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서울 명동에서 열린 노인학대 예방 캠페인에서 참가자들이 ‘어르신이 행복한 세상’이라고 쓴 현수막을 펴 보이고 있다.
#2 70대 중반 정모 씨 부부는 매달 나오는 기초노령연금 18만 원으로 생계를 꾸리기 어려워 최근 둘째아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거절당했다. 둘째아들은 “사업하는 형한테 전 재산을 줘놓고 이제 와서 왜 나한테 손을 벌리느냐”며 화를 냈다. 사업에 실패해 형편이 어려운 큰아들한테도 기댈 처지가 못 돼 이들 부부는 허리병과 관절염으로 불편한 몸을 이끌고도 폐지를 주우며 근근이 생계를 꾸리고 있다.
정서적 및 경제적 학대
자녀에게 학대당한 노인들의 피해 모습.
노인학대는 정서적 학대와 경제적 학대로 나뉜다. 정서적 학대는 비난과 모욕으로 정서적 고통을 유발하는 행위뿐 아니라, 이씨나 정씨 사례처럼 자식들이 부모를 소외시키거나 연락과 만남을 회피해 고통을 주는 행위도 포함한다. 경제적 학대는 부모로부터 재산을 빼앗는 착취, 경제적 권리와 관련한 의사결정을 통제하는 행위 등을 말한다.
보건복지부의 노인학대 현황 분석에 따르면, 전국 24개 노인보호전문기관(중앙노인보호전문기관 제외)에서 현장조사를 통해 파악한 2012년 노인학대 사례는 3424건이다. 2007년 2313건에서 5년 사이 48% 증가했다. 노인학대가 이렇게 갑자기 크게 늘어난 것은 2004년 노인복지법 개정에 따라 정부가 전국적으로 노인보호전문기관을 만들고 학대 예방과 문제 해결에 적극 나서면서 노인학대에 대한 인식이 제고된 이유 때문이기도 하다. 또 학대 피해 노인도 자신이 학대당하고 있음을 인식하고 노인보호전문기관이나 경찰에 신고하는 등 적극적으로 도움을 요청하는 사례가 과거보다 늘었다. 그 가운데 정서적 학대가 38.3%로 가장 많았고 신체적 학대는 23.8%, 방임 18.7%, 경제적 학대 9.7%, 자기방임 7.1%, 유기 1.3%, 성적 학대 1.1%였다.
서울시 통계에 따르면 노인복지시설과 상담센터에 접수된 노인학대 관련 상담 건수는 2007년 2197건에서 2012년 7840건으로 5년 사이 약 3.6배 증가했다. 같은 기간 노인학대 신고 건수도 375건에서 911건으로 크게 늘었다.
이현주 서울남부노인보호전문기관 과장에 따르면, 지난해 이 기관에 신고된 노인학대 사례는 총 501건, 접수는 220건이다. 이 과장은 “신고를 받고 노인학대 사실이 의심돼 현장에 나가면 피해자가 기관 개입을 꺼려 학대 사실을 감추거나 학대 행위자인 배우자 또는 자녀의 정보를 주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런 것은 학대 사례로 집계하지 않기 때문에 신고 건수와 학대 사례 건수 사이에 차이가 많이 난다. 신고조차 안 하는 경우까지 포함하면 감춰진 학대 사례는 통계 수치보다 월등히 많다고 봐야 한다”고 했다.
쉬쉬 감추며 혼자 ‘가슴앓이’
학대 사실을 감추려 하는 상황을 설명하는 사례다. 생활보호대상자로 정부에서 매달 20여만 원을 받는 70대 후반 박모 씨는 일용직을 전전하며 도박과 술에 빠진 50대 초반 아들로부터 수년간 지속적으로 학대당했다. 아들은 평소 집 밖으로 떠돌다 정부지원금이 통장에 들어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찾아와 돈을 빼앗고 박씨를 폭행했다. 어느 날 이웃 주민 신고로 사회복지사가 박씨 집을 찾았다. 마침 돈이 입금되는 날이었지만 여느 때와 달리 아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박씨가 아들 행패가 외부로 노출될까 우려해 전화로 미리 상황을 알린 것이다. 자식의 패륜을 감추려 한 박씨는 노인보호전문기관의 도움을 마다한 채 여전히 학대에 시달리고 있다.
