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하게 복귀한 NC 손민한 선수(왼쪽)와 LG에서 NC로 이적해 재기를 꿈꾸는 박명환 선수.
그런데 모두가 ‘이제 끝났다’고 고개를 돌렸을 때, 그들은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섰다. 마운드에 대한 열정, 현역 유니폼에 대한 갈증이 그들을 다시 마운드로 불러 세웠다.
박명환(37·NC), 신윤호(39·SK), 김수경(35·고양 원더스) 등 한때 마운드를 호령했던 ‘올드보이’가 돌아왔다. 지난해 10월 이후 차례로 현역에 복귀한 이들은 새해 어떤 감동을 선사할까. 이들의 활약은 2014년 한국 야구를 지켜보는 또 다른 재미가 되기에 충분하다.
‘올드보이’ 복귀 러시 기폭제 손민한
롯데 시절이던 2005년부터 2008년까지 4년 연속 두 자릿수 승수를 올렸던 ‘전국구 에이스’ 손민한(39)은 2009년 어깨 수술을 받고 내리막길을 걷다 2011년 롯데에서 방출됐다. 이후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 회장 재임 때 비리에 연루됐다는 의혹이 불거지면서 복귀까지 적잖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2013년 4월 가까스로 9구단 NC 유니폼을 입고 3년 만에 복귀했을 당시 그의 활약에 물음표를 단 전문가가 적지 않았다. 무엇보다 긴 실전 공백은 치명적인 약점이 되리라는 전망이 많았다.
그러나 손민한은 6월 한 달 동안 4경기에 선발 등판해 3승 무패, 방어율 0.77을 기록했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올드보이의 화려한 귀환이었다. 이후 불펜으로 자리를 옮긴 그는 2013시즌 5승 6패 9세이브, 3홀드, 방어율 3.43의 알토란 같은 활약을 펼쳤다. 그 결과 올해 지난해보다 5000만 원 오른 연봉 1억 원에 재계약할 수 있었다. 2년 넘게 휴식을 취하면서 오히려 구속이 빨라졌다는 평가와 함께 과거 트레이드마크나 다름없던 칼날 제구력으로 많게는 20세 가까이 차이 나는 타자와의 승부에서 결코 밀리지 않았다.
손민한의 성공은 재기를 꿈꾸던 또 다른 올드보이들에겐 축복이나 마찬가지였다. 2012시즌 후 현역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 LG가 제안한 ‘코치 연수’를 뿌리친 박명환은 1년 가까이 소속팀 없이 개인 훈련으로 꾸준히 몸을 관리하다 공개 테스트를 통해 NC 유니폼을 입었다. 지난해 9월 공개 테스트 자리를 직접 마련해 각 구단 스카우터 앞에서 자신을 세일즈했고, 결국 NC의 선택을 받았다. NC가 박명환을 받아들인 데는 손민한의 성공이 결정적 계기가 됐음은 물론이다.
1996년 두산 전신인 OB에 입단해 시속 153km의 강속구를 앞세워 정통파 에이스로 활약했던 박명환은 통산 102승을 거둔 ‘100승 투수’다. 한때 배영수(삼성), 손민한과 ‘투수 삼국지’를 연출하기도 했던, 경험과 관록을 지닌 선수다. 2006시즌 후 자유계약선수(FA) 신분으로 LG로 이적, 첫해인 2007년 10승을 올렸을 뿐 이듬해부터 내리막길을 걸어 2012시즌 후 결국 방출됐지만, 주위 만류에도 그는 현역에 대한 꿈을 접지 않았다. 야구에 대한 열정은 그에게 140km가 넘는 빠른 공을 되돌려줬다.
올 시즌 계약금 없이 연봉 5000만 원을 받는 박명환은 지난겨울 아내와 딸이 머무는 서울 집을 떠나 경남 창원의 NC 홈구장 근처에 원룸을 얻어 운동장으로 출퇴근하는 등 재기하려고 구슬땀을 흘렸다. 1월 15일 출발한 미국 애리조나 전지훈련 명단에도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선수 생활을 이대로 끝낼 수 없었다”는 박명환은 조카뻘인 후배들과 선의의 경쟁을 펼쳐 반드시 1군 마운드에 다시 서겠다는 굳은 결의를 보인다. NC는 그가 손민한 이상의 활약을 펼쳐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SK 신윤호 선수(위)와 넥센 시절 김수경 선수.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까지 찬란한 ‘현대 왕조’를 이끌었던 김수경은 프로선수 생활 15년 동안 112승을 올리며 현대의 4차례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다. 15년간 프로선수 생활 중 두 자릿수 승수를 올린 시즌이 7시즌에 달한다. 데뷔 첫해인 98년 12승을 거두며 신인왕을 차지한 김수경은 2000년에는 정민태, 임선동과 함께 18승을 올려 공동 다승왕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젊은 시절 과도한 투구는 조기 은퇴로 이어졌다. 무릎과 허리에 칼을 댄 김수경은 2000년대 중반 이후 내리막길을 걸었고, 2012시즌을 끝으로 현역 생활을 접었다.
은퇴 후 넥센에서 불펜코치를 맡았지만 그라운드에 대한 미련이 그를 다시 마운드로 돌아오게 만들었다. 현역 복귀를 결심한 그는 “우리 팀에서 선수 생활을 하라”는 넥센 측 제안을 뿌리치고 “초심으로 돌아가 새로운 환경에서 새롭게 시작하겠다”며 김성근 감독이 사령탑을 맡은 ‘독립구단’ 고양 원더스에 입단한 뒤 프로에 재진입하려고 구슬땀을 흘린다.
새로운 삶의 의욕 제공
손민한을 비롯해 박명환, 신윤호, 김수경 등 돌아온 올드보이는 모두 투수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은퇴한 타자의 현역 복귀 사례를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점과 대비된다. 올드보이가 길게는 5년 넘는 세월을 딛고 다시 현역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데는 투수라는 포지션 특성이 반영된 결과라 볼 수 있다.
투수는 타자와 승부에서 주도권을 갖는다. 150km가 넘는 빠른 공이 없더라도 타자를 상대할 수 있는 요령과 제구력만 갖췄다면 다시 마운드에 설 수 있다. 타자는 순발력이 떨어지면 끝이다. 40세가 가까워오면 배트 스피드가 눈에 띄게 떨어지고 한 번 현역을 떠나면 다시 복귀하기 힘들지만, 투수 경우는 다르다. 은퇴 후 휴식이 오히려 손상된 팔꿈치나 어깨 회복으로 연결되는 경우도 있다. 체계적인 재활 프로그램으로 옛 구위를 회복한 손민한이나 박명환이 좋은 예다.
올드보이의 귀환은 팬에게 또 다른 즐거움을 선사한다. 삶의 무게에 지친 사회인들, 특히 40세 안팎 동년배에게는 새로운 삶의 의욕을 제공하기도 한다. 박명환이 NC 유니폼을 입고 다시 1군 무대에 서는 날, 한국 야구는 또 다른 의미 있는 하루를 보낼 수 있다. 신윤호와 김수경도 도전 자체가 아름다운 선수들이다. 이들의 모습을 마운드에서 다시 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감동이 될 것이다. 돌아온 올드보이들이 반가운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