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66

2003.01.02

외국인 가장 한국인 소행인가

증권사 홍콩 법인 거액 미수 사건 의혹 … 한 종목만 단기매매 주가조작 가능성도

  • 유일한/ 머니투데이 주식부 기자 onlyyou@moneytoday.co.kr

    입력2002-12-27 09: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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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국인 가장 한국인 소행인가

    홍콩 증권거래소 내부 모습. 외국인을 가장한 한국인 투자자들이 홍콩을 무대로 활동하는 것은 홍콩이 아시아 금융시장의 중심지이기 때문이다.

    LG투자증권과 대신증권의 홍콩 현지법인은 12월9일에서 13일에 걸쳐 외국인 기관투자자로부터 각각 2009억원, 1100억원의 미수(주식을 사놓고 매입 대금을 결제하지 않는 것) 사고를 당했다. 두 증권사는 이 사고로 각각 124억원, 22억6300만원의 손실을 봤다.

    이 사고로 ‘OZ 캐피탈’로만 알려진 정체불명의 외국계 펀드가 국내 증권사 홈트레이딩시스템(HTS)을 통해 돈 한푼 들이지 않고 한국 주식시장의 대표주인 삼성전자 주식을 수천억원어치나 살 수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져 업계에 충격을 줬다. HTS를 통해 매매가 이뤄졌다는 점, 그리고 약 1년 전부터 삼성전자주를 중심으로 단기매매에 치중했다는 점이 알려지면서 정통 외국인 투자자가 아니라 외국인을 가장한 한국인, 이른바 ‘검은 머리 외국인’의 소행일 가능성이 제기됐다.

    급기야 이들이 코스닥 등록 기업인 K기업의 주요 주주로 확인돼 단순한 사고나 결제 불이행이 아니라 ‘검은 머리 외국인’의 주가조작 가능성으로 확대되는 등 의혹이 증폭됐다.

    금융감독원(이하 금감원)이 이 사건에 대해 조사를 벌이고 있는 중이어서 현재로선 정확한 실체를 확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미수 사고 주범이 검은 머리 외국인으로 밝혀질 경우 주식시장에 적지 않은 파문을 가져올 것으로 보인다. 우선 작전세력이 외국인 기관투자자를 가장했었다는 점에서 국내 투자자들이 맹신하고 있는 외국인 투자자 정보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을 초래할 것으로 보인다. 실제 내국인의 외국인 계좌 개설이 어렵지 않고 홍콩 등 가까운 이웃나라에서 이러한 계좌가 유행하고 있어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한국 증시 흔드는 ‘홍콩물고기’



    ‘이용호 게이트’ 수사 과정에서는 개인이 아니라 유명 금융기관이 검은 머리 외국인으로 작전에 ‘이용’된 사실이 밝혀져 충격을 주었다. 2000년 산업은행이 이용호씨의 대표 작전주였던 삼애인더스 해외전환사채(CB) 발행 과정에서 검은 머리 외국인 역할을 한 사실이 적발된 것이다. 당시 산업은행은 국내 증권사를 주간사로 900만 달러어치의 삼애인더스 해외 CB를 발행한 뒤 해외 증권사를 통해 이를 인수해 외국인이 CB를 인수한 것처럼 가장했다.

    금감원은 이 사건을 계기로 해외 CB가 검은 머리 외국인을 이용한 외자유치 등으로 편법 활용되는 것을 막기 위해 내국인이 해외에서 발행된 CB, BW(신주인수권부 사채)를 사실상 취득하지 못하도록 규정을 고치기도 했다.

    검은 머리 외국인은 주식시장뿐 아니라 지수선물옵션 등 파생상품 시장에서도 단골손님이다. 파생상품 시장에서 검은 머리 외국인으로 통하는 세력은 ‘홍콩물고기’라는 별명을 지닌 투기세력이다. 홍콩 소재 기관에서 주문을 내고, 이리저리 잘 빠져나간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들은 평상시에는 매매를 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수가 변곡점에 도달해 불안해지면 선물을 대규모로 매도하거나 매수해, 증시를 뒤흔들고 이 과정에서 이득을 챙긴다. 홍콩물고기가 처음 등장했던 1999년경에는 외국의 헤지펀드 그룹이 국내 증시를 교란시키고 있다는 설이 파다했으나 최근 들어서는 이들이 검은 머리 외국인이라는 관측이 우세하다. 계좌이름이 송어(Trout)인 것으로 알려진 외국인이 한때 홍콩물고기와 쌍벽을 이뤘으나 최근에는 움직임이 뜸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홍콩물고기는 매매 규모나 수법 등에서 국내 투자자들을 압도하기 때문에 이들을 상대할 만한 투자자는 없으며, 이들이 휩쓸고 가고 나면 후유증이 적지 않다.