노인에 대한 경제적 학대 사례도 흔히 볼 수 있다. 인천시노인보호전문기관에서 운영하는 쉼터(학대피해노인 일시보호소)에서 만난 80대 초반 기모 씨는 “마누라와 40세 먹은 딸이 돈을 못 번다는 이유로 나를 집에서 내쫓고 내 앞으로 된 집 명의도 딸 앞으로 옮겼다. 빈손으로 쫓겨나 서울역에서 몇 달간 노숙생활을 하다 이곳으로 왔다”며 억울해했다. 공장 기술자로 일하다 재작년 교통사고로 오른쪽 다리를 크게 다쳐 병원에 입원하는 바람에 실직한 기씨는 퇴원 뒤 곧바로 쫓겨났다. 그는 “통장에 든 돈도, 교통사고 보상금도 마누라가 딸과 작당해 다 가로챘다. 집에서 쫓겨나던 날 마지막으로 받은 밥상을 딸이 엎는 바람에 밥도 못 먹고 나왔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기씨는 “직장에 다니는 막내아들도 한 집에 살았지만 나를 외면했다”며 한숨을 쉬었다.
이현주 과장은 “남부노인보호전문기관이 강남권을 담당하다 보니 다른 지역에 비해 재산을 둘러싼 갈등을 이유로 부모를 방임하거나 소홀히 하는 사례가 많은 것으로 파악됐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부모가 재산이 많은 경우 한 자식이 부모 재산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다른 형제를 부모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막거나 서로 못 만나게 훼방을 놓는 사례가 자주 발생한다. 경제력이 있는 자녀가 부모 생활비를 대는 일을 아까워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학대 피해 노인들이 모여 살고 있는 인천시노인보호전문기관.
이 과장은 “사회적으로 번듯한 직업을 가진 자식을 둔 부모일수록 ‘내 자식 이름에 누가 되고 자식이 손가락질받을까 봐 신고하기 싫다’며 혼자 가슴앓이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부모는 주변 사람에게도 고민을 털어놓지 않기 때문에 피해 사실이 드러나기 더 어렵다”고 했다. “자식을 생각하는 부모 스스로의 은폐성이 매우 강하게 나타나는 게 노인학대의 특성이자 심각성”이라고 전문가는 지적한다.
노인학대는 의외로 학력 수준이 높고 소득이 상대적으로 많은 가정에서 더 많이 벌어진다. 보건복지부 현황에 따르면 40~50대 연령층이 전체 학대 행위자의 절반을 넘었고, 고졸 이상 학력을 가진 경우가 58.6%에 달했다. 이들의 생활수준은 ‘일반’인 경우가 52.1%로 ‘저소득층’(16.9%)보다 많았다.
조손가정이 늘면서 손주에 의한 노인학대도 증가하고 있다. 자식의 이혼으로 어린 손자를 맡아 키우게 된 70대 초반 이모 씨는 손자가 중고교에 진학하면서 비행을 일삼자 잔소리를 했다. 손자는 날이 갈수록 더 거칠게 반항했고 급기야 주먹으로 때리거나 발로 차며 이씨를 향해 분노를 쏟아냈다.
2010년 9월 경기서부노인보호전문기관 개관 때부터 노인학대 사례판정위원으로 참여하는 이호선 서울벤처대학원대 사회복지상담학과 교수(한국노인상담센터장)는 “학대 현장(가정)에는 연민이 없다. 이게 제일 무섭고 아프다”고 했다. 이 교수에 따르면 노인학대를 바라보는 우리 사회 시각은 학대 행위자에 더 공감하고 동정적이다. “오죽하면 그랬겠나” “나라도 그랬을 거야” 하는 시각이 팽배하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신고해야 할 사람이 안 하는 경우가 많다. 자식 중 한 명이 학대행위를 하는 걸 알면서도 신고하면 자신이 책임져야 하니까 나머지 자식이 외면하고 모른 척한다. 가족 간 불편을 서로 감수하려 하지 않고 나눠 지려고 하지도 않는다”고 안타까워했다.
인천 쉼터에서 4개월째 지내는 80대 초반 서모 씨는 “살 만큼 살았으니 이제 그만 세상을 뜨고 싶다. 내 목숨을 내 마음대로 못하니 답답할 뿐”이라며 눈물을 글썽였다. 아내와 이혼하고 1년 전 서씨 집으로 들어온 막내아들은 도박과 술에 빠져 하루가 멀다 하고 서씨를 괴롭혔다. 견디다 못한 서씨가 알코올중독으로 아들을 병원에 강제입원까지 시켰지만 그때뿐이었다. 서씨는 “여기서 나가면 갈 곳이 없다. 무서워 더는 막내아들과 함께 살고 싶지 않다. 형편이 어려운 큰아들 집으로 갈 수도 없다. 그만 죽고 싶다”고 울먹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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