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무대와 실업축구 내셔널리그를 평정한 김영후는 2009년 마침내 K리그 신인왕으로 우뚝 섰다.
“나는 언제쯤 저런 큰 무대에서 뛸 수 있을까?”
최순호 감독과 운명적 만남
그로부터 2년이 지난 2009년 9월6일. 그 남자는 또 거기에 있었다. 무대는 달랐다. 관중석 한구석이 아니라 그라운드 한복판이었다. 2년 전엔 경기를 보며 환호했지만 지금은 환호의 주인공이 됐다. 강원 FC의 최전방 공격수로 나선 그는 이날 2골 1도움을 기록하며 경기 최우수선수(MVP)로 뽑혔다. 경기 후 소감을 묻자 그는 감격에 찬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꿈에서만 일어나던 일이 현실이 됐습니다. 앞으로도 ‘꿈꾸는 남자’가 되겠습니다.”
‘괴물 신인’ 김영후(26) 얘기다. 대학 무대와 실업축구 내셔널리그에서 ‘득점 제조기’로 이름을 날린 그는 K리그 데뷔 시즌인 올해 돌풍을 일으켰다. 27경기에서 13골 8도움. 이동국(전북 현대), 데얀(FC 서울)에 이어 K리그 전체 득점 랭킹 3위, 공격 포인트는 1위다. 그의 활약에 힘입어 신생팀 강원은 시즌 내내 공격적인 축구로 선전하면서 인기 구단 반열에 올랐다.
“신인왕 수상자는 김~ 영~ 후~.”
12월22일 서울 그랜드힐튼호텔. 신인왕 발표를 듣는 순간 그동안의 고생이 파노라마처럼 그의 머릿속을 스쳤다. 누구보다 많은 꽃다발을 안은 K리그 신인왕 김영후는 벅찬 감격에 한동안 말을 꺼내지 못했다. 잠시 뒤 떨리는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마음속에 꿈이 없으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최순호 감독님을 만난 건 제 인생 최고의 행운입니다.”
최 감독은 시상식장에서 이 광경을 지켜봤다. 그는 김영후의 수상이 확정된 순간 조용히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훔쳤다. 김영후의 마음고생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지켜봤기에 평소 무뚝뚝한 그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다.
김영후와 최 감독은 말 그대로 운명처럼 만났다. K리그 입성에 실패한 김영후는 2006년 현대미포조선을 맡게 된 최 감독의 부름을 받았다. 최 감독은 김영후에게 자신감을 심어줬다. 아들처럼 아끼며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때까지 좌절감에 몸부림치던 김영후는 최 감독의 지도를 받으며 서서히 ‘괴물’ 본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내셔널리그 데뷔 시즌인 2006년 20경기 19골을 넣으며 득점왕에 올랐고, 2007년엔 MVP를 차지했다. 2008년에도 한 경기 7골을 넣는 등 폭발적인 득점력으로 상을 휩쓸었다.
김영후(오른쪽)는 최순호 감독을 만나 유망주에서 ‘괴물신인’으로 거듭났다.
2009년 김영후는 마침내 꿈에도 그리던 K리그에 입성하게 된다. 최 감독이 신생팀 강원의 지휘봉을 잡으면서 그를 불렀다. 출발이 순조롭진 않았다. 낯선 환경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3월 제주와의 첫 홈경기 땐 꽉 찬 관중석을 보고 긴장이 돼 화장실만 6번 다녀왔다. 뭔가 빨리 보여줘야 한다는 부담감에 몸도 도통 말을 안 들었다.
개막 후 10경기에서 단 2골. 그는 죄송한 마음에 감독과 눈도 마주치지 못했지만 정작 최 감독은 그를 감쌌다. “내셔널리그 출신의 한계”라는 말이 나올 때도 최 감독은 “골운이 따르지 않았을 뿐 경기력은 나무랄 데 없다”며 그를 옹호했다. 감독의 믿음 덕분일까. 김영후는 점차 진가를 발휘했다. 이후 5경기 연속 골을 몰아치는 등 공격 본능을 발휘하며 17경기 11골(4도움)을 터뜨렸다.
지금은 활짝 웃고 있지만 ‘축구선수 김영후’는 3번 울었다. 첫 번째는 축구를 처음 시작했을 때. 초등학교 동아리에서 축구를 하던 그는 친구의 권유로 정식 선수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부모의 반대가 심했다. 외아들이 ‘고생길’로 들어서는 걸 지켜볼 수 없다는 게 이유. 어렸을 적 ‘순둥이’로 불리던 김영후는 이때 처음으로 부모님에게 대들었다. 울며불며 부모를 설득했다. 공부도 안 하고 운동장에서 공만 찼다. 이에 부모는 외출 금지령으로 맞설 만큼 완강했지만 그의 고집을 꺾을 순 없었다. 결국 허락하지 않으면 죽음도 불사하겠다며 2층에서 뛰어내릴 정도로 필사적이던 아들의 손을 들어줬다.
두 번째는 대학교 신입생 시절이다. 입학 전까지 ‘즐기는’ 축구를 하던 그에게 축구가 ‘고문’이 됐다. 너무 다른 환경, 꽉 짜인 일정에 숨이 막히고 힘들었다. 합숙소를 이탈하며 방황하던 그는 운동을 접을 생각까지 했다. 이번엔 부모가 말렸다. 아들의 축구 사랑을 아는 부모는 일단 도전해보라고 설득했다. 최선을 다한 후 안 되면 미련 없이 그만두라는 얘기였다. 김영후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이를 악물고 훈련에 매진했다. 노력은 열매를 맺었다. 숭실대 졸업반 시절엔 득점포를 가동하며 대학부 MVP가 됐다.
그러나 김영후는 또 한 번 좌절을 맛봐야 했다. 대학 졸업 후 자신 있게 프로 무대에 도전장을 내밀었지만 어느 구단도 그를 지명하지 않았다. 친한 동기들이 모두 프로 팀에 입단했기에 실망은 더 컸다. 언제나 그의 버팀목이 돼준 부모를 실망시켰다는 생각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사귄 지 5년째 접어든 여자친구와 헤어질 생각까지 했다.
이런 좌절이 있었기에 오늘날 신인왕 김영후가 태어났다. 평소 낯을 가리고 수줍음을 타는 성격이지만, 축구에서만큼은 누구에게도 지고 싶은 생각이 없다. 시즌 중반 체력 저하로 고생한 그는 겨울훈련을 충실히 해 약점을 보완할 생각이다. 또한 다음 시즌에는 2009 K리그 MVP 이동국을 넘어 득점왕에 오르는 것이 목표다.
그가 꾸는 꿈의 종착역은 태극 마크다. 늘 ‘붉은 전사’가 돼 월드컵 무대에 서는 장면을 상상한다. 최 감독은 “타고난 성실함에 골 냄새를 맡는 능력은 김영후가 국내 최고”라며 “체력 등 부족한 부분만 보완하면 대표팀 스트라이커로 손색없다”고 말한다.
물론 쟁쟁한 골잡이가 즐비한 대표팀 경쟁을 뚫고 그 자리에 서는 게 쉽진 않다. 그래도 김영후는 웃는다. 여기까지 온 그는 더 이상 잃을 게 없다. 그의 극적인 인생은 최근 한 드라마(MBC ‘맨땅에 헤딩’)에서도 다뤄졌다. 드라마는 종영됐지만 그의 꿈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