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71

2009.01.27

나 홀로 여성만 골라 철저히 농락

50대 사기꾼 황당 행각 피해자들 ‘피눈물’

  • 유재영 기자 elegant@donga.com

    입력2009-01-19 17:2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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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 홀로 여성만 골라 철저히 농락
    혼자 살면서 경제적으로 어려워 보이거나 얼굴에 근심이 가득해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할 것 같은 여성만을 골라 사기행각을 벌인 50대 남성이 최근 구속됐다. 얼마나 수법이 ‘탁월’하고 교묘했는지 범인을 잡은 경찰 관계자들이 혀를 내두르다 못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정도였다.

    상습 사기로 구속된 윤모(55) 씨. 직장도 없는 무일푼 신세이던 윤씨는 10년 전 아내와 별거한 뒤 홀로 지내는 처지였다. 막노동도 찾지 못해 돈벌이를 하지 못했고 결국 월세방에서도 쫓겨나 찜질방, 여관 등을 전전했다.

    오후 3~4시 표정 무거운 여성에게 접근

    살길이 막막해진 윤씨. 이런 상황에서 그는 성실하고 진솔하게 살려고 노력하기는커녕 예전에 하던 ‘몹쓸 짓’에 다시 손을 대고 말았다. 이미 사기 등의 전과가 6범이나 되는 윤 씨는 힘없는 여성들을 범행 대상으로 삼기 시작했다.

    윤씨가 ‘사냥’에 나선 곳은 서울 송파구 잠실동의 잠실 지하철역. 2호선과 8호선이 지나가는 역이고 롯데월드와 백화점, 아파트가 밀집해 유동인구가 서울시내 지하철역 중 가장 많은 곳 가운데 하나다. 윤씨는 이 점을 활용했다. 오후 3~4시에 역으로 나와 혼자 걸어가면서 옷차림이 평범하고 표정이 무거운 여성을 골라 접근했다.



    “잠깐만요.”

    지난해 11월 윤씨는 지체장애 3급으로 몸이 불편한 A(52)씨에게 말을 걸었다.

    “저 모르시겠어요?”

    자신을 안다면서 따라붙는 윤씨를 보고 A씨는 머뭇거렸다. 그러나 윤씨가 계속 정답게 말을 건네자 A씨는 마음을 조금씩 열었다. A씨가 보기에 윤씨가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았다. A씨는 점퍼에 양복바지를 차려입은 윤씨의 선한 인상을 보고 전에 일하던 가게 근처 주민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잠실역 지하상가 입구 자리에 종이상자를 깔고 지내는 노숙자들과 비교하면 윤씨의 모습은 전혀 딴판이라 해를 끼칠 사람일 것이라는 의심은 하지 못했다. 결국 A씨는 “어디 가서 차나 한잔 하자”는 윤씨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하고 연락처까지 알려줬다. A씨는 경찰 조사에서 “혹시 파출부 일자리라도 주려나 해서 전화번호를 줬다”고 밝혔다.

    윤씨는 다음 날부터 곧바로 ‘작업’에 들어갔다. 전화로 A씨를 불러낸 윤씨는 밥을 사주면서 달콤한 말로 A씨를 유혹했다. 그러면서 “편안하게 살도록 도와주겠다”며 진심 같은 가식을 표현한 윤씨는 동거까지 제안해 환심을 샀다.

    12명 사탕발림 마수에 넘어가

    A씨가 다소 못 미더운 눈치를 보이자 전처가 바람을 피웠다는 둥 구구절절 애처로운 사연을 들먹이며 마음을 돌렸다. 자신에게 2층짜리 건물이 있는데 건물에 맥줏집이 임대해 들어왔다는 그럴듯한 거짓말도 둘러댔다.

    윤씨의 언변에 솔깃해 함께 술을 마신 A씨는 급기야 그와 밤을 보냈고, 윤씨는 A씨가 30년 동안 어렵게 일을 해 모아 산 금반지와 금목걸이를 커플링을 만든다는 핑계로 받아낸 뒤 곧바로 A씨와 연락을 끊었다.

    경찰 수사 결과 윤씨는 A씨 외에도 11명의 여성에게 유사한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절반 이상은 40대 이혼녀였다. 송파구의 찜질방에서는 20대 중반 여성에게도 접근해 온갖 ‘사탕발림’으로 여관으로 유인해 추행하고 현금까지 빌려갔다. 이 여성은 추행을 당하면서도 윤씨가 “돈이 필요한데 건물 월세가 2~3일 후면 입금되니 그때 갚겠다”고 하자 돈을 빌려줬다.

    이처럼 윤씨는 자신이 건물주라고 자랑하며 여성들을 유혹했다. “경기도 가평에도 땅과 건물이 있다” “집이 수리 중인데 한번 찾아와라” “건물을 임대해줘 장사할 수 있게 해주겠다”는 식의 거짓말을 피해자마다 번갈아 썼던 것으로 드러났다.

    때로는 피해자 앞에서 자기 건물에 임대한 맥주전문점 직원에게 전화가 온 것처럼 연기를 하며 가게 오픈 날짜까지 알려주는 치밀함도 보였다. 피해자들은 하나같이 “말을 잘하고 인상이 선해 보여 그대로 믿었다”고 진술했다.

    윤씨의 범행 특징은 범행 기간이 매우 짧았다는 것. 일단 ‘애프터’가 받아들여지면 두세 차례 만난 뒤 여성들과 잠자리를 하고 금품을 뜯은 다음 곧장 연락을 끊었다.

    경찰 조사 결과 윤씨가 잠실역 등에서 노린 대상은 30여 명. 이 중 12명이 그의 마수에 걸려들었으니 결국 윤씨의 ‘잠깐만요’ 범행 성공률은 40%가 넘었던 셈. 피해액은 500만~700만원에 그쳤으나 당한 이들의 정신적 피해는 크다.

    송파경찰서 형사4팀은 최근 윤씨의 범행과 관련한 첩보를 입수한 뒤 행적을 쫓아 검거했다. 윤씨는 전날 범행 대상으로 삼은 여성과 현장에서 다시 마주쳐도 태연하게 지나쳤을 만큼 자연스럽게 ‘연쇄 범행’을 저질러왔던 것으로 드러났다. 정작 본인은 “돈은 빌린 것이고 여자들은 서로 좋아서 만난 건데 뭐가 잘못이냐”며 혐의를 부인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사건을 수사한 경찰 관계자는 “여성들이 왜 그런 뻔한 수법에 넘어갔는지 납득되지 않는다”며 “피해 액수를 떠나 어려운 사람을 또 한 번 궁지로 몰아넣었다는 점에서 죄질이 아주 나쁜 사기범죄”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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