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동작구 흑석동 전경. 흑석뉴타운 사업이 개시된 지 10년이 지나자 절반은 고층 아파트 단지로 바뀌었다. [박해윤 기자]
“여태까지도 눈이 오면 새벽같이 나가 눈을 치워요. 우리 바깥양반이 건설 일을 하는데, 출근길에 비탈길에서 미끄러져 넘어지면 큰일이니까. 이 동네는 불이 나면 끝장이에요. 골목이 좁아 소방차가 들어올 수가 없거든. 소방호스 끌어오는 사이 집이 홀랑 타버려요. 정든 동네고 뭐고, 하루라도 빨리 새 아파트 지어 편히 살아보고 싶어요.”
이씨는 김의겸 전 청와대 대변인 덕에 흑석동에 대한 세간의 관심이 높아진 것도 달갑지 않다. “집값이 더 오르는 것도 바라는 바가 아니다”라고 했다.
“재개발 얘기가 나오고 동네 사람들이 집을 많이들 팔았어요. 그중 절반은 떠나고, 절반은 이 동네에 세 들어 살아요. 그런데 계속 집값이 오르니까 속이 끓는 거야. 그런 모습 보는 게 썩 좋지가 않아요. 청와대 양반한테 집 판 사람도 상속세 낼 돈이 없어 그랬다는 소문이 돕디다. 열심히 살아 지킨 집 한 채 애들한테 물려줄 건데, 집값이 너무 올라 우리 애들도 나중에 팔 수밖에 없으면 어떡하나 싶어 걱정도 들고….”
30%가량이 강남 투자자 ‘추정’
서울 동작구 흑석동은 배산임수(背山臨水) 지형을 자랑한다. 앞으로는 한강이 흐르고 뒤로는 서달산이 우뚝 서 있다. 산과 강이 삼각형 모양의 땅을 둘러싼 형태다.예부터 흑석동은 서민 동네였다. 마을 중간에서부터 뒤편 서달산까지 꽤 가파른 언덕이 이어지는데, 이 언덕을 따라 목조주택이 다닥다닥 붙어 있어 한때 ‘한강 이남 판자촌’으로 불렸다. 1988년을 전후해 목조주택은 벽돌로 지은 단독·다세대주택으로 바뀌었다. 흑석동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살았다는 50대 김모 씨는 “이 동네는 4, 5대째 대를 이어 사는 사람이 많아서 30~40년 살았다 해도 명함을 못 내민다”고 했다. 6·25전쟁 후에는 피란민이 흑석동에 상당수 터를 잡은 것으로도 전해진다. 1960년대 흑석동 사람들을 다룬 소설 ‘인간교실’을 쓴 손창섭 작가는 평양 출신으로 흑석동에 오래 거주했다. 만화 ‘안녕 자두야’의 주인공 자두는 흑석동에 사는 아홉 살 꼬마로 역시 실향민의 딸이다.
이러한 흑석동이 달라지고 있다. 2008년 흑석뉴타운 계획이 확정된 이래 마을 절반은 고층 아파트 단지로 탈바꿈했고, 나머지 절반은 재개발이 한창 진행 중이다(표 참조). 재개발 계획이 취소된 10구역을 제외한 나머지 10개 구역(1~11구역) 중 4·5·6·7·8구역은 재개발이 완료돼 4000여 세대가 입주를 마쳤다. 3구역은 현재 주택을 허는 중이고, 9구역은 올해 말 관리처분인가를 승인받고 2021년 착공에 들어간다는 계획이다. 11구역은 내년 상반기 사업시행인가 승인을 목표로 재정비촉진계획을 수정하는 단계에 와 있다. 1구역과 2구역은 주상복합아파트 건설을 목표로 현재 조합 설립을 추진 중이다.
