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2일 서울 청계천 광교갤러리에서 숙명여대 북한인권동아리 하나(HANA)와 북한민주화네트워크 주최로 열린 북한인권사진 전시회 ‘북녘에는 봄이 오지 않는다’를 찾은 시민들이 북한 김정일, 김정은 부자 사진 등을 관람하고 있다.
임헌조 선진통일연합 공동대표는 한 우파 시민단체 행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SK, 포스코, 롯데, 한국전력공사, 가스공사, 석유공사, 토지공사는 노무현 정부 때 좌파 단체에 거액의 후원금을 지원했으면서 (정권이 바뀐 후에도) 우파 단체에는 단 1원도 지원하지 않습니다.”
가난한 우파, 부유한 좌파
노무현 정부 때 대기업은 진보 성향 시민단체의 후원자 구실을 했다. 시민단체 전·현직 간부를 사외이사로 영입해 급여를 준 곳도 있다. 한국전력공사를 비롯한 공기업에도 시민단체 활동가가 둥지를 틀었다. 자유주의연대 창립 멤버인 한 인사의 하소연.
“박원순 서울시장 후보가 포스코 사외이사로 일할 때 포스코 돈으로 시민단체 간부가 떼로 해외연수를 다녀왔어요. 포스코가 정권에 잘 보이려고 좌파 및 진보 성향 활동가만 집중적으로 외국에 보낸 거죠. 반면 우파 단체에 후원금을 내놓는 대기업은 별로 없습니다. 정권이 바뀐 뒤에도 사정이 똑같아요. 좌파 단체로 흘러간 돈은 시장경제, 자유주의를 뒤흔드는 데 쓰였습니다. 이념 전쟁터에서 우파는 실탄이 없는 겁니다. 뭔가 거꾸로 돌아가는 것 아닌가요.”
포스코청암재단 돈으로 미국, 캐나다에서 공부한 시민단체 인사가 30명이 넘는다. 해외연수를 다녀온 이들의 소속 단체는 참여연대, 함께하는 시민행동, 환경운동연합, 환경정의 등이다. 박원순 후보 캠프의 핵심 격인 하승창 기획단장도 포스코 협찬으로 해외연수를 다녀왔다.
좌파 시민단체가 덩치를 키운 것은 노무현 정부 때다. 정부 보조금, 대기업 후원금은 좌파 어젠다를 퍼뜨리는 뒷배로 활용했다. 시민단체 출신 인사가 현실 정치에 참여하는 일도 잦았다. 유석춘 연세대 교수가 펴낸 ‘참여연대보고서’는 1994년 참여연대 발족 이후 전·현직 임원 531명 중 150명(36.1%)이 청와대, 정부, 각종 위원회에 진출했다고 적었다.
이명박 정부와 우파 시민단체의 관계는 어떨까. 홍진표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은 ‘시대정신’ 출신이다.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가 이 그룹의 이데올로그. 홍 상임위원은 북한 민주화운동을 비롯한 우파 시민운동에 관여했다. 이명박 정부는 2008년 6월 그를 대통령실 시민사회비서관에 내정했다가 좌파세력뿐 아니라 우파세력 일부에서도 반대하고 나서자 돌연 인사를 철회했다. 일부 좌파는 그를 맹목적 극우라고 몰아붙였다.
“대선까지 숨 가쁘게 달려온 터라 휴식을 취하려고 필리핀에 3개월가량 가 있을 생각이었어요. 영어도 배우고, 그러려고 했죠. 사글셋방도 빼고 짐은 이삿짐센터에 맡겨놓았고요. 이틀 후 출국 예정인데, 류우익 실장으로부터 제안이 왔어요. 선거캠프에 있었다거나 정권 창출에 기여한 내부자가 아닌 처지라서 고민을 좀 했습니다. 안병직 선생께 의논드렸더니, 적극적으로 ‘해라’ 하시더군요. 그래서 아들 얼굴만 보고 1주일 남짓 만에 필리핀에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일을 못 맡게 됐죠. 허탈했습니다만….”
‘시대정신’을 비롯해 자유주의 이념을 강조하는 그룹은 이명박 정부에서 버림받았다고 생각한다. 정부기관에 자리 잡은 한 뉴라이트 출신 인사가 목소리를 높인다.
“이념, 철학이라곤 없는 이익집단이 요직을 나눠 먹은 거 아닌가요. 영포라인, 선진국민연대가 핵심을 틀어쥐고, 서울시 인맥이 곁다리로 떡을 나누고….”
