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는 1월 초 열린 국제전자제품박람회(CES)에서 또 다른 이변을 연출했다. TV 가전업체들은 저마다 TV 사이즈, 곡면 여부 등을 자랑했지만 미디어업계는 가전업체와 넷플릭스 제휴에 주목했다. 하드웨어 제품 중심의 가전쇼에서 ‘이번 승자는 넷플릭스’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넷플릭스가 삼성전자, LG전자, 소니, 비지오 등 TV 제조업체를 통해 4K 초고화질(UHD) 콘텐츠를 스트리밍 서비스로 제공하기 때문이다. 향후 방송 콘텐츠 흐름을 지상파, 케이블방송이 아닌 OTT 서비스가 주도할 것을 짐작게 하는 대목이었다.
넷플릭스는 인터넷망을 통해 콘텐츠를 전송하는 서비스다. 쉽게 말해 케이블방송이나 위성방송처럼 별도의 셋톱박스 없이도 인터넷을 통해 콘텐츠를 소비할 수 있다. 유튜브(Youtube), 훌루(Hulu) 같은 서비스로, 국내로 보면 곰TV나 다음TV 플러스와 비슷한 서비스로 보면 된다.
인터넷망으로 콘텐츠 전송
넷플릭스는 1997년 창업 당시 DVD나 VCR를 빌려주는 대여점이었다. 연체료를 물지 않고 우편메일을 통해 빌려볼 수 있는 시스템으로, 당시 비디오업계 거함인 블록버스터를 무너뜨릴 정도로 크게 성장했다.
넷플릭스는 여기에 안주하지 않았다. 2011년 회사를 2개로 분할해 DVD 렌털은 퀵스터로 바꾸고 넷플릭스로는 스트리밍 서비스를 준비했다. 향후 시청 흐름이 인터넷 스트리밍 서비스가 되리라고 예견했기 때문이다. 물론 모험에 가까웠다. 케이블이나 위성 등 유료방송을 시청하는 사람이 여전히 많은 상황에서 인터넷을 통한 방송서비스가 자리 잡는 건 만만치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폰 출시 후 스마트폰이 일상으로 자리 잡으면서 대중의 방송 시청 패턴이 변해갔다. ‘집 안에 있는 TV’보다 ‘언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콘텐츠가 주목받기 시작했다. 특히 실시간 방송을 보는 ‘본방사수’보다 주말이나 여유시간 때 주문형 비디오(VOD) 등을 통해 콘텐츠를 소비하는 문화가 점차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넷플릭스는 실시간 방송 중계 없이 VOD 서비스만 제공하기로 결정했다. 여기에 △맞춤형 콘텐츠 추천 △가격 혁명△특화 콘텐츠 제공이라는 전략을 택했다.
넷플릭스는 DVD 렌털 시절부터 가입자 데이터를 모아 시네매치(CineMatch)라는 알고리즘을 개발했는데, 신규 서비스에 이를 이용했다. 시청자는 넷플릭스에 저장된 영화 수만 편을 알파벳 순서대로 검색할 필요가 없다. 넷플릭스가 독자적인 추천 엔진으로 영화나 TV 프로그램을 더 쉽게 검색하게 도와주기 때문이다. 시청자 개개인의 시청 이력을 추적해 비슷한 취향의 콘텐츠를 추천하는 것. 그야말로 빅데이터 서비스를 제공한 것이다. 미디어 홍수 시대에 원하는 콘텐츠를 빨리 찾길 원하는 소비자 니즈를 제대로 읽은 셈이다.
LG전자는 1월 6일(현지시간) 미국 라스베이거스 만달레이베이 호텔에서 ‘LG전자 프레스 콘퍼런스’를 열고 전략제품과 혁신기술을 소개했다. 당시 안승권 사장이 발표할 때 넷플릭스의 리드 헤이스팅스 최고경영자가 깜짝 등장해 악수를 하고 있다.
마지막 카드는 특화 콘텐츠 제공이다. 유료방송 콘텐츠를 단순히 배급만 하던 넷플릭스는 지난해 2월 최초로 드라마 ‘하우스 오브 카드’를 자체 제작했다. 이 드라마 제작에만 1억 달러(약 1008억 원)를 투자했다. 영화 ‘아메리칸 뷰티’ ‘유주얼 서스펙트’를 통해 국내에도 팬이 많은 배우 케빈 스페이시가 주연하고 ‘소셜네트워크’ ‘에일리언3’ 등을 연출한 데이비드 핀처가 감독한 블록버스터급 드라마였다.
국내 진출할지는 미지수
더 주목할 점은 이 드라마를 일주일마다 1편씩 공개하지 않고 첫 시즌 13편을 한꺼번에 공개했다는 점이다. 지상파나 케이블방송에서 드라마를 먼저 공개하고, OTT 서비스에 순차적으로 배포하는 일반 공식을 과감히 깨버린 것이다. 특히 드라마를 1편씩 야금야금 내놔 시청자를 안달 나게 하기보다 전편을 공개함으로써 최근 방송 소비 추세에 발을 맞췄다. 주말에 ‘몰아 보기’ 시청을 배려한 것이다.
넷플릭스의 이 실험은 연착륙에 성공했다. 자체 드라마를 자사 플랫폼에서만 독점 상영한다는 원칙에 충실했고, ‘하우스 오브 카드’를 보려고 시청자가 몰리는 효과도 거뒀다. 그간 올드미디어는 공급자 마인드로 콘텐츠를 제공했지만, 넷플릭스는 콘텐츠 선택권을 시청자에게 돌려줬다.
넷플릭스 성장은 폭발적이다. 현재 넷플릭스는 세계 40개국에서 가입자 3300만 명을 확보했다. 지난해 3분기에는 미국 2위 케이블방송 HBO의 가입자 수를 넘어섰다. 미국 저녁 시간 인터넷 사용량의 30%를 잡아먹는다는 통계가 나올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 중이다. 독일, 프랑스 등 유럽 방송시장 진출도 초읽기에 돌입했다.
넷플릭스가 국내에 직접 진출할지는 미지수다. ‘미드’(미국 TV 드라마)가 우리나라에서 인기를 끌긴 하지만 국내 유료방송 요금이 1만~2만 원대로 워낙 저렴해 넷플릭스 파급력이 얼마나 먹힐지 의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하지만 모바일 디바이스 확산, 시청 방식 변화, 올드미디어 추락이라는 공통된 상황에서 넷플릭스를 비롯한 OTT 서비스 확대는 향후 유료방송시장 판도를 뒤흔들 것으로 점쳐진다. 국내 유료방송사업자들이 OTT 서비스를 차츰 준비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결국 ‘시청자가 원하는 것을 줘야 한다’는 공식에 충실한 플랫폼이 살아남게 될 것이다. 이종영 미디어미래연구소 팀장은 “미국과 달리 한국 시장은 유료방송 서비스가 상대적으로 저렴하기 때문에 OTT 서비스를 위해 기존 유료방송을 ‘코드커팅’할 개연성은 높지 않다”면서 “다만 소비자 취향에 맞춰 끊임없이 혁신하는 플랫폼을 소비자가 차츰 선택하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