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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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건 총리 안 나서나 못 나서나

취임 두 달 내각 조율 뚜렷한 역할 부재 … 실세들과도 갈등 ‘책임총리’ 머나먼 길

  • 김기영 기자 hades@donga.com

    입력2003-04-17 11: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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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건 총리 안 나서나 못 나서나

    노무현 대통령과 고건 총리의 역할 분담이 원활한 국정운영으로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국무회의장에 들어서는 노대통령과 고총리.

    ‘고건 총리가 보이지 않는다. ‘책임총리’라는 거창한 닉네임을 달고 임기를 시작했지만 취임 두 달이 지난 지금, 고총리를 인상 깊게 기억하는 국민들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왜 그럴까. 고총리 본인에게 문제가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책임총리가 등장하기엔 아직 정치환경이 무르익지 않은 것일까.

    최근 청와대의 한 고위 인사는 기자들과의 술자리에서 고총리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기회주의자로 노무현 정권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게 비판의 요지. 사석에서의 발언이지만 그의 정치적 무게로 보아 흘려들을 수 없는 발언이었다. 민주당의 한 중진의원도 최근 “지난 대선 때 우리 쪽에서 여러 차례 고총리를 찾아가 도와달라고 설득했으나 번번이 거절하더니, 대선 승리 뒤 총리를 맡아달라니까 즉각 수락했다”며 “이런 처신이 기회주의의 전형이 아닌가”라며 불만을 드러냈다.

    이처럼 여권 인사들 사이에서 고총리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들의 비판은 대체로 “고총리가 책임지는 자리에 나서려 하지 않아 노무현 대통령에게 모든 부담이 쏠리고 있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장관들이 연이어 실언을 해 사회적 물의를 빚어도 부처를 통할하는 총리의 적절한 대응이 보이지 않는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모두가 책임총리인 고총리의 역할부재에 따른 부작용이라는 것이다.

    청와대 인사 “노무현 정권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

    고총리의 역할에 대해서는 야당도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 4월7일 임시국회 정치분야 대정부 질문. 이날 있은 한나라당 의원과 고총리의 설전을 되짚어보면 책임총리에 대한 정치권 일반의 인식과 고총리 자신의 해석이 상당한 거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먼저 질문자로 나선 의원은 한나라당 남경필 의원. 남의원은 “책임총리의 정의가 뭐냐”고 물었다. 고총리는 “현행 헌법 하에서 책임총리제라는 용어가 합당한지 조금 의문이 간다”고 전제한 뒤 “소위 요즘 얘기하는 분권형 총리제 하에서 책임총리가 아니고 현 시점에서의 책임총리라고 한다면 현행 헌법상 국무총리의 권한으로 규정된 권한을 실질적으로 행사하고 이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을 뜻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고 답했다.



    이어서 등단한 한나라당 이병석 의원도 고총리와 책임총리 논쟁을 벌였다.

    이의원은 “노대통령은 총리를 중심으로 한 내각에 책임과 권한을 대폭 이양하고 자율적인 내각운영을 보장할 방침이라고 밝힌 바 있고 고총리도 취임사에서 ‘내각을 통할하고 책임총리로서 역할을 다하겠다’고 했는데 총리와 책임총리의 차이는 무엇이냐”고 물었다. 이에 고총리는 “현행 헌법 하에서는 책임총리나 총리나 같다고 생각한다”고 대답해 실제 총리로 취임해보니 과거와 그다지 차이를 못 느끼고 있음을 우회적으로 드러냈다.

    고총리는 KBS 사장 문제, 검찰인사 문제 등 현안에 대해 대통령이 총리와 장관을 제치고 직접 당사자들을 만나 해결을 모색하는 것이 총리나 장관의 역할을 침해하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 “당면 현안에 대해 사회적인 갈등이 커졌을 때 대통령 스스로 갈등의 현장에 뛰어들어 이해 당사자들과 대화하고 해결점을 모색하는 것이 총리와 장관의 역할을 가볍게 생각하기 때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앞으로 총리의 역할에 대해 주어진 권한을 소신 있게 행사하고 그에 따른 책임 또한 회피하지 않겠다”고 결의를 밝히기도 했다.

