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9월12일 열린 전국경제인연합회 월례회의에 참석한 이건희 회장(왼쪽에서 두 번째). 오른쪽에서 두 번째는 전경련 회장인 손길승 SK 회장.
A씨는 “사실 하청업체 입장에서는 원청업체 직원의 ‘방문’은 그 자체만으로도 굉장한 ‘부담’인데, 삼성 직원들의 경우는 전혀 그렇지 않다”면서 “가령 점심식사 때가 되면 삼성맨들은 자기들끼리 따로 나가서 식사를 해결하고 들어오는 등 ‘접대’에 신경 쓰지 않게 해줘 좋다”고 말했다. A씨는 다만 “삼성 하청업체가 된 이후 여전히 까다로운 품질관리를 통과해야 하는 것은 부담이 된다”고 말했다.
A씨의 ‘삼성 경험담’은 중소기업인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들을 수 있는 말 가운데 하나다. 삼성이 평소 어떻게 직원들을 관리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A씨는 “기업을 하는 입장에서 부러운 점은 삼성 직원들의 그런 태도 덕분에 삼성에서는 ‘내부 비리’가 발붙이기 어려울 것으로 생각된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실제 삼성은 구매 업무 등에서 일찍부터 ‘내부 비리’를 없애 다른 그룹들의 벤치마킹 대상이 되고 있을 정도.
그러나 삼성맨들을 바라보는 재계의 시선이 항상 호의적인 것만은 아니다. 삼성맨들에게는 ‘얌체 같다’ ‘약삭빠르다’는 평가도 따라다닌다. ‘정보’를 담당하는 한 재벌 그룹 관계자는 “서울 여의도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대기업 정보팀 관계자들 모임이 10여개 이상 되지만 어느 모임에서도 삼성맨들이 환영받지 못하는 것은 삼성맨들은 정보를 받기만 하고, 잘 주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삼성에 대한 이런 평가는 삼성의 성장과정과 연관이 있다는 평가다. 현대그룹 관계자는 “현대는 조선 자동차 등 국내에서 개척한 산업이 많은 데 반해 삼성은 전자나 자동차산업 진출에서 보듯 다른 그룹이 먼저 시작해 사업성이 확인된 분야에만 진출, 그룹 전체의 역량을 총동원해 선발업체를 제치고 그 분야의 1위로 올라선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얌체 같다’는 이미지가 굳어진 측면이 있다”고 분석했다.
권력과 ‘불가근 불가원 원칙’ 미움 살 행동 자제
김각중 전 전국경제인연합(이하 전경련) 회장 후임 선정 과정에서도 삼성의 처신은 ‘약삭빠르다’는 평가를 받았다. 재계 서열 5위 안에 드는 한 그룹 고위 관계자는 “재벌개혁을 소리 높여 주장해온 노무현 정권 출범을 앞둔 상황이었기 때문에 재계를 대표하는 삼성 이건희 회장이 전경련 회장직을 맡아 재계 입장을 적극 대변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여론이 일었으나 이회장이 끝내 나서지 않아 아쉬움이 많았다”고 말했다.
재계에서는 삼성의 이런 태도에 대해 창업주인 고 이병철 회장이 지켜온 권력에 대한 ‘불가근 불가원 원칙’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해석한다. 현대그룹 관계자는 “고 이병철 회장은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정권 시절에 한 번도 청와대를 방문하지 않는 등 일정한 거리를 두었지만 정권의 미움을 사지도 않았다”면서 “이건희 회장도 전경련 회장을 맡아 노무현 정권과 맞설 필요가 있겠느냐고 판단했을 법하다”고 분석했다.
그렇다고 삼성이 권력 핵심에 대한 ‘관리’를 하지 않는다고 보면 착각이다. 지난해 김대중 전 대통령 아들 홍업씨 수사 과정에서 삼성측이 1999년 12월 홍업씨에게 5억원을 전달한 사실이 밝혀졌다. 김대중 정권에서 홍업씨는 나름대로 인사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등 드러나지 않는 ‘실세’로 통했다. 삼성 사정에 밝은 한 재계 관계자는 “노무현 정권이 탄생한 이후 다른 그룹은 잔뜩 긴장하고 있는데, 삼성에서는 그런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아 ‘역시 삼성은 다르구나’ 하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삼성의 로비 방식은 ‘저인망식’으로 알려져 있다. 당장 현안이 없어도 엘리트 관료들을 꾸준히 ‘관리’하고 필요한 경우 광범위한 인적 네트워크를 동원해 접근한다는 의미에서다. 한 국세청 관계자는 “삼성전자 C사장은 국세청 내에서 ‘국세청 직원이 상을 당하면 국세청의 동료 직원들보다 먼저 상가에 와 있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로 국세청 직원들을 관리한다”고 혀를 내둘렀다.
