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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의 편지

산체스가 그립다

산체스가 그립다

산체스가 그립다
19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초반, 복싱팬들은 물고 물리는 경량급 KO왕들의 화끈한 승부에 매료됐습니다. 아, 그 전설 같은 이름들.

알폰소 사모라. 160cm가 채 안 되는 키에 어린아이처럼 해맑은 얼굴. 그러나 쇠뭉치 같은 좌우 훅을 포악스레 휘둘러대던 작은 포식자. 그에게 두 차례 무릎을 꿇은 홍수환은 10여 년 전 저와 인터뷰할 때 “(나를 4번이나 다운시킨) 카라스키야의 주먹은 아프다. 그러나 사모라의 주먹은 맞아도 감각이 없다. 그저 몽롱해질 뿐이다”라며 혀를 내둘렀습니다.

카를로스 사라테. 히틀러를 연상시키는 콧수염과 냉정한 표정, 깡마른 몸매. 정교한 미사일처럼 적진 깊숙이 내리꽂히는 가공할 스트레이트. 몸 좀 풀었다 하면 샌드백이 터져 모래가 새고, 밴텀급에선 그의 주먹을 견뎌낼 파트너가 없어 라이트급 선수들과 스파링을 하던 괴물. 46전46승45KO승의 사라테와 29전29승29KO승의 사모라가 맞붙은 세기의 대결. 사라테의 삼지창은 사모라의 철퇴를 유유히 걷어내며 처절하게 유린합니다. 4회, 캔버스에 나뒹군 사모라의 얼굴로 타월이 날아들더니 죽음의 의식(儀式)처럼 눈을 가려버립니다.

윌프레도 고메즈. 데뷔전 무승부 이후 32연속 KO승, 염동균을 무너뜨리고 챔피언이 된 이래 17명의 도전자를 모두 KO시킨 진기록. 닉네임 ‘바주카’. 드센 완력으로 상대를 로프사이드로 몰아붙여 혼을 빼놓고는 바주카포 같은 레프트훅을 난사해 얻은 별명입니다. 한 체급 높여 그에게 도전한 사라테도 몇 차례나 로프로 내동댕이쳐지다 결국 5회를 넘기지 못했습니다.

살바도르 산체스. 세련된 용모만큼이나 깔끔한 ‘아트 복싱’의 전범(典範). 현란한 풋워크, 버들가지처럼 낭창낭창한 허리, 어떤 각도에서든 자로 잰 듯 쉬지 않고 뻗어내는 면도날 펀치. 2체급 석권을 호언하며 그에게 달려든 33전32KO승1무의 고메즈는 첫 회부터 무수히 연타를 얻어맞은 끝에 마약중독자처럼 흐느적대다 동공이 풀린 채 쓰러지고 맙니다.



마음은 급한데 일은 안 풀릴 때, 누군가의 꽉 막힌 교조적 행태에 분노할 때, 호의가 곡해되어 부메랑으로 날아들 때, 곤경에 빠진 동료에게 아무런 도움이 못 될 때, 그렇게 기운 빠져 있을 때면 인터넷으로 이들의 명승부를 다시 보며 스트레스를 풉니다. 산체스의 눈부시도록 산뜻한 몸놀림에 새삼 탄복하면서 과연 이 호리호리한 꽃미남이 경량급 전국시대를 평정한 비결이 뭘지 생각해봅니다.

그건 ‘드나듦의 내공’이 아닐까 합니다. 공격 일변도에 가까운 사모라, 사라테, 고메즈와 달리 산체스는 끊임없이 드나들기를 반복합니다. 적이 흔들린다 싶으면 매섭게 파고들지만 적이 저항할 때는 반드시 물러나 제풀에 지치기를 기다립니다. 그래서 사냥은 춤이 됩니다.

경제성장률 -2%, 실질실업률 15%. 이 어려운 시기엔 ‘돌격 앞으로’만이 정답은 아닐 듯합니다. 물러서야 할 때 물러서기, 물러서서 준비하기, 준비하고 다시 나아가기. 춤을 추듯 자연스러운 3단계 전략이 필요할 때입니다. 직장생활에서도 예외는 아니겠죠. 바로 산체스의 전략입니다.

P.S. 살바도르 산체스는 9차 방어전 승리 22일 뒤인 1982년 8월12일, 애마 페라리를 몰다 사고로 유명을 달리했습니다.



주간동아 2009.03.03 675호 (p10~10)

  • 이형삼 han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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