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살 아들을 바라보는 40대 준이 엄마의 눈가가 촉촉하다. 준이 엄마와 나는 종종 만나는 놀이모임 멤버. 하지만 이 모임에서 그녀만큼 아이와 잘 놀아주는 엄마는 드물다. 다른 20, 30대 엄마들이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그는 자리에 엉덩이 붙일 새도 없이 열심히 아이를 따라다니며 함께 놀아준다.
30대 후반에 엄마가 된 늦맘은 ‘나이 많은 엄마라 아이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자주 한다. 이유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아이와 에너지 넘치게 놀아주지 못해서, 동생을 낳아줄 수 없어서, 다른 젊은 엄마에 비해 나이 들어 보이는 것 같아서, 아이가 대학생일 때 벌써 노년에 접어들게 돼서, 오랜 세월 함께 살아주지 못할까 봐서 등등. 듣다 보면 콧등이 시큰해온다.
‘나이 든 엄마’라 미안한 것투성이
‘엄마의 미안함’은 여러 형태다. 일하는 엄마는 아이와 보내는 시간이 충분하지 않아서 미안함을 느낀다. [뉴스1]
직장맘은 아이와 보내는 시간이 충분하지 않다는 미안함에 시달린다. 어린이집이나 학교 행사라도 놓치는 날이면 속이 타들어간다. 시어머니 또 는 친정어머니가 아이를 돌봐준다면 연로한 부모에 대한 죄책감이 추가된다. 전업맘은 ‘육아에 전념하려고 직장까지 그만뒀는데, 과연 내가 아이를 충분히 잘 키우고 있는가’를 끊임없이 되묻는다. 가계 소득에 직접적으로 기여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미안함, 지금까지 내 교육에 투자한 부모에 대한 미안함은 덤이다.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엄마는 일도, 육아도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하다는 죄책감에 괴로워한다.
미안함을 느끼는 이유는 다를 수 있지만, 외국 엄마들이 느끼는 부담감과 죄책감의 정도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영미권에는 ‘Mom Guilt’(엄마의 죄책감으로, Maternal Guilt라고도 한다)라는 표현이 있다. 한 예로 영국 엄마 20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87%가 ‘아이를 키우는 과정에서 미안함을 느낀 적이 있다’고 답했다. 이 중 21%는 ‘거의 항상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고도 했다(NUK, 2016).
‘엄마의 기준’을 낮춰라?
학계에서는 엄마의 죄책감이 ‘좋은 엄마’에 대한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에서 온다고 본다 (사진은 기사 내용과 관계없음). [뉴스1]
학계에서는 엄마의 죄책감이 ‘좋은 엄마’에 대한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에서 온다고 분석한다. 특히 미국의 경우 1990년대 이후 엄마가 아이의 모든 활동을 기획하고 아이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 ‘집중 돌봄(Intensive childcare)’이 유행하면서 이 같은 경향이 더욱 심해졌다고 한다. 현재 미국 직장맘은 1970년대 전업주부가 아이 돌봄에 사용한 시간과 비슷한 시간을 아이에게 할애하면서도 아이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충분하지 않다는 죄책감을 호소한다는 것이다. 이에 영미권에서는 ‘엄마로서의 기준을 낮춰라(Lower your bar to Good Enough)’ ‘해야만 하는 것은 없다(Don’t Should on yourself)’ 등이 엄마의 죄책감을 없애는 해결책으로 제시되고 있다.
정말 그것으로 충분할까. 엄마가 기준을 낮추고 마음을 내려놓으면 미안함이 사라질까. 유감스럽게도 나는 동의하기 어렵다. 그러한 노력은 심리적 측면에서 약간 도움이 될 뿐이다. 엄마의 죄책감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문제이기 때문이다.
‘엄마의 죄책감’ 뒤에는 아이의 건강과 행복, 나아가 성공까지 모두 엄마의 책임이라는 사회적 기대가 깔려 있다. 엄마들이 깊은 사랑으로 이 책임을 감당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이 같은 기대는 종종 사회적 문제를 가리고 화살을 잘못된 방향으로 돌린다.
지난해 한국 사회에 큰 충격을 안긴 위탁모 영아 학대 사건을 보자. 충격적인 사건만큼이나 내게 놀라움과 아픔을 안겨준 것은 관련 기사에 달린 댓글들이었다. 위탁모 다음으로 대중의 화살이 향한 곳은 아이를 잃은 가엾은 엄마였다. 제 자식을 직접 키우지 않고 남에게 맡겨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비난이었다. 관리·감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며 위탁모 제도를 비판하고 정부 대책을 촉구하는 의견은 거의 없었다.
키즈카페에서 아이가 시설물에 부딪혀 다쳤다는 기사에도 ‘엄마는 애 안 보고 뭐 했느냐’는 반응이 주를 이룬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물론 눈을 뗄 수 없는 게 사실이지만, 키즈카페는 아이들이 이용하는 공간인 만큼 마음껏 뛰놀아도 안전해야 하는 것이 기본이다. 안전장치를 제대로 갖추지 않고 영업할 수 있게 한 제도에 대한 문제 제기는 피해 엄마를 향한 손쉬운 비난에 묻혀버린다.
나는 아이가 세 살이 됐을 무렵 일과 육아 사이의 균형을 고민했고 훌륭한 학자이자 엄마인 분들을 만날 때마다 질문을 던졌다. “아이를 돌보면서 어떻게 그렇게 많은 연구와 활동을 하셨나요?” 영국 한 학자는 방과 후 아이돌보미(Childminder)의 집에 아이를 맡겼다고 했다. 세계은행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은 필리핀 학자와 싱가포르 연구자는 유모를 구했다고 했다. 캐나다 한 교수는 아이가 어릴 때 일본에 머물고 있어 돌봄기관에 오후 9시까지 아이를 맡겼다고 했다. 누군가에게 아이를 맡겨야 했다는 점에서는 한국의 일하는 엄마들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아이가 엄마와 함께 있지 못하는 것에 대해 엄마로서 미안함을 느끼진 않았느냐”고 묻자 이들은 모두 웃으며 이렇게 답했다. “나하고 있는 것보다 아이에게 훨씬 좋은 돌봄환경이라 아이가 더 재미있어 하고 행복해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