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켓 과학의 아버지로 불리지만 나치 독일의 로켓 기술 개발을 주도했던 베른헤르 폰 브라운. [GETTYIMAGES]
미국 물리학자 로버트 고더드. [GETTYIMAGES]
달에 갈 거라 선언한 당찬 학생
폰 브라운은 히틀러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독일 북부 작은 섬에서 1932년부터 당시 육군연구센터 로켓 부장이던 발터 도른베르거와 본격적으로 로켓 연구를 시작했다. 세계 최초 제트 추진 순항미사일로 불리는 V-1 로켓은 속도가 그리 빠르지 않아 발사 후 절반 이상이 연합군에 격추됐다. 뒤이어 등장한 V-2 로켓은 첫 시험발사에 성공한 후 무기로서 가능성을 입증했다. 순조롭게 실전 배치된 이 공포의 존재는 수천 명의 민간인과 군인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하지만 새로운 과학기술로 무장한 로켓의 맹렬한 화력에도 결국 독일은 전쟁에서 패했고, 신무기의 위력을 맛본 미국과 러시아 두 승전국은 어떻게든 독일의 로켓 기술을 가져오기 위해 최선을 다하기 시작했다. 물론 국제 정서상 어떤 나라 든 전쟁 준비를 위해 미사일을 만드는 건 결코 좋아 보이지 않으니, 대놓고 경거망동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미국 전략사무국은 비밀리에 나치 독일 과학자들을 포섭하는 일명 ‘페이퍼클립 작전’을 시행했다. 이 작전명은 포섭 대상에 오른 주요 인사의 명단을 종이용 클립으로 표시해놓은 데서 유래했다. 미국은 초반에 전문가들을 소련에 빼앗기지 않으려 노력했고, 당연하게도 가장 눈에 띈 인물은 우수한 로켓 공학자이자 V-2 로켓 개발을 주도한 폰 브라운 박사였다.폰 브라운은 공무원이자 정치가인 아버지와 유럽 귀족 혈통인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어머니가 어린 그의 손에 쥐어준 망원경은 그가 우주를 향한 열정을 키울 수 있게 도와줬다. 수학과 물리학에 소질이 뛰어나지는 않았지만, 우주여행에 대한 갈망으로 유년 시절을 보냈다. 1920년대 후반 세계 최초로 유인 로켓 자동차를 시연하는 프로그램이 등장했다. 폰 브라운은 여기에 푹 빠진 나머지 스스로 여러 개의 불꽃놀이를 부착한 장난감 마차를 거리로 발사해 대형 사고를 일으켰고, 죽음 문턱까지 갔다 왔다. 다행히 관련 인물 중 가장 어려 경범죄로 잠시 구금됐다 아버지와 함께 돌아갔다. 로켓에 대한 관심은 그를 학업에 몰두하게 만들었고, 1929년 베를린 공과대에서 그가 항상 즐겨 읽던 ‘행성 간 공간으로의 로켓(Die Rakete zu den Planetenra‥umen)’ 저자이자 로켓 공학자인 헤르만 오베르트를 만나 그의 액체연료 로켓 실험을 보조했다. 연구에 참여하면서 폰 브라운은 현재의 공학 기술로는 로켓이 제대로 성능을 발휘할 수 없으리라는 확신을 갖게 됐다. 물리학과 화학, 그리고 천문학 등 필요한 지식을 얻기 위해 그는 꾸준히 쉬지 않고 노력했다.
어느 날 스위스 물리학자이자 발명가 오귀스트 피카르의 강연이 있었다. 수소 풍선 비행으로 지구 상층 대기를 연구하던 그에게 젊은 폰 브라운이 다가가 “나도 언젠가 반드시 달에 갈 계획입니다”라고 말했다. 당시 독일 과학자들은 고더드의 연구에 관심이 많았고, 몇몇 독일 과학자는 고더드에게 직접 연락해 질문하기도 했다. 폰 브라운은 여러 간행물에 퍼져 있는 고더드의 방식을 취합해 정리했다.
나치 정권이 들어서자 군사적 목적이 아닌 일반인의 로켓 실험은 일절 금지됐다. 폰 브라운은 이제 재미로 로켓을 만들던 아마추어 모임을 떠나 정부의 풍부한 자본을 바탕으로 현실적인 무기 개발 연구에 참여했다. 묵묵히 연구에 집중했고 드디어 소형 로켓 A-1(Aggregat 1)을 개발했다. 추진실험을 위한 로켓이라 방향 조절 기능이 없어 발사하지는 못했다. 이후 성능을 개선해 만든 A-2 로켓은 발사에 성공해 고도 3㎞까지 올라갔다. 혁신적 신기술을 시연하는 데 성공한 폰 브라운은 A-3 로켓을 만들어 발사를 시도했지만, 근본적인 기술 결함으로 실패했다.