그는 한숨을 내쉬면서 이렇게 덧붙인다.
2008년 7월 3일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회원들이 시국선언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은 차관급 직위지만 요직과는 거리가 있다. 홍 상임위원은 이명박 정부에 자리 잡은 ‘몇 안 되는’ 우파 시민단체 출신 인사다. 우파 시민단체에 몸담았다 청와대에 들어간 인사로는 올해 1월 임명된 김영호 통일비서관이 지금껏 유일하다.
이명박 정부 출범 후 우파 시민단체 출신이 잘나간다는 통념은 이렇듯 사실과 다르다. 선출직인 국회의원을 제외하면 홍 상임위원, 김 비서관, MBC 대주주인 방송문화진흥회 최홍재 이사(전 공정언론시민연대 사무처장) 정도가 수혜를 받았다. 정부 실세와 우파 시민단체 인사의 연도 거의 없다.
아스팔트 우파 “오히려 우릴 미워해”
사정이 이래서인지 우파 시민단체 인사가 이명박 정부를 바라보는 시각은 싸늘하다 못해 냉담하다.
“한나라당이 근본적으로 변화하지 않는다면 홍준표 대표는 한나라당의 마지막 대표가 되고 한나라당이 문을 닫을 수밖에 없습니다.”(임헌조 선진통일연합 공동대표)
“민주당이 내놓은 복지 포퓰리즘을 따라 하는 ‘미투(me too·흉내 내기)’ 전략으로 2등은 할 수 있어요. 2등은 야당이 되는 거죠.”(이재교 ‘시대정신’ 상임이사)
아스팔트 우파라고 스스로를 부르는 한 시민단체 간부는 이렇게 말한다.
“필요할 때만 우리를 찾습니다. 정권 창출을 위해 그렇게 노력했는데…. 노무현 정부가 좌파 단체를 얼마나 많이 지원했습니까. 행정안전부 보조금을 좌파 단체가 싹쓸이하지 않았나요. 정부, 기업에서 돈 받아 몸집을 불렸죠. 이명박 정부가 좌파한테 돈이 못 가게는 했어요. 거기까진 잘한 일이에요. 그런데 우파 단체를 지원해주질 않아요. 오히려 경원시합니다. 우파 단체 중 보조금을 가장 많이 받은 곳이 연간 6000만 원입니다. 대부분은 받았다고 해도 2000만 원 수준이에요. 그나마도 보조금을 받은 곳은 사정이 낫죠. 우파 정부가 우파 단체를 나 몰라라 하는 겁니다. 그러니 다들 등을 돌리죠. 아스팔트 위에서 자유와 시장의 가치를 외친 우리를 외면합니다.”
그는 우파 시민단체 리더 몇 명의 이름을 거명하면서 이들 모두가 이명박 정부에 등을 돌렸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이명박 정부가 우파 시민단체를 나 몰라라 한 것은 아니다. 보수단체 사이에선 “이명박 정부가 우리를 버렸다”는 시각이 지배적이지만, 이들의 싸늘한 시각은 정부 도움이 당초 기대에 미치지 못해서인 측면도 있다.
이명박 정부가 포스코를 비롯한 일부 대기업의 시민단체 지원 내용을 탐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원순 변호사가 정치 참여를 결심한 데는 ‘국가정보원이 시민단체에 후원금을 낸 기업에 압력을 넣어 후원금을 끊도록 했다’고 생각한 것도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진보 성향 시민단체 중 덩치가 작은 곳은 이명박 정부 출범 후 사정이 곤란해졌다. 정부의 직간접 지원이 끊겨서다.
노무현 정부 때 보조금을 받던 단체가 보조금 수령 단체 목록에서 빠진 대신 우파 단체가 지원금을 받았으나 그 액수는 미미한 수준이었다. 국민운동본부, 뉴라이트안보연합, 시대정신, 자유시민연대, 선진화개혁추진회의, 선플달기국민운동본부, 국학원, 한국미래포럼, 무궁화문화포럼, NGO환경보호국민운동본부, 6·25남침피해유족회, 애국단체총협의회, 해병대전우회안전봉사문화단체, 귀한동포연합총회, 자유대한지키기국민운동본부 등이 2000만~6000만 원을 받았다.
요컨대 노무현 정부 때처럼 시민단체 의견을 정책 수립에 반영하는 것도 아닌 데다, 시민단체 지원도 인색하다는 게 우파 시민단체 인사의 주장이다.
