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로컬릿 다이닝 톡’의 메뉴, 그리고 웰컴 푸드. 2 시금치 파스닙 소스를 곁들인 구운 뇨키. [사진 제공·김민경]
봄나물 한가득 담긴 그 시절 도시락
3 설탕당근으로 불리는 파스닙. 4 감자와 세몰리나 가루로 반죽해 만드는 뇨키. 5 카넬로니 반죽을 만들고 있다. 6 카넬로니 속을 채울 늙은 호박과 펜넬을 오븐에 구웠다. [사진 제공·김민경]
봄나물을 먹는 내 식습관은 지금도 여전하다. 그러다 보니 제철 채소를 생산하거나 채취해 판매하는 농부들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게시물을 자주 들여다본다. 얼마 전 가슴 아픈 소식 하나를 접했다. 제주에서 유기농 무를 재배하는 농부가 SNS에 ‘유기농 무 거저 드셔주세요’라는 말로 시작되는 긴 글을 올렸다. 애써 키운 무의 값이 폭락하는 바람에 잘 영근 무를 죄다 갈아엎게 생겼으니 누구라도 가져가 맛있게 먹어주길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도시 한가운데서 사는 나 같은 사람은 무값이 크게 하락했다는 걸 체감하지 못한다. 어느 농가는 비참하게 봄을 맞고 있다니 안타까웠다. 다행히 제주 농부는 SNS 친구들의 도움으로 무밭을 갈아엎는 사태는 피할 수 있었지만 공들여 키운 무의 제값을 다 받지는 못했다. 온라인으로 소통할 줄 모르는 여러 농가가 이런 고통을 겪는다고 생각하니 답답하다. 좋은 재료를 찾아 먹고자 하는 사람은 넘쳐나지만 농가와 연결고리가 드물다 보니 양쪽 모두 손해를 보고 있구나 싶다.
다행히 요즘은 제철 재료를 구해 맛있게 요리하고 사람들에게 알리는 요리사, 소규모 델리 숍, 다이닝 공간 등이 늘어나는 추세다. 경기 남양주에 자리한 ‘로컬릿(Local Eat)’도 그중 하나다.
이름처럼 ‘로컬릿’은 국산 제철 재료를 활용해 새로운 음식, 색다른 맛을 만들고 있다. 일요일 말고는 작은 가게를 늘 열어두고 음식을 판매하지만 비슷한 시기에 방문하더라도 맛볼 수 있는 메뉴는 제각각이다. 어떤 제철 재료냐에 따라 음식이 조금씩 바뀔 수밖에 없다. 4월 초에는 시금치, 늙은 호박, 가리비와 바지락, 오징어 등을 이용해 봄 직전에 맛볼 수 있는 음식들을 선보인다. 주재료 목록에선 그다지 특별함이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완성된 요리 접시를 마주하면 보는 즐거움이 있고, 음식을 맛보면 좋은 재료와 훌륭한 솜씨가 조화로워 감탄하게 된다.
‘로컬릿’의 요리는 이탈리아 음식에 기반을 두고 있다. 시금치로 초록빛 소스를 만들어 뇨키(gnocchi·감자와 세몰리나로 만드는 이탈리아 반죽 요리)와 곁들였다. 시금치가 색감을 담당한다면 소스의 농후한 맛과 걸쭉한 질감은 파스닙(parsnip)이라는 색다른 로컬 재료가 도맡았다. 올록볼록하고 잔뿌리가 듬성듬성 난 모양이 뚱뚱한 인삼을 닮은 파스닙은 ‘설탕당근’으로 불린다. 수분이 적지만 질기지 않고 아삭아삭하며 달콤하다. 파스닙이 없을 때는 콜리플라워와 시금치를 섞어 소스를 만든다고 한다.
시금치로 만든 뇨키, 늙은 호박으로 만든 카넬로니
7 프레시 파스타에 늙은 호박과 펜넬로 속을 채워 넣고 카넬로니를 만드는 과정. 8 노란 알배추로 색다른 구이를 만든다. 9 호박으로 속을 채운 카넬로니. [사진 제공·김민경]
카넬로니에 곁들이는 더운 채소 요리는 알배추 구이다. 알배추를 대범하게 썰어 통째로 올리브오일을 두른 프라이팬에 지글지글 굽는다. 아삭하던 섬유질이 보드랍게 익기 시작하면 소금으로 간하고, 식초를 살짝 둘러 새콤한 맛을 더한다. 마지막으로 후춧가루와 캐러웨이 씨(caraway seed)를 솔솔 뿌려 낸다. 알배추 구이는 예상하듯 다디달고 촉촉하다. 맛의 포인트는 중간 중간 토도독 터지면서 알싸한 향을 선사하는 캐러웨이 씨다. 이 향신료가 노란 알배추의 새로운 가능성을 느끼게 한다.
