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A 타이거즈 투수 문경찬이 3월 26일 광주 홈경기에서 9회 말 타석에 올라 한화 이글스 투수 정우람을 상대하고 있다. [동아DB]
한화가 13-7로 6점 앞선 9회 말 2아웃 상황에서 한용덕 한화 감독은 지난해 35세이브로 1위를 기록한 정우람(34)을 마운드에 올렸습니다. 그러자 김기태 KIA 감독은 원래 타석에 있던 황대인(23)을 빼고 투수 문경찬(27)을 대타로 내보냈습니다. 문경찬이 어깨에 방망이를 걸친 채 3구 삼진을 당하는 동안 김 감독은 연거푸 생수만 들이켰습니다.
경기 후 투수를 대타로 내보낸 이유에 대한 궁금증이 이어졌지만 김 감독은 입을 굳게 닫았습니다. 그 대신 선수들이 입을 열었습니다. 한 KIA 베테랑 선수는 “그라운드에서 지켜야 할 예의와 존중을 지키지 않은 데 대한 경고”라고 말했습니다. 요컨대 한화에서 ‘불문율’을 어겼다는 겁니다.
반면 한 감독은 “도발 의도는 없었다”고 해명했습니다. 그는 “정우람이 계속 등판하지 못해 컨디션을 점검할 필요가 있었다”며 “지금까지처럼 잘 지내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정우람이 실전 등판한 건 같은 달 19일 시범경기 이후 일주일 만에 처음이었습니다.
세이브가 뭐길래?
한화 이글스 마무리 투수 정우람. [동아DB]
그래서 정말 불문율이 문제인 걸까요? 이렇게 해석이 달라서 문제가 생겼으니까 차라리 ‘6점 이상 벌어졌을 때는 마무리 투수를 투입해 상대팀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다’고 명문화하면 되는 걸까요?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이번 사건은 불문율이 아니라 마무리 투수가 문제였습니다. 마무리 투수라는 포지션이 따로 없었다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 겁니다.
한화는 광주로 향하기 전 서울 잠실LG·두산홈야구장에서 두산 베어스와 개막 2연전을 치렀습니다. 이 두 경기에서 정우람은 왜 마운드에 오르지 못했을까요? 위기가 없어서?
한화는 개막전(3월 23일) 때 3-3 동점이던 8회 말 2사 이후 2점을 내주면서 결국 4-5로 패했습니다. 9회에 추가점을 뽑았으니 8회를 무실점으로 막았다면 승리할 수도 있었습니다. 한화는 이날 8회 송은범(35)-김범수(24)-이태양(29)을 잇달아 마운드에 올렸지만 끝내 실점을 막지 못했습니다.
이날 8회 2사 1, 2루에 두산 타석에 들어선 건 왼손 타자 호세 미구엘 페르난데스(31)였습니다. 이럴 때는 왼손 투수를 내보내는 게 일반적이고 정우람은 왼손 투수지만 한 감독은 그를 마운드에 올리지 않았습니다. 왜일까요? 간단합니다. 세이브 상황이 아니었으니까요!
그 탓에 한화는 팀에서 제일 좋은 불펜 투수, 그것도 왼손 투수를 써보지도 못하고 개막전을 내줬습니다. 만약 한화가 두산과 한국시리즈 7차전을 치렀대도 한 감독이 정우람을 올리지 않았을까요? 당연히 아닐 겁니다. 마무리 투수가 세이브를 올리는 것보다 팀 승리가 중요하니까요.
(여기서 잠깐 퀴즈. 한 감독이 지난해 역전 주자가 나가 있는 상황에서 정우람을 마운드에 올린 건 몇 번이었을까요? 정답은 마지막에 공개합니다.)
물론 시즌 마지막 경기와 개막전은 다릅니다. 시즌이 길게 남아 있으면 불펜 투수 등판 일정을 조정하는 것도 당연합니다. 그런데 그다음 날에는 선발로 나선 외국인 투수 채드 벨(30)이 너무 잘 던지는 바람에 11-1로 이겨 한 감독은 또 정우람을 쓰지 못했고, 광주에서 결국 사달이 났습니다.