    이날의 논쟁에서 고총리는 자신은 정치권 일반의 해석과 달리 책임총리가 아니며 책임총리다운 역할을 부여받지 못했음을 사실상 시인했다. 하지만 고총리가 처음부터 소극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2월 말 취임 기자회견에서 고총리는 “실질적인 (대통령과의) 인사협의를 통한 각료제청권 행사 등 헌법에 규정된 총리의 권한에 충실할 것이다. 이번 조각과정에서 두 차례 이상 인사협의를 진행했다”며 책임총리로서 국정운영에 강한 의욕을 보였다.

    하지만 자신감에 넘친 고총리의 모습은 이날이 마지막이었다. 이후 추가 입각자 선정 과정에서 대통령은 고총리와 인사협의를 하지 않았다. 총리실의 국무조정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국무조정실 차장(차관급)제 신설 과정에서 고총리는 2명의 차장을 제안했으나 행정자치부와의 의견 조율 과정에서 1명으로 축소됐고 그나마 언제 시행될지 불투명한 상황이다.

    부처장관과 주요 정책에서 의견을 달리하는 모습도 간간이 보였다. 지난달 고총리가 “경제상황을 감안해 재벌의 부당 내부거래 조사를 미루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자 바로 다음날 강철규 공정거래위원장이 “개혁에는 속도조절이 없다”고 공언하는 바람에 고총리의 심기가 한동안 불편했다고 한다.

    고건 총리 안 나서나 못 나서나

    고건 총리는 취임 직후 대구를 방문해 지하철 참사 대책을 진두진휘했다. 2월27일 합동분향소를 찾아 유족 대표와 면담중인 고총리(오른쪽).

    고건 총리와 현 정권 실세들과의 갈등은 차라리 세계관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근본적이고 그 뿌리가 깊다. 고총리가 제주 4·3사건과 관련한 정부 차원의 사과 유보 결정을 내린 데 대해 민주당 추미애 의원이 인터넷에서 공개적으로 이를 문제 삼고 나서 한동안 추의원과 총리실은 온라인상에서 설전을 벌이기도 했다.

    고총리의 언론관은 노무현 정권 언론 주무부처 장관들과도 달라 보인다. 3월 말 조영동 국정홍보처장으로부터 기자실 운영개선 방안을 보고받는 자리에서 고총리는 기자를 만난 공무원에게 보고서를 작성케 하거나 기사에 취재원의 실명을 밝힐 것을 강제하는 등 새 정부의 강경한 언론대책에 대해 부정적 견해를 밝히기도 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고총리는 “일과 시간중에 기자들의 방문취재 불허가 국민의 알 권리를 침해한다는 여론이 높다. 행정정보 공개, 정책 결정 과정 공개 등 보완장치를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얼마 뒤 고총리는 시위하듯 자신의 기자관, 언론관을 공개했다. 3월25일 고총리는 출입기자들에게 술을 샀다. 총리실 출입기자들을 정부청사 근처 생맥줏집으로 초대한 고총리는 기자들의 술잔에 일일이 맥주를 부으며 “기자들을 ‘총리실 고문’으로 모시겠다”고 말했다. 2차를 위해 청진동 해장국 골목으로 자리를 옮기기 전 고총리는 폭탄주도 만들어 돌렸다고 한다. 고총리는 한 달에 한 번 이런 모임을 갖고 기자들과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누겠다고도 약속했다.

    다음날 고총리는 총리공관으로 일간지 정치부장들을 초청해 점심식사를 함께했다. 초청 이유는 총리인준 과정에서 도와준 데 대한 인사였으나 이틀에 걸친 언론과의 접촉은 취임 이후 줄곧 언론과 긴장관계를 유지해온 청와대의 기류와 반대되는 것이어서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국정 안정되면 총리 역할 드러날 수 있나

    이처럼 총리 자신은 언론과의 관계개선을 위한 나름의 노력을 기울였지만 일선 부처는 그 반대 방향으로 달려나갔다. 4월11일 국정홍보처는 고총리에게 제대로 보고도 하지 않은 채 정부중앙청사 별관에 통합브리핑룸을 설치한다는 계획을 공개했다.

