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12일 열린 의사대표자 궐기대회. 이날 의협은 총선을 대비한 공식적인 활동에 나설 것을 선언하고, 낙선, 지지 운동 대상 후보들을 구체적으로 거명해 주목받았다.
지난 대선 때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물밑에서 지원했다 아무 성과도 얻지 못한 의협이 이번에는 아예 드러내놓고 후보 지지운동과 낙선운동을 벌이기로 한 것. 즉 의협의 정책에 호의적인 후보에 대해서는 지지운동을, 적대적인(의협이 판단하기에) 후보에 대해서는 낙선운동을 벌이겠다는 방침이다. 정부의 ‘사회주의적’ 정책에 제동을 걸어줄, 그리고 의협의 입장을 정책에 적극 반영시켜줄 국회의원을 자신들의 손으로 직접 만들어내겠다는 논리인 것이다.
지난 16대 총선 당시 시민단체가 벌인 낙선운동은 최종적으로 ‘불법’ 판정을 받았다. 따라서 국내 최대 이익단체중의 하나인 의협이 낙선, 또는 지지 운동을 벌이는 것은 관심을 끌 수밖에 없다. 자칫하면 ‘이익단체의 정치 지배’를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의협은 10월11일과 12일 경기 모 연수원에서 열린 전국의사대표자 궐기대회에서 17대 총선에 적극 개입해 정치세력화할 것임을 선언했다. 의협은 내년 총선에 개입하기 위해 가칭 ‘제17대 국회의원선거 보건의료정책 평가단’을 구성해 선거구별 출마자 현황을 파악하는 한편 대외협력기금을 모금하기로 했다. 의협은 의사들이 합법적으로 선거운동을 펼칠 수 있는 방식과 총선 정치자금 모금과 지원 방안에 관한 연구를 다음달까지 마치고 구체적인 후보 지원운동에 들어갈 예정. 이는 대외협력기금을 모아 자신들이 지지하는 후보에게 후원금 명목으로 지원하겠다는 뜻이다.
의약분업 수호 의원들 낙선운동 대상자로 거명
이날 궐기대회에서 의협의 한 간부는 낙선, 지지운동을 벌일 대상을 밝혀 충격을 주었다. 참가자들이 전한 국회 보건복지위 소속 낙선운동 대상자는 민주당 김성순·한나라당 김홍신 의원, 지원운동 대상은 한나라당 이원형 남경필 심재철 의원 등이다. 이 간부는 “김홍신, 김성순 의원 등은 의사들을 색안경을 끼고 보기 때문에 이번 총선에서 불리하도록 하겠다”면서 “나머지 의원들은 의사들 덕분에 당선될 수 있었다는 말이 나올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는 것.
낙선운동 대상에 오른 김성순, 김홍신 의원은 초강경 의약분업 수호자들이다. 이중 김홍신 의원은 건강보험 재정 분리와 관련해 한나라당 당론을 위배하고 통합을 주장하다 한동안 환경노동위원회로 방출된 적도 있다. 두 의원은 모두 건강보험 재정 파탄의 원인을 ‘의사들의 과도한 수가 인상 때문’이라고 주장해 의사들의 공적(公敵)이 됐다. 특히 이들이 내놓은 건강보험 허위청구 의사 처벌 강화 입법안은 불에 기름을 부은 꼴. 어쨌든 사사건건 의협의 주장과는 배치되는 정책을 주장해온 터라 누가 보더라도 이 두 의원은 의협의 낙선운동 대상 1순위로 지목될 만했다.
반면 이원형 의원은 이번 국정감사에서 “의약분업이 국민에게 불편과 7조9000억원의 부담만 가중시킨 실패한 정책”이라거나 “사회적 합의도 이루어지지 않은 포괄수가제를 재검토하라”는 등 의협의 주장을 그대로 이야기해 지원운동 대상에 올랐다. 심재철 의원도 대표적인 건강보험 재정 분리론자인 데다 의약분업 회의론자. 남경필 의원은 보건복지위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의협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은 것이 점수를 얻게 된 듯하다.
포괄수가제가 도입되면 환자들의 진료비 부담이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의협이 지난 9월4일 개최한 포괄수가제 대국민 공청회. 의사들은 공청회에서 포괄수가제가 채택되면 진료의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아래).
김홍신 의원은 “국회의원이 이익집단의 입장이 아니라 국민의 입장에 선 것이 잘못됐다니 한마디로 어이가 없다”며 “선거법에 맞게 선거운동을 하겠다는데 말릴 수는 없지만 이익집단이 자신들의 이익을 정책에 반영시키기 위해 공식적으로 낙선, 지지운동을 한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라고 볼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의협 권용진 부대변인은 “공식적으로 낙선, 지지운동 대상 후보를 선정한 적도, 말한 적도 없다”며 “분명한 것은 이번 총선에서 의협이 무시할 수 없는 단체라는 사실을 인식시킬 수 있도록 선거운동을 준비하고 있다는 점이다”라고 밝혔다.