정권에 따라 정부가 지원하는 시민단체가 달라지는 것을 어떻게 봐야 할까. 한국은 시민운동 역사가 짧다. 서구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있었다. 고계현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사무총장은 이렇게 말한다.
“정권은 시민단체가 외각에서 친정부 목소리를 내주기를 원하죠. 보조금 등을 통해 노골적으로 그런 목소리를 만들려고도 하고요. 1970년대 중반까지는 서구도 비슷했습니다. 공익적 시민단체는 정치적 중립, 그러니까 정파적으로 객관적이어야 합니다. 시민단체와 정치단체를 구분해야 해요. 정치에 개입하려면 미국의 무브 온(move on)이나 티 파티(tea party)처럼 스스로 정파성을 띤 정치단체를 표방하는 것이 옳습니다. 정치단체가 시민단체인 양 행동해서는 안 되죠.”
‘정부 돈 = 먼저 보는 사람이 임자’라는 말이 있다. 감사원이 2006∼2008년 3년 동안 연간 8000만 원 넘는 보조금을 지원받은 543개 시민단체를 감사한 결과, 상당수 단체에서 횡령 의혹을 적발했다. 좌파 진영 최대 문화예술단체인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도 그에 포함됐다.
“시민단체까지 밥그릇 싸움”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와 야5당으로 구성된 ‘오세훈 심판! 무(상급식 실현)·서(울 한강)·운(하 반대) 시민행동 준비위원회’가 7월 11일 서울시의회 의원회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무상급식 반대 주민투표 청구 서명 과정에서 불법 사례가 발견됐다고 주장하고 있다.
“사업비의 많은 금액이 언론광고 쪽에 치우친 반면, 대학생을 대상으로 실시했던 미래 국가 지도자 양성 계획은 보고를 하지 않아 실행 여부를 판단하기 어렵다. 비영리 민간단체의 공익활동 지원사업인 만큼 논란이 되지 않는 중립적인 내용을 통해 다양한 세대와 계층의 국민이 헌법의 올바른 정신을 인식하고 함양할 수 있도록 대대적인 수정 및 편성이 요구된다.”(주간동아 780호 ‘보수단체에만 척척 묻지마 보조금’ 제하 기사 참조)
정부 지원으로 ‘먹고, 살고, 운동하는’ 우파 시민단체 또한 없지 않다. 보조금마저 없으면 운영 자체가 어렵다. 청와대 관계자는 노무현 정부 때처럼 지원해주지 않느냐는 비판은 어폐가 있다고 말한다.
정치 지형 변화에 따라 특정 성향 시민단체가 살찌거나 핍박받는 것은 한국 시민사회의 ‘우울한 현실’이다. 정권을 누가 쥐느냐에 따라 시민단체가 누리는 이권도 달라진다. 그뿐이 아니다. 노무현 정부 때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가 발행하는 기관지를 제작한 곳은 ‘민족21’을 만드는 좌파 단체였다. 이명박 정부 출범 후 ‘민족21’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조사를 받았다. 이명박 정권 출범 직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기관지 제작 대행 업무는 ‘민족21’을 발행하던 데서 뉴라이트 계열의 ‘엔케이데일리’로 넘어갔다. 이 같은 사례가 비일비재하다.
욕하면서 배운다고, 일부 우파 시민단체도 정권이 바뀐 후 일부 좌파 시민단체의 나쁜 점을 따라 한다. 기업이 우파 시민단체의 협찬 요구에 혀를 내두를 때가 많다. 한 대기업 임원은 이렇게 말한다.
“노무현 정부 때 기업이 시민단체를 지원한 것은 ‘보험에 가입하는’ 측면도 없지 않았습니다. 사회책임경영(CSR)이나 공익사업을 맡은 부서에선 어차피 돈을 써야 해요. 우파 단체는 세련되지 못했어요. 검증된 단체도 많지 않고요. 명목에 부합해야 돈을 줄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정치 집회 비슷한 행사에 기업이 돈을 대기는 어렵습니다. 요즘엔 시민단체까지 밥그릇 싸움을 하는 것 같아요.”
시민단체가 밥그릇 싸움을 한다는 의견은 폄훼라고 할 수 있지만 일각의 진실은 담았다. 고계현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사무처장은 이 같은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국가가 시민단체를 직접 지원하는 것은 문제가 많습니다. 시민단체가 일정 액수를 모금하면 정부가 같은 액수를 지원하는 매칭 펀드 형식이 바람직합니다. 공공재단이 지원하게 하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고요. 공익적 시민단체라고 자칭하면서 활동은 