감독이 미래를 알 수는 없지 않느냐고요? 네, 제 말이 그 말입니다. 나중에 세이브 기회가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데, 팀에 이미 위기가 찾아왔는데 팀에서 제일 좋은 불펜 투수를 끝까지 아끼는 게 팀에 무슨 도움이 될까요? 도대체 마무리 투수는 뭐고, 세이브는 뭔데요?
세이브를 잊어버리자!
최근 3년간 최고 세이브를 기록한 롯데 자이언츠 마무리 투수 손승락. [동아DB]
영어 낱말 그대로 풀이하면 세이브(save)는 ‘지켜낸다’라는 뜻. 이 경기에서 9회에만 위기가 있었고 그 선수만 위기에서 팀 승리를 지켜냈다고 확언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래도 이 선수만 세이브를 얻어갑니다.
이 사례는 너무 극단적이지만 마지막 1이닝을 책임지는 마무리 투수만 특별 대접을 받는다는 사실은 똑같습니다. 최근 3년(2016~2018) 동안 한국 프로야구에서 나온 세이브는 총 950개. 이 중 540세이브(56.8%)를 정확히 1이닝을 던진 선수가 가져갔습니다. 아웃 카운트를 1개(54세이브) 또는 2개(64세이브)를 잡고 세이브를 기록한 투수까지 합치면 이 비율은 69.3%까지 올라갑니다.
이렇게 세이브를 기록할 수 있을 때까지 아끼고 아껴주기 때문에 마무리 투수는 위기를 별로 맞지도 않습니다. 이 3년 동안 세이브를 제일 많이(85세이브) 기록한 건 롯데 자이언츠 손승락(37)입니다. 손승락은 이 기간 총 732타석을 상대했는데 역전 주자가 누상에 있던 건 7번(0.96%)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맞습니다. 다 잡았던 고기를 놓치는 게 처음부터 못 잡는 것보다 훨씬 아깝습니다. ‘9회에는 유령이 산다’고 말하는 분도 있습니다. 7, 8회에 잘 던지던 투수도 마무리를 맡겨놓으면 흔들리는 일이 잦다는 겁니다.
마무리가 무슨 의미가 있나요?
말하자면 1이닝 마무리 투수는 △실제로는 승률을 별로 끌어올리는 것도 아닌데 △최대한 아끼고 아주 잘 관리해 △세이브를 기록할 수 있는 상황에만 곱게 마운드에 올려 보내야 하는 ‘천연기념물’ 같은 존재입니다. 물론 때로는 장기간 세이브 상황이 없을 수도 있으니 상대팀 심기를 불편하게 하지 않을 때를 잘 골라 컨디션을 점검하는 일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맙소사!메이저리그에서는 이미 ‘1이닝 마무리 투수’ 회의론이 고개를 들고 있습니다. 2015년 메이저리그에서 30세이브 이상 기록한 투수는 총 20명이었는데 지난해에는 절반(10명)으로 줄었습니다. ‘세이브용’ 투수를 따로 두는 대신 상황에 맞는 불펜 운용을 선택한 결과입니다. 크레이그 킴브렐(31)은 보스턴 레드삭스에서 뛴 지난해 42세이브로 아메리칸리그 1위를 기록하고도 새 시즌을 개막할 때까지 새 팀을 찾지 못했습니다.
정우람은 2015 시즌이 끝난 뒤 자유계약선수(FA) 자격을 얻어 한화와 4년간 총액 84억 원에 계약했습니다. 연평균 21억 원을 받아가는 셈이죠. 이 21억 원짜리 투수가 지난해 마운드에 오른 건 총 55번입니다. 그러면 이 가운데 역전 주자가 누상에 있던 건 몇 번이었을까요? 정답은 제로(0)입니다. 그 대신 연봉 3600만 원이던 김민우(24)가 이런 상황에서 19번 한화 마운드를 지켜야 했습니다. 정말 이 정도로 아끼고 아껴야 할 만큼 마무리 투수가 고귀한 존재고, 세이브가 대단한 기록인가요? 팀 승리보다 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