    마침내 고총리가 발끈하고 나섰다. 그 대상은 조영동 국정홍보처장이었다. 고총리는 다음날 국정홍보처의 계획을 재검토하라고 지시했다. 고총리의 지시는 그 어느 때보다 단호했다. 그래서인지 국정홍보처와의 브리핑룸 설치에 관한 갈등을 겪으면서 고총리의 태도에도 변화가 보이고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고총리가 보이지 않는다’는 지적에 최근 들어 총리실도 과거와 달리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나섰다. ‘고건 총리 국정수행 1개월’이라는 비배포 문건도 만들어 고총리의 활약상을 적극 홍보하고 있다. 김덕봉 총리공보수석비서관은 “고총리의 언론관은 한마디로 오픈 마인드다. 판단은 기자들에게 맡기되 팩트(사실관계)는 분명히 해주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고총리의 행적에 관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팩트를 홍보하고 나섰다.

    총리실은 제주도 4·3사건에 대한 정부 입장 발표 유보 결정을 고총리의 판단력이 돋보인 사례라고 홍보하고 있다. 취임 직후 대구 현지에 내려가 지하철 사고를 수습한 것도 고총리의 조정능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주장한다.

    총리실의 주장에 대해 청와대에서 수긍하는 이도 적지 않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4·3사건 문제는 노대통령도 사실상 고총리의 결정을 수긍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나. 고총리의 평가 유보 결정이 결과적으로 대통령의 부담을 덜어줬던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런 긍정적 평가보다는 부정적, 유보적 평가가 아직은 주류다.

    지난달 말 노대통령은 국무회의를 법정회의와 테마회의로 나누는 국정회의 기획안을 확정했다. 이에 따르면 종전처럼 화요일에 열리는 국무회의는 고총리가 주재하는 한 시간 반짜리 법정회의와 노대통령이 주재하는 한 시간짜리 테마회의, 즉 구체적 쟁점 사안에 대한 회의로 나뉘게 된다. 테마회의는 노대통령이 즐기는 난상토론 방식으로 진행된다.

    그런데 테마회의의 등장이 가뜩이나 위축된 고총리를 더욱 위축시킬 가능성이 없지 않다는 지적도 나온다. 국민적 관심이 높은 쟁점을 대통령이 주무장관을 상대로 직접 챙김으로써 그렇지 않아도 ‘안 보이는’ 고총리를 국무회의 관련 뉴스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원래 국무회의는 대통령이 개회선언만 하고 총리가 진행을 맡아왔는데 대통령이 절반의 진행을 맡음으로써 총리의 조정 역할이 줄어들 가능성이 높다는 것.

    언론관을 놓고 일선 부처와 갈등을 빚었지만 이런 이견 충돌은 앞으로도 얼마든지 재발할 가능성이 높다. 고건 ‘책임총리’의 앞날이 평탄하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얘기다.

    총리실은 4월 말을 기한으로 고총리가 중점적으로 챙길 20대 국정과제를 선정, 청와대와 의견을 조율할 계획이다. 김덕봉 수석비서관은 “지난 3월 말 국무회의에서 대통령은 경인운하 건설, 경부고속철도 금정산 구간 및 서울외곽순환도로 사패산 터널 구간의 갈등을 총리실에서 주관해 풀어나갈 것을 지시했다”며 “이처럼 책임과 권한의 위임이 일반화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총리실의 위상도 높아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는 또 “정권 초기에는 어쩔 수 없이 대통령이 뉴스의 중심이 될 수밖에 없다. 여기에 총리마저 튄다면 오히려 국정이 혼란스럽다는 느낌을 줄 뿐”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자제하고 있으며 때가 되면 보다 분명하게 총리의 역할이 드러날 것”이라고 말한다.

    과연 그의 생각대로 될까. 지금 안 되는 일이 시간이 지난다고 될까. 국정이 안정되면 오히려 총리의 역할도 줄어드는 것은 아닐까. 책임총리의 길은 멀고도 험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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