나치 무기 V-2 로켓 개발
발트해의 작은 섬 페네뮌데에 ‘육군연구센터’로 불리는 거대한 시설이 지어졌다. 이곳에서 폰 브라운은 기술 이사로서 항공기의 비행 보조를 위한 액체연료 로켓과 다양한 미사일을 계속해서 만들었다. 로켓을 계속 만들고 싶었던 그는 어쩔 수 없이 나치당원을 신청하고 당원 번호도 발급받았지만 별다른 정치적 행동은 하지 않았다. 이후 A-3의 결함을 개량한 A-4 로켓이 완성됐고, 나치 지도자 아돌프 히틀러는 A-4 로켓을 발사하는 폰 브라운의 영상을 보고 감동해 그를 자신의 개인 교수로 두기까지 했다. A-4 로켓은 V-2 로켓이라는 이름으로 대량생산됐으며, 결국 영국을 향해 발사됐다. 미국 코미디언이자 풍자 작가였던 모턴 라이언 사흘은 폰 브라운에 대해 “나는 주로 별을 겨냥하지만, 가끔 런던을 친다”는 식으로 조롱했고, 여러 언론은 그가 개발한 로켓이 잘못된 행성에 도착한 것을 제외하면 완벽하게 작동했다는 슬픈 소식을 전했다.제2차 세계대전은 끝났고, 독일은 항복했다. 폰 브라운은 전쟁 포로들에게 잔인하기로 유명한 소련을 두려워했고, 미국으로 망명하길 소망했다. 미국 역시 폰 브라운과 그의 동료들을 받아들이는 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알고 있었다. 매우 유리한 입장에서 폰 브라운은 협상 테이블에 앉았고, 미국 뉴멕시코주와 텍사스주에 설치된 미군기지 포트 블리스에 보금자리를 꾸렸다. 이후 독일 여행이 허락되자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아내와 함께 돌아온 그는 아이 3명이 태어나면서 미국 시민이 됐다. 이후 그가 인류를 위해 한 일은 대단히 많다. 폰 브라운이라는 천재의 도움이 없었다면 미국이 그렇게 빨리 달에 착륙하는 건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그는 우주를 향한 수많은 상상을 대중화하기도 했다. 또한 인간은 우주정거장을 통해 우주를 정복할 것이며, 로켓을 이용해 달로 비행할 것이라는 주장을 포기하지 않았다. 화성으로 떠나는 인류 모습을 담은 SF를 써 출판사에 보내기도 했고, 월트디즈니와 교육용 영화도 제작했다. 그는 위대한 로켓 공학자이자, 우주기술 산업의 유능한 전략가였다.
미국 망명 후 우주기술 연구
수천 명의 민간인과 군인을 죽음으로 내몬 V-2 로켓. [GETTYIMAGES]
당시 경쟁자였던 소련의 세르게이 코롤료프가 오직 로켓과 인공위성에만 심혈을 기울일 무렵, 미국은 폰 브라운의 연구 대신 그가 나치당원이었고 V-2 로켓 개발 과정에서 강제로 수감자의 노동력을 착취했다는 점을 강조하기 바빴다. 이로 인해 초반 우주기술 경쟁에서 소련에 뒤처지기는 했지만, 그의 놀라운 업적에 가려졌을지도 모를 윤리적 문제가 세상에 드러날 수 있었다. 인류가 우주를 탐사할 수 있게 된 수많은 원동력이 폰 브라운으로부터 나온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는 많은 수감자에게 강제 노역과 굶주림으로 가득한 지옥 같은 삶을 선사했다. 그렇다고 조국을 위해 영혼을 바친 과학자도 아니었다. 나치가 세상을 주도하던 시절에는 히틀러 곁에서 융숭한 대접을 받았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독일의 희망이라며 모두가 그를 찾았다. 전쟁 막바지에는 깊은 고민 없이 자신의 나라가 애지중지하던 과학기술을 송두리째 적국인 미국에 바쳤다. 많은 이가 비난하자, 그는 자신의 과학은 가치로부터 자유로우며, 어떤 삼촌을 위해 일하든 오직 부자 삼촌을 원할 뿐이라고 말했다.
천재 로켓 공학자는 그저 로켓과 우주를 너무 사랑했으며, 한순간도 쉬지 않고 연구하기 위한 최적의 방법을 구상했을 테다. 하지만 슬프게도 그의 목적은 인류 진보가 아니라, 자신이 보고 싶은 미래를 마주하는 것뿐이었다. 어쩌면 이기적인 그의 과학은 전혀 자유롭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궤도는…
연세대 천문우주학과 학부 및 대학원을 졸업하고 한국천문연구원 우주감시센터와 연세대 우주비행제어연구실에서 근무했다. ‘궤도’라는 예명으로 팟캐스트 ‘과장창’, 유튜브 ‘안될과학’과 ‘투머치사이언스’를 진행 중이며, 저서로는 ‘궤도의 과학 허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