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 제2의 도시 바스라를 공격하는 영국군. 이번 전쟁에는 영국군 3만1000여명이 참전했다.
그렇다면 3만1000명의 영국군이 참전한 이번 전쟁에서 블레어 총리는 과연 무엇을 얻었나? 전후 이라크의 재건 과정에서 영국은 경제적 이권을 확보할 수 있을까? 조기 종전으로 총리 자신의 당내 입지를 굳히고 프랑스와 독일, 특히 프랑스와의 악화된 관계를 회복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여전히 불확실하다. 전후 재건 과정에 미국 기업만이 입찰했다는 소문이 돌면서 유엔의 역할에 대한 미국과 영국의 의견 차이가 계속 노출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라크 재건 미국기업이 독식?
우선 가장 큰 이권이 달린 원유문제를 보자. 사실 이번 전쟁의 목적은 이라크가 보유하고 있다고 추정돼온 대량살상무기의 제거보다 석유 확보에 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었다. 프랑스와 러시아, 중국의 정유업체들은 이미 몇 년 전부터 세계 2위 산유국인 이라크와 계약을 체결, 유엔의 이라크 경제제재가 해제될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반면 이라크 경제제재에 앞장선 미국과 영국의 정유업체는 개발권을 따내지 못했다.
사담 후세인 정권이 붕괴되고 경제제재가 해제되면 기존 유전개발 계약의 상당수는 무효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과 영국의 다국적 정유회사는 하루 150만 배럴을 수출하는 이라크 원유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 출신지역인 텍사스의 석유재벌로부터 엄청난 정치자금을 받아 ‘석유대통령’이라는 별명까지 얻은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당연히 미국의 정유업체를 지원할 것이다. 미국과 영국의 정유업체들이, 그리고 양국 정부가 유전 개발권을 따내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겠지만 영국 정유회사가 미국을 제치고 유전개발권을 따낼 수 있을지에 대해 영국 언론은 회의적인 시각을 보이고 있다.
이라크 전후 복구에 필요한 건설업체 등 각종 계약에서도 미국은 자국 기업에만 입찰제안서를 발송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복구사업의 이권을 따내기 위한 경쟁도 막후에서 진행되기 때문에 아직 많은 부분이 베일에 가려 있지만 미국의 멋대로 전후 이라크 경제와 정치를 좌우하려는 의도는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미국은 이미 전후 이라크 재건과 과도정부 수립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겠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4월 초 브뤼셀을 방문한 미국의 콜린 파월 국무장관은 “미국과 영국이 어려운 결정을 내려 전쟁을 치르고 있다. 따라서 두 나라가 전후 이라크 재건과 정치체제 구축에서 중심 역할을 해야 한다”고 밝혔다. 즉 두 나라, 그중에서도 미국이 피를 많이 흘린 만큼 자신들이 이라크를 멋대로 요리하겠다는 의사를 완곡히 표현한 것이다.
블레어 총리는 지난달 20일 이라크전쟁이 시작된 직후부터 줄기차게 전후 이라크에서 유엔이 중심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강조해왔다. 이처럼 블레어가 유엔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은 국내 정치적인 측면과 함께 이번 전쟁으로 최악의 상황에 이른 프랑스와의 관계를 회복하려는 의도다. 유엔의 2차 결의를 얻지 않고 이라크를 침공한 것에 대한 노동당 내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서라도 전후 재건과 과도정부 수립에서 유엔의 역할을 강조할 수밖에 없다.
또 이라크 사태에 대해 독일과 프랑스는 평화적 해결을 강조하며 전쟁에 반대해왔다. 또 대다수의 유럽연합(EU) 회원국은 전후 이라크에서 유엔이 주도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이라크전쟁이 발발한 직후인 3월20일 브뤼셀에서 열린 EU 정상회담에서도 회원국 수반들은 이 점을 분명히 했다. 국제사회의 이라크 원조를 효과적으로 조정하고 이라크 국민의 민심을 얻을 수 있는 길은 유엔을 통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EU의 양대 강국인 프랑스, 독일과의 관계 악화를 무릅쓰고 미국을 지지한 블레어 총리는 악화된 이들 두 나라와의 관계를 회복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1997년 총리 취임 이후 블레어는 유럽연합군 창설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단일화폐인 유로화 발행에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등 친EU 정책을 실시해왔다. 블레어 총리가 전후 처리 과정에서 유엔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은 EU 회원국의 신뢰를 되찾으려는 제스처이기도 하다. 물론 블레어 총리 자신도 미국의 독주를 견제하기 위해서는 EU를 이용해야 한다.
블레어 총리가 직면한 또 하나의 난제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문제의 해결이다. 이라크전쟁 직전 부시 대통령과 블레어 총리는 앞으로 2년 안에 중동평화를 정착시키겠다고 공언했다. 이라크 침공을 앞두고 거세게 반발하는 아랍권을 다독이려는 ‘당근’이었다. 이 계획의 골자는 미국과 러시아, EU와 유엔이 중동평화 정착을 주도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올해에만 이스라엘에 100억 달러, 우리 돈으로 12조원이나 되는 막대한 경제지원을 한 미국이 거의 본능적으로 이스라엘 편을 든다는 점이다. 미국의 정치·언론 등을 장악한 유대인의 영향력 때문에라도 미국은 이스라엘 쪽에 서지 않을 수 없다. 벌써부터 미국의 보수인사들과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에 평화협상을 재개하기 위한 조건으로 테러분자의 색출 등 여러 가지 전제조건을 내세우고 있다. 공언은 했지만 중동의 평화정착은 난제 중의 난제다.
영국의 일간지 ‘가디언’은 전후 이라크 문제에 대해 미국과 영국-EU 회원국 간의 현격한 의견 차이를 지적하며 블레어 총리가 이 전쟁을 통해 무엇을 얻었는지를 질문했다. ‘가디언’은 또 중동 평화정착은 신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며 과연 미국을 지지해준 것만큼 미국의 일방주의를 견제할 카드를 영국이 가지고 있느냐고 물었다. 즉 이번 전쟁에서 영국은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합법화해준 들러리 노릇밖에 한 것이 없다는 지적이다. 더구나 이라크에서 끝내 대량살상무기를 찾아내지 못할 경우 블레어 총리는 당내와 국민으로부터 비도덕적인 전쟁에 동참했다는 비난을 들을 수밖에 없다.
한 시민은 미국과 영국의 이라크 침공이 개시된 직후 신문에 투고한 글에서 “영국 국민이라는 사실이 부끄럽다. 국적을 포기하고 싶다”고 말했다. 국제법을 위반해가며 이라크를 침공, 전통적으로 영국에 우호적이었던 아랍권에서 국가 이미지를 실추했다는 사실을 지적한 것이다.
비록 이라크전쟁은 끝나가지만 영국에서 이 전쟁의 여파는 이제 시작되고 있는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