흑석동은 반(半) 신도시, 반(半) 시골 모습이다. 최근 입주를 개시한 아파트 단지에선 아이 손을 잡고 걷는 젊은 엄마를, 낡은 주택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좁고 가파른 골목에선 허리 구부정한 노인을 쉽게 만날 수 있다. 포크레인 여러 대가 집들을 부수고 땅을 고르는 3구역 재개발 공사 현장 바로 옆으로는 주민들을 가득 실은 마을버스가 비탈진 길을 위태롭게 오르내린다. 주택이 헐려나가면서 주민 수는 감소하는 추세다. 2008년 3만6000명이던 흑석동 주민은 현재 3만 명으로 20% 가까이 줄었다.
흑석뉴타운은 최근 1~2년 새 많은 관심을 받은 투자처다. 지난해 9·13 부동산대책 이전까지 서울 아파트값이 가파르게 상승하면서 그 흐름을 타고 흑석뉴타운 재개발 대상 주택과 상가의 프리미엄도 6억 원까지 올랐다. 5억 원짜리 집을 산다면 재개발 이후 가치 상승을 고려해 6억 원의 웃돈을 더 내야 한다는 뜻이다. 지난해 9·13 부동산대책 이후 프리미엄이 1억 원가량 낮아졌지만, 거품이 다소 꺼진 것이지 가격 조정은 아니라는 게 부동산 관계자들의 시각이다.
‘몸값’이 오르면서 조합원도 원주민에서 외지인으로 상당수 바뀌었다. 조합마다 사정이 다르겠지만, 이곳 사람들은 적어도 30% 이상이 주로 강남에서 온 투자자일 것으로 추산한다. 흑석뉴타운 9구역 재개발조합의 김종대 총무이사는 “최근 들어 서울 강남권에서 1000세대 이상 아파트 단지가 신규로 나올 수 있는 곳이 없어지자 강남에 바로 이웃한 흑석동이 조명받기 시작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들 망설일 때 과감하게 산 사람이…
김의겸 전 청와대 대변인이 사들인 흑석뉴타운 9구역 내 상가(오른쪽)와 아직 헐리지 않은 흑석뉴타운 11구역 내 좁은 골목길. [박해윤 기자]
재개발이 진행되는 구역 가운데 가장 주목받는 곳은 ‘김의겸 상가’가 속한 9구역이다. 면적 대비 조합원 수가 많지 않아 재개발 사업성의 바로미터로 통하는 ‘비례율’(사업 완료 자산평가액에서 사업비를 뺀 금액을 사업 전 자산평가액으로 나눈 수치)이 118%로 꽤 높은 편이기 때문이다. 보통 비례율이 100%를 상회해야 재개발 사업성이 있다고 평가받는다. 위치도 흑석뉴타운 한가운데인 데다 평지여서 사업 완료 후에도 가치가 높을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9구역 내 N공인중개사사무소 대표는 “현재 흑석뉴타운의 리더는 아크로리버하임인데, 9구역에 들어서는 ‘롯데시그니처캐슬’이 아크로리버하임을 능가하거나 적어도 어깨를 나란히 할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 김종대 총무이사는 “은로초, 중앙대부속초·중학교가 가깝고, 9구역 내에 고교 부지도 마련해놨기 때문에 교육 여건이 좋은 점도 인기에 한몫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K공인중개사사무소 관계자는 “지난여름 그 상가가 팔렸을 때 ‘매수자가 상투 잡은 거 아니냐’고들 했다. 그런데 몇 달 지나서는 다들 ‘잘 샀다’고 말이 바뀌었다”고 전했다. 지난해 7월 김 전 대변인이 25억7000만 원에 상가를 매입하고 4개월 뒤인 11월 해당 건물에 대한 재개발조합의 자산평가금액이 나왔는데, 기대 이상이었다는 것이다. 해당 상가의 가치는 25억 원 상당으로 ‘2+1’ 분양이 가능한 금액이다. 30평형대 아파트에 20평형대 아파트를 하나 더 받고, 또 상가 분양을 받을 자격도 주어진다. 이 관계자는 “다들 망설일 때 과감하게 산 사람이 누군지 궁금해했는데, 김 전 대변인 부부라는 사실을 이번에 알게 됐다”고 말했다.