도대체 의협의 이런 자신감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의료계는 그 해답을 최근 포괄수가제를 둘러싼 정부와의 싸움에서 의협이 ‘완승’을 거둔 데서 찾는다. 의협 김재정 회장은 9월4일 서울의 한 호텔에서 열린 포괄수가제 대국민 공청회에서 “한국의 의료정책이 사회주의로 가고 있다”며 참여정부의 의료정책을 ‘사회주의 직전 단계’로 못박았다.
포괄수가제는 진찰, 검사, 수술, 주사, 투약 과정에서의 진료의 양이나 종류(진료행위)에 관계없이 질병을 몇 개의 영역으로 구분해 미리 정해진 금액에 따라 진료비를 지급하는 제도. 예를 들어 현행 행위별수가제에서는 아이를 낳을 때 산모의 상태, 사용된 주사제, 투약된 약의 양, 입원 일수에 따라 진료비 차이가 크지만 포괄수가제가 채택되면 아이 한 명을 낳은 경우 무조건 같은 금액의 진료비가 지급된다. 2년간 1600개 병·의원에서 포괄수가제를 시범 실시해온 정부는 올 11월부터 이를 전국으로 확대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정부와 의협은 포괄수가제를 놓고 “사회주의 제도로 인해 의료의 질이 떨어질 것”(의협), “과잉진료를 없애고 항생제 남용을 막을 수 있는 제도”(정부)라고 맞서왔다. 정부 입장에서 포괄수가제는 불필요한 건강보험 재정 지출을 막아서 좋지만 병·의원과 의사 입장에서는 의약분업만큼이나 수입에 엄청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제도이기 때문이다.
의료정책의 ‘사회주의’ 공방은 김대중 정권 당시 의약분업을 비롯해 건강보험 재정 통합문제, 보건진료소 설치문제 등 의료의 공공화가 거론될 때마다 어김없이 벌어져왔다. 한나라당은 지난해 통합이 확정돼 있던 건강보험 재정의 분리를 주장하는 한편, 지난 대통령선거 때 의협의 숙원인 ‘의약분업 철폐’ 주장에 동의하는 듯한 제스처를 취했었다. 당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는 의협 주최 후보 초청강연회에서 “대통령이 되면 의약분업을 전면 재검토하겠다”며 “내가 생각하기에는 환자가 원하면 의사도 약을 지어줄 수 있는 임의분업이 옳은 것 같다”고 밝혀 의사들의 환호를 받았다. 의협에 초청된 대선후보는 이후보밖에 없었다. 의협의 한 인사는 “지난 대선 때 의협이 이후보를 지원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라며 “모금한 기금도 대선자금으로 지원된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그때의 의협 회장이던 신상진씨는 올해 초 의협 선거에서 전임 회장이던 김재정씨에게 참패하고 물러났다. 김회장은 2000년 4월 제31대 의협 회장에 당선된 뒤 의약분업 도입을 전후해 의료계 집단 휴·폐업을 주도한 인물. 그러나 의약분업이 시행되면서 건강보험 재정이 급격히 악화, 의협으로 부정적 여론이 쏠리자 2001년 6월 자진사퇴했었다.
김회장은 의협 회장에 재당선된 후 참여정부가 포괄수가제 강행 의사를 밝히자 “2000년 7월과 같은 의사파업을 일으키겠다”고 배수진을 쳤고, 보건복지부는 이에 완전히 굴복했다. 김화중 장관은 11월부터 실시하기로 했던 포괄수가제에 대해 9월22일 “전면 재검토하겠다”고 밝힌 후 10월15일에는 “공공의료기관에서 우선 실시하고 민간병원에 대해서는 희망하는 곳에만 적용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포괄수가제를 둘러싼 의(醫)-정(政) 간 첫 ‘전쟁’에서 참여정부가 싸워보지도 못하고 두 손을 들자 시민단체들의 비난도 거셌다. 건강세상 네트워크 등 10여개 시민·노동·의료단체들은 10월15일 성명을 내고 “7개 질병군 포괄수가제를 예정대로 모든 의료기관에서 전면 실시하라”면서 “선택적 포괄수가제로는 과잉진료 억제와 의료비 절감 등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과연 의협은 자신들이 지지하는 후보들을 얼마나 당선시킬 수 있을까. 낙선운동 대상 의원들에게 패배의 쓴맛을 보여줄 수 있을까. 분명한 것은 국회의원을 뽑는 유권자는 의사가 아니라 바로 국민이라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