삼성의 승용차 사업 진출은 기존 업체의 강한 반발을 샀다. 94년 말 정부의 삼성 승용차사업 진출 허용 조치 직후 반대 성명을 발표하고 있는 정몽규 당시 한국자동차공업협회장(오른쪽에서 세 번째)과 자동차 업체 대표들.
삼성의 ‘무노조 신화’ 역시 재계의 부러움을 사는 부분. 삼성정밀화학(구 한비), 삼성증권(구 국제증권), 삼성생명(구 동방생명) 등 다른 회사를 인수해 자연스레 노조가 생긴 경우를 제외하고 기존 삼성 계열사 중에는 노조가 없다. 최근 신라호텔 직원들의 노조 설립 시도도 끝내 무산됐다. 서울 중구청에 노조 설립 신고서를 제출했던 신라호텔 직원들이 3월28일 신고를 자진 취하했기 때문.
물론 삼성의 ‘무노조 신화’에 대해서는 ‘비용’ 측면에서 반드시 바람직한가 하는 의문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LG전자 관계자는 “삼성이 ‘무노조 신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경쟁사보다 더 많은 임금을 보장해야 하는 등 ‘보이지 않는 자금’이 의외로 많이 들어갈 수 있다”고 말했다. LG전자는 80년대 말 대규모 노사분규를 겪은 이후 적극적인 노조 포용 정책을 통해 올해로 15년째 노사분규 없이 임금 협상을 마무리지었다.
그럼에도 오랫동안 노동쟁의 문제를 전담했던 노동부 관계자는 삼성의 ‘무노조 신화’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이 관계자는 “삼성식 노조 정책이 LG보다는 ‘비용’이 더 많이 들 수 있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사회 전체로 보면 ‘무노조 신화’를 이어가는 삼성과 노조가 있는 다른 그룹이 선의의 경쟁을 하는 셈이 되기 때문에 긍정적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삼성 입장에서는 ‘삼성이 독주한다’는 재계의 시선이 부담스러운 눈치다. 재계에서 안 좋은 일이 생길 때마다 ‘삼성 음모설’이나 ‘삼성 배후설’ 등이 불거져나와 더욱 그렇다. 최근 SK그룹 수사 과정에서도 재계 일각에서는 “검찰의 칼날이 삼성 쪽으로 향하는 것을 막기 위해 삼성이 움직여 애꿎은 SK만 희생된 것 아니냐”는 얘기가 나돌았을 정도. 물론 이는 검찰의 생리를 모르는 데서 나온 근거 없는 음해라는 게 재계의 일반적인 반응.
삼성이 ‘삼성 음모설’에 휘말린 것은 이번만이 아니다. 98년 하반기 대우그룹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는 김우중 회장까지 나서 “삼성그룹 금융 계열사들이 대우에서 채권을 집중적으로 회수, 대우를 흔들고 있다”고 불만을 털어놓았을 정도였다. 당시 금융감독위원회에서 기업 구조조정을 담당했던 고위 관계자는 “설사 삼성 금융 계열사가 그런 일을 했다고 해도 비난할 일은 아니며 그나마 당시 대우측 주장은 상당히 과장됐다”고 회고했다.
재계에서는 삼성의 ‘독주’는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보고 있다. 외환위기 직후 스스로 구조조정에 나서 그룹 전체의 체질을 강화해놓았기 때문. 그러나 이건희 회장이 몇 년 전부터 ‘10년 후에는 무엇으로 먹고살지 고민하라’는 지시를 내린 것에서도 알 수 있듯 삼성은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10년 후를 내다보고 있다. 그리고 이런 고민은 한국경제 전체의 고민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