M공인중개사사무소 대표는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라고 평가했다. 주변 시세를 감안했을 때 아파트 2채에 상가 1개의 가치가 현재 40억 원 상당이기 때문이다. 이 대표는 “40평형대 아파트 하나와 상가만 받더라도 좋은 투자”라고 말했다. 김의겸 상가와 불과 500m 떨어진 아크로리버하임의 40평형대 호가가 현재 25억 원 상당. 9구역 상가 분양가는 3.3㎡당 3000만~3500만 원으로 검토되고 있는데, 현재 이 일대 신축 아파트 단지 상가의 시세는 3.3㎡당 6000만 원 안팎이다.
‘김의겸 특수’ 조짐도
흑석뉴타운 7구역에 들어선 아크로리버하임 주변의 야경. [박해윤 기자]
하지만 김 전 대변인의 투자를 바라보는 시선은 곱지 않다. 흑석시장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한 60대 남성은 “자기 돈으로 투자하는 것이 잘못됐다고 할 순 없지만, 집값 잡겠다는 청와대를 대변하는 사람이 전세보증금에 대출까지 최대한으로 끌어모아 재개발 상가를 샀다는 것은 매우 문제 있는 처신”이라고 말했다. 흑석뉴타운 11구역에 거주하는 한 40대 주부는 “최근 1~2년 새 강남 사람들이 몰려와 흑석동 재개발 집값이 많이 뛰었는데, 그중에 청와대 사람도 있다고 해 기가 막혔다”고 말했다. 흑석뉴타운 재개발사업에 관여하는 한 관계자는 “흑석뉴타운을 너무 장밋빛으로만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직접 거주하기보다 임대 수익을 올리겠다는 투자자가 많은데, 다시 말해 가치가 계속 상승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얘기”라는 것이다.
흑석동은 ‘西반포’ ‘新강남’ 될 수 있을까
지난해 11월 입주를 개시한 흑석뉴타운 롯데캐슬에듀포레(위)와 한창 철거 공사 중인 흑석뉴타운 3구역 재개발 현장. [박해윤 기자]
11구역이 ‘차세대 강남’을 지향한다면 7구역 아크로리버하임은 ‘이미 강남’임을 자부한다. 아크로리버하임에서 만난 한 주민은 “위치는 동작구에 속하지만, 주민은 강남 사람들”이라고 귀띔했다. 반포, 서초 출신인 30, 40대 부부가 강남보다 저렴하면서 강남과 가깝고 시설도 좋은 새 아파트를 찾아 많이 이사 왔다는 것이다. 이 주민은 “강남 사는 부모가 자녀들 집은 상대적으로 저렴한 흑석동에 마련해준 경우가 많다고 들었다”고 전했다.
하지만 흑석동의 새 주민들은 자녀 교육 문제를 가장 걱정한다. 흑석뉴타운롯데캐슬에듀포레 인근에서 만난 한 주민은 “새 아파트 전세 가격이 반포의 절반 수준이라 이사 오긴 했지만, 학군이 좋은 것도 아니고 학원이 많은 것도 아니어서 아이가 중고교생이 될 때까지 살지는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는 “반포, 여의도가 가깝긴 하지만 편하게 갈 수 있는 쇼핑센터나 문화시설이 없다는 것도 흑석동의 아쉬운 점”이라고 덧붙였다.
이러한 아쉬움은 흑석뉴타운이 완성되는 시점에 자연스럽게 해소될 수 있으리라는 시각도 있다. 중학생 자녀를 둔 한 학부모는 “이 동네 아이들은 반포나 서초로 학원을 다니는데 버스로 서너 정거장이라 크게 불편한 정도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앞으로 이 동네에 강남 같은 학원가가 형성되긴 어렵겠지만, 학교 수준은 올라가지 않겠느냐”고도 했다. “한국에서 좋은 학군은 교육당국보다 학부모가 만드는데, 새 아파트가 더 많아져 주민 수준이 올라가면 자연스럽게 학교 수준도 상향될 것”이라는 기대에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