    홍콩에 소재하는 외국계 증권회사에 10년 이상 근무한 경력이 있는 A씨는 “외국인을 가장한 한국인 투자자들이 상당히 확산돼 있다”고 주저없이 말했다. 그는 특히 이들이 미국 등 외국계 펀드와 달리 극도로 단기매매에 주력하고 있으며 일부 중소형 종목에도 관심을 갖고 있다고 덧붙였다.

    A씨에 따르면 한국인의 외국인 계좌 개설도 매우 용이하다. 이들을 대상으로 계좌 개설을 대행하는 변호사나 회계전문가 사무실이 홍콩 곳곳에 있으며 비용 부담도 크지 않고, 설립 절차도 간편하다고 한다. 말레이시아 라부안, 카리브해의 케이먼 군도 등 조세피난(Tax Haven)지역 유령회사(Paper Company)의 경우 설립 자본금이 1달러인 경우도 비일비재다. 최근 감독당국이 외국인 계좌 등록시 펀드나 법인의 경우 주주 명부를 구체적으로 기재하도록 강화한 이후 명의를 대여해주는 전문 직업도 성행하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외국인으로 등록되고 계좌만 개설되면 한국인 개인이 외국인 기관으로 둔갑, 증거금(매매 약정을 이용한다는 증거로 증권사에 맡기는 돈) 면제라는 혜택을 고스란히 누릴 수 있게 된다. 증거금이 면제된다는 것은 주식을 매입하는 데 돈이 전혀 들지 않는다는 의미다.

    ‘외국인 계좌 통해 투자’ 공공연

    외국인 가장 한국인 소행인가

    홍콩 현지법인이 미수 사고를 당한 LG증권과 대신증권.

    A씨는 “검은 머리 외국인들 대부분은 외국계 금융기관에 몸담은 경험이 있으며 혼자 활동하지 않고 팀을 구성해 매매에 나선다”며 “국내 금융시장에 대한 정보를 훤히 꿰뚫고 있는 데다 선진 금융기법까지 체득하고 있어 선물옵션과 연계된 복잡한 매매를 동원할 수 있다”고 전했다. 그는 맘만 먹으면 그룹을 동원해 ‘작전’까지도 가능하다고 덧붙였다.

    최근에는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고도의 HTS까지 제공되고 있어 매매 여건이 매우 개선됐다. A씨는 “진짜 외국인들은 메릴린치, 골드만삭스 등 외국의 유명 증권사 오프라인을 통해 매매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면서 “외국인이라고 하면서 HTS를 통해 주문한 경우는 검은 머리 외국인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했다.

    국내 증권거래소의 외국인 투자 비중은 11월 말 현재 35.9%. 국내 내국인 대주주 지분 대부분이 경영권 유지를 위해 유통되지 않는 점을 감안하면 외국인 투자 비중은 시장을 쥐락펴락하기에 충분하다. 사실 외국인이 사는 종목은 오르고 외국인이 파는 종목은 떨어지는 게 현실이다. 이처럼 외국인의 영향력이 커지자 시장에선 내국인이 외국인 계정을 이용해 투자하는 ‘검은 머리 외국인 계좌’가 많다는 게 정설이 되고 있다. 심지어 외국인이 사용하다 남기고 간 휴면계좌가 밀매된다는 얘기까지 나돌고 있다.

    금감원이 최근 국회 정무위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금감원은 최근 3년 동안 증권거래소로부터 7건(15명), 증권업협회로부터 3건(12명) 등 모두 10건의 외국인 불공정거래 혐의를 통보받아 조사했다. 이중 외국인이 실제로 주가조작을 한 것으로 드러나 검찰에 통보한 경우는 1건이었고, 거래소 3건, 코스닥 2건 등 5건은 내국인 소행인 것으로 밝혀졌다. 리젠트그룹 짐 멜론 사건 이외에 아직 외국인 주가조작 사건은 없었다.

    외국인이 우리나라 주식시장에 투자하려면 우선 금감원에서 투자등록증을 발급받아야 한다. 이어 외국환은행에 ‘증권투자전용 외화계정’과 ‘증권투자전용 원화계정’을 만들고 증권회사에 위탁계좌를 개설해야 한다.

    외국인의 계좌 거래는 금감원의 ‘외국인투자관리시스템’에 집계된다. 이 시스템은 종목별 투자한도 관리를 위해 설치됐지만 증권사에 외국인의 매수·매도 등 투자 동향을 알리는 자료가 된다.

    감독당국은 내국인이 외국인 계정을 이용해 투자하는 방법은 해외에서 외국인 명의의 유령회사를 구입해 국내로 자금을 송금하는 것뿐으로 파악한다. 그러나 A씨의 말처럼 조세피난지역에서 유령회사 매매는 흔히 이뤄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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