‘로컬릿’을 사람들에게 각인시킨 시그니처 메뉴는 채소 테린이다. ‘테린(terrine)’이라고 하면 고기 요리를 먼저 떠올릴 법하다. 단백질이 많은 육류를 초벌 조리해 테린이라는 틀에 차곡차곡 쌓아 넣고 모양을 잡아 익힌 뒤 굳힌 프랑스 음식이다. 차게 굳은 테린을 도톰하게 썬 뒤 샐러드, 피클, 빵 등에 곁들여 애피타이저로 먹는다. 쫀득함이나 탄력은 덜하지만 우리나라 편육과 비슷하다.
‘로컬릿’에서는 고기 대신 채소로 테린을 만드는데, 고기 테린보다 손질과 조리가 훨씬 번거롭다. ‘로컬릿’ 테린 안에는 6~8가지 채소가 들어간다. 채소는 저마다 익는 속도와 수분 함량이 다르기 때문에 일일이 따로 손질하고 익혀야 한다. 맷돌호박은 단단한 껍질을 벗기고 씨를 발라 과육만 얇게 썬다. 맷돌호박을 얇게 써는 일이 얼마나 고된지 해본 사람은 안다. 파프리카는 껍질을 모두 벗겨 먹을 때 거슬리지 않게 한다. 그나마 버섯, 배추, 주키니호박(애호박), 가지는 손질이 수월한 편이다. 손질한 채소는 올리브오일, 소금, 후춧가루를 뿌려 오븐에 굽는다. 채소를 구우면 향이 진해지며, 대체로 쓴맛은 줄고 단맛이 좋아진다.
채소 테린이 형태를 제대로 갖추려면 재료끼리 엉김이 필요하다. 육류는 단백질 덕분에 모양을 잡기 쉽다. 하지만 채소 테린의 경우 부족한 단백질을 백태에서 얻는다. 백태를 삶은 뒤 껍질을 벗기고 곱게 으깨 페이스트처럼 만든다. 이를 채소 켜켜이 넣으면 채소가 흐트러지지 않는다. 고소한 맛, 크림 같은 식감까지 더할 수 있다. 채소 테린을 감싸는 재료로는 잎이 넓고 맛이 개운한 케일이나 달고 연한 주키니호박 슬라이스를 활용한다. 잘 굳은 채소 테린은 도톰하게 썰어 별다른 양념이나 소스 없이 먹는다. 부서지지 않게 조심스럽게 잘라 큼직하게 한입 먹어야 제맛을 즐길 수 있다. 입에 가득 넣고 씹으니 달고 아삭하며 부드럽고 촉촉한 것이 채소 만찬이 따로 없다. 결마다 맛이 살아 있다.
남양주의 봄 느끼게 해준 요리
10 계절 샐러드와 함께 플레이팅한 채소 테린. 11 ‘로컬릿’에서는 텃밭도 가꿀 예정이다. [사진 제공·김민경]
‘로컬릿’에서 사용하는 식재료는 남양주에서 재배된 것이 대부분이다. 정성껏 차려진 식탁에서 남양주의 봄을 한껏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사는 성북구 길음동에서 차로 고작 30분 거리에 이토록 다양하고 신비한 작물들이 자라는 줄이야. 지척에 두고 늦게 안 것이 분하고, 이제라도 알게 돼 기쁘다.
남정석 ‘로컬릿’ 셰프 인터뷰
로컬 식재료를 사용하면서 달라진 점이 있나.“예전에는 습관적으로 계절 메뉴를 작성했다. 그러다 보니 늘 사용하던 식재료의 범주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로컬 재료와 가까워지면서 식재료를 먼저 고른 다음 메뉴를 구상한다. 농가에 가면 싱싱하고 다양한 재료를 맛보며 새로운 요리 아이디어를 찾을 수 있다. 또한 식재료의 특성이나 쓰임에 관해 농부들과 자주 의견을 주고받는다. 서로 경험과 정보를 공유하다 보면 언제나 더 좋은 맛으로 이어지는 것 같다.”
앞으로 계획은 무엇인가.
“시간이 된다면 활동 범위를 넓혀 다른 지역 농산물과 육류, 해물까지 두루 다뤄보고 싶다. 로컬 식재료를 활용한 페스토, 소스, 잼 등도 다양하게 만들어볼 생각이며 몇 가지 허브와 채소는 텃밭에서 직접 키워볼 예정이다. 현재 한 달에 한 번 ‘로컬릿 다이닝 톡’을 진행하고 있다. 새로운 식재료로 함께 요리하고 맛보는 시간이다. 이를 통해 생산자가 아닌 소비자들과 만남을 꾸준히 이어가면서 여러 사람에게 로컬 식재료를 알릴 계획이다. 다이닝 톡은 ‘로컬릿’의 네이버 블로그나 인스타그램을 통해 공지한다.”
주소 경기 남양주시 와부읍 수레로 88-17 동부프라자 11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