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 서울 중구 광희로 233
준공 2019년 4월
설계 문훈발전소+무유기 건축사무소(문훈)
[홍태식]
공자의 제자인 자하는 ‘논어’에서 “군자가 배움을 통해 도를 닦을 때는 백공(百工)이 사(肆)에서 생활하며 그 공예품 완성에 최선을 다하는 것과 같아야 한다”고 말했다. 장인들이 공예품 완성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하듯 깨달음을 추구해야 한다는 이 표현에서 인격을 도야(陶冶)한다는 표현이 탄생했다. 도(陶)는 도자를 빚는 것이요, 야(冶)는 쇠를 주조하는 것을 뜻하니 곧 백공의 일에 인생수양을 빗댄 표현이다.
사실 그 이름에 한자 사(肆)가 안 들어가 그렇지, 얼마 전까지도 그런 공간을 쉬이 찾아볼 수 있었다. 대장간, 목공소, 그리고 방앗간이다. 요즘은 서울 시내에서 찾기 힘든 그 방앗간을 도심에 현대적 건축으로 지었다는 말을 듣고 슬쩍 웃음이 났다. 그것도 쌀을 찧는 정미소가 아니고 참기름을 짜는 방앗간이라니. 시골서 올라온 참깨들이 그곳에서 황금빛 기름으로 도야되는 과정에서 얼마나 고소한 땀내를 풍길 것인가.
불탑 같고 돌탑 같은 현대적 방앗간
[홍태식]
엉? 저게 방앗간이라고? 주택 사이로 난 더 좁은 골목을 거쳐 가까이 다가가 봤더니 항구에 있는 등대 같기도 하고 공항에 세워진 관제탑 같기도 했다. 주택가에 들어서기엔 확실히 이질적인 건축이었다. 하지만 겉돈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우리 전통 마을 어귀 서낭당 앞에 쌓아놓은 돌탑을 연상케 하기도 했다.
4월 4일 준공식을 연 스타트업체 쿠엔즈버킷의 동대문 도심 공장 겸 플래그숍이었다. 2013년 창업된 쿠엔즈버킷은 한국 고유의 참기름과 들기름을 올리브유에 필적할 고급 향신료로 탈바꿈시키고 있다. 참깨나 들깨를 고온압착이 아닌 저온압착이나 냉압착을 통해 기름으로 추출해 그 고유의 향과 맛이 다른 식재료를 압도하지 않고 조화를 이루도록 했다.
3층에 있는 저온 로스팅기. 지하에 보관된 참깨와 들깨를 화물 엘리베이터로 이동시켜 먼저 세척한 뒤 여기서 볶는다. [홍태식]
2층에 있는 오일탱크와 필터링 장비. 3층에서 볶은 뒤 1차 추출한 기름을 왼쪽 금속 탱크에 저장해 이를 3단계에 걸쳐 필터링한다. 그때 걸러낸 기름은 하얀 플라스틱 통에 임시 저장한다. [홍태식]
2층 공장 입구의 벽면. 바닥보다 천장으로 올라갈수록 넓어지는 건축 구조를 확인할 수 있다. [홍태식]
박정용 쿠엔즈버킷 대표의 설명이다. 국내 유수 음식점에서 쿠엔즈버킷의 참기름을 쓰면서 ‘프리미엄 참기름’으로 입소문이 났고 이후 주요 백화점은 물론, 홍콩 수입식료품 판매점 ‘시티슈퍼’와 미쉐린 별점 셋을 받은 미국 뉴욕 유명 레스토랑에까지 납품하게 됐다고 한다.
그런데 회사명이 특이했다. 쿠엔즈버킷의 영어 표기는 queensbucket이다. queens는 이 회사의 모토인 ‘Qualified Utility Enhances Everyone’s Need Satisfied(최적화한 유용성이 모든 사람의 필요를 만족시키는 것을 강화한다)’의 약자라서 차별화를 위해 ‘쿠엔즈’로 발음하게 됐고 bucket은 자신들이 만든 황금빛 참기름을 들통에 받아놓고 바라보면서 행복을 느끼라는 의미라고 했다.
