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간동아 로고

  • Magazine dongA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茶人기행(22)|운곡 원천석

작설차의 영묘한 공덕 헤아리기 어렵네

茶詩 통해 ‘앓는 눈 열리고 현기증 나았다’ … 태종 때 벼슬 사양하고 치악산에서 生 마감

  • 정찬주/ 소설가

작설차의 영묘한 공덕 헤아리기 어렵네

작설차의 영묘한 공덕 헤아리기 어렵네

원주 원씨 문중에서 세운 운곡 시비.

화개에서는 작설차를 사투리로 ‘잭설차’라고 부른다. 그 잭설차는 우리가 아는 작설차와 다르다. 화개에 대대로 전해져오는 작설차는 차를 우렸을 때 황색이 나는 발효차인 것이다. 그런데 작설차라는 단어가 최초로 등장하는 시가 있었으니, 바로 운곡(耘谷) 원천석(元天錫)이 남긴 다시(茶詩)다. 나그네는 지금 운곡 선생이 말년에 은둔했던 원주 치악산으로 가고 있는 중이다.

운곡은 조선 초의 문인으로, 원주에서 태어나 고려 말 나라가 혼란스러워지자 치악산으로 숨어들어 부모를 봉양하며 생을 마친 이다. 그가 남긴 다시는 이렇다.

그리운 서울 소식 숲 집에 이르니/ 가는 풀에 새로 봉한 작설차여라/ 식사 뒤의 한 사발은 두루 맛있고/ 취한 뒤의 세 사발은 가장 뛰어나고 자랑스럽네/ 마른 창자 적신 곳에 앙금도 없고/ 앓는 눈 열릴 때 현기증 없어지네/ 이 물건 영묘한 공덕 시험은 헤아리기 어렵고/ 시마(詩魔)가 다가오니 수마는 없어진다네.

굳이 시 전문을 소개하는 이유는 운곡이 마신 작설차와 화개 노인들이 말하는 작설차 사이에 일치하는 부분이 있어서다. 화개 사람들은 원래 작설차를 기호식품으로 마시지 않고, 속이 더부룩하거나 감기에 걸렸거나 체했을 때 상비약으로 마셨다고 한다. 운곡 선생의 시에도 ‘취기를 가라앉히고 현기증을 없앤다’고 한 부분이 있다. 나그네도 화개에서 생산하는 명경차를 장복하고 있는데 그 효험을 실감하고 있다.

태종이 치악산까지 찾아와 삼고초려



또 하나 일치하는 것은 사발에 우려 마신다는 점이다. 발효차이기 때문에 녹차처럼 작은 잔에 마시지 않고 사발에 마셨던 것이다. 그렇다면 발효차였던 작설차가 언제부터 지금 우리가 마시는 녹차로 변했을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아마도 조선시대 중·후기가 아닐까 싶은데, 다산이나 초의가 남긴 시문의 차 달이는 구절이나 묘사를 보면 짐작되는 것이다.

운곡은 일찍이 이방원(태종)을 가르친 적이 있어 태종이 즉위한 뒤 높은 벼슬을 받을 수 있었으나 불사이군(不事二君)을 내세워 번번이 거절한다. 그가 치악산에서 출사하지 않은 까닭은 고려 왕조에 대한 충의심 때문이었다. 그의 절개를 담은 회고시는 우리가 어린 시절에 교과서에서 배운 바 그대로다.

흥망이 유수하니 만월대도 추초로다/ 오백년 왕업이 목적에 부쳤으니/ 석양에 지나는 객이 눈물겨워하노라.

작설차의 영묘한 공덕 헤아리기 어렵네

운곡을 제사 지내는 사당.

그래도 태종은 운곡이 사는 치악산까지 찾아간다. 그러나 운곡을 만나지 못하고 대신 그의 아들 형(泂)을 기천(基川·지금의 풍기) 현감으로 임명하고 돌아갔다고 전해진다. 태종이 운곡을 삼고초려한 것을 보면 운곡의 학문과 인품이 절로 느껴진다. 전해지는 운곡의 시문은 대부분 충의심을 고양하는 내용들로 유명하다. 특히 운곡은 말년에 저술한 야사 6권을 자손에게 보이며 “이 책을 가묘에 갖춰두고 잘 지키도록 하라”고 유언했지만, 증손대에 이르러 조선 왕조를 거스르는 부분이 많아 화가 미칠까 두려워 불살라버렸다고 한다.

원주 시가지를 벗어나 치악산으로 들어가니 과연 운곡을 기리는 사당을 중심으로 왼편 골짜기에는 문중에서 건립한 시비가 있고, 오른쪽에는 고려국자진사원천석지묘(高麗國子進士元天錫之墓)라는 둔덕 같은 큰 무덤이 있다. 묘비의 명문 중 나그네의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고려국의 아들이라는 ‘고려국자(高麗國子)’다. 자(子)라는 한 글자가 하늘이 내린 훈장처럼 눈부시다. 생전에 즐겨 마셨을 작설차 한 잔을 운곡 선생 무덤 앞에 올리지 못한 것이 송구스럽기 짝이 없다.

가는 길원주인터체인지를 빠져나와 치악산 황골 쪽으로 들어서 향로봉 가는 길로 5분 정도 가면 석경마을 입구가 있는데, 거기서 800m 떨어진 곳에 운곡의 사당과 무덤이 있다.



주간동아 2005.06.28 491호 (p53~53)

정찬주/ 소설가
다른호 더보기 목록 닫기
1223

제 1223호

2020.01.17

설 연휴에 뭐 먹지? 편의점에 다 있다!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