 역사는 오로지 이 살인의 쾌감을 위해 존재할 뿐이다. 이 영화가 관객에게 제공하는 유일한 팬서비스는 이 전투장면이다. 그건 반성 없이 폭력과 살인의 속도를 즐기게 하는 것이다. 왜 ‘반성 없이’인가 하면, 월레스의 행위를 선(善)과 자유를 위한 투쟁, 즉 정의로움에 근거한 싸움으로 설정해 놓았기 때문이다. 적은 교활하며 월레스는 선하다는 하나의 구호 아래 스코틀랜드의 장정들과 영화는 뭉쳐 있다.’
고유명사 몇 개만 바꾸면 ‘패트리어트’에도 그대로 적용되겠지만, 지금은 정면으로 들어갈 필요성을 느낀다. 봉건 시대 영주의 폭정이나 ‘프리마 녹테’와 같은 부당한 법제에 대한 항거가 ‘브레이브 하트’의 관심이 아니듯, 미국 독립전쟁 이면에 놓여 있는 조세제도나 식민지 토지 소유권 분쟁, 제재업과 낙농업 등 경제지배 체제의 선점 문제 따위에 ‘패트리어트’는 흥미도 없다. 나 역시 마찬가지.
내가 겨냥하는 과녁은 이런 것이다. 어린 ‘남성’꼬마에게 장성한 샤를롯과 온 식구의 안전을 부탁하는 등 대단히 보수적이고, 흑인 노예의 자유를 운운하는 등 기만적이며, 액션의 절정, 마지막 반전에서조차 제이슨 이삭이 한참 뜸을 들여 역습을 당하는 등 졸렬한 수법을 남용하는 영화가, 살육의 유희를 위해 가족과 자유와 역사라는 테제를 주물러대는 어이없음. 자유와 진보의 이름 아래 역사의 상대적 측면을 모조리 가리고 표백하는 오만함.
흠, 얼굴색이 어떠해야 할지 좀 난감해지지 않는가. 고로 이렇게 적어두자. 실소할 ‘거리’가 마땅찮다면 이 영화를 보기를 권한다. 왠고 하면 ‘패트리어트’는 분노하고 화낼 영화는 못 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