그런 설명을 듣고 나니 건축의 비밀이 풀렸다. 불탑이나 돌탑처럼 여겨지던 것이 위가 넓고 아래가 좁은 들통(버킷)을 겹겹이 쌓아놓은 형상임을 깨달았다. 선별된 깨를 씻고, 볶고(로스팅), 압착(프레싱)해 추출한 기름을 세 차례에 걸쳐 걸러내고(필터링) 최종 병입하기까지 과정에 필요한 탱크 내지 통을 들통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1층 플래그숍에서 2층 공장으로 올라가는 계단. 출입구와 대각선 지점에 위치한다. (왼쪽) 쿠엔즈버킷이 제조하는 53종의 참깨, 들깨, 마늘 제품이 높다란 선반 위에 층층이 전시돼 있는 1층 플래그숍. [홍태식]
실제 1층 플래그숍에 들어서면 위로 갈수록 공간이 넓어져 그렇게 좁아 보이지 않는다. 이 숍에는 쿠엔즈버킷의 오일 제품 26종과 선물세트 15종, 과자류 10종, 화장용 2종이 높은 선반 위로 쭉 전시돼 있다. 평면 면적은 좁은 대신, 위로 갈수록 넓어지는 공간감을 살리기 위한 수직적 공간 배치다. 또 1층 출입구를 모서리에 만들면서 기계식 슬라이딩 도어를 양면에 설치해 양문을 모두 열고 있으면 더욱 확장감이 생긴다. 그래서 출입구 대각선 맞은편에 위치한 내부 계단 위에 서서 1층을 내려다보면 뮤직홀을 내려다보는 느낌이 들 정도다.
다섯 겹의 들통과 오층석탑
5층에 해당하는 옥상의 철조구조물에서 바라본 15층짜리 호텔. [홍태식]
건물 안쪽의 석조 계단과 철제 안전 바. 이곳이 참기름을 대량생산하는 공장임을 일깨워준다. [홍태식]
양면 여닫이 슬라이딩 도어로 된 출입구. 꼭짓점과 꼭짓점을 연결하는 기하학적 사선이 공간에 역동감을 부여한다는 건축가 문훈의 미학이 반영돼 있다. [홍태식]
실제 2, 3층으로 올라가면 지하 재료창고에 보관된 깨를 엘리베이터로 옮겨와 씻고 볶고 압착해 기름을 만드는 데 필요한 온갖 장비가 다 갖춰져 있다. 이를 위해 독일 제휴업체 직원들까지 나와 설치작업을 끝냈다. 이곳에서 하루 얼추 1000병 분량을 생산할 수 있다고 하니 방앗간이라기보다 공장이라는 표현이 맞다.
4층 쿠킹체험장. 저층부에서 볼 수 없는 대형창이 벽면에 설치돼 햇살이 눈부시다. [홍태식]
5층에 해당하는 옥상 공간. 쿠킹체험장과 연계해 다용한 용도로 쓸 수 있도록 비워놨다. 1층 출입문의 기하학 무늬를 원용한 커다란 철골 유리창이 눈길을 끈다. [홍태식]
쿠엔즈버킷 도심공장 및 플래그숍의 야경. 위는 넓고 아래는 좁은 버킷(들통) 다섯 개가 층층이 쌓여 있는 형상을 확인할 수 있다. [사진 제공·변용한]
“박정용 대표는 군대에서 사귄 친구입니다. 제가 이등병일 때 병장이었지만 동갑(1968년생)이라는 걸 안 뒤 둘이 따로 있을 땐 말을 놓으라며 늦깎이로 입대한 저를 많이 챙겨준 고마운 친구였죠. 그런데 ‘도심 속 방앗간’을 짓겠다며 제게 설계를 의뢰해오는 게 아니겠어요. 좁은 공간을 널찍하게 활용하려고 다섯 개의 버킷이 겹쳐진 형태를 구상했지만 거기엔 제가 간직해온 박 대표에 대한 이미지도 투영돼 있습니다. 맑은 성품에 단아한 박 대표를 볼 때마다 동자승을 떠올렸거든요. 그래서 우리 전통 건축의 오층석탑 형식을 접목한 겁니다.”
거기엔 그렇게 노지심처럼 호방한 문훈 소장과 동자승처럼 수줍게 웃는 박정용 대표의 남다른 우정이 농축돼 있었다. 도야라는 표현이 잘 어울리는 두 장인(匠人)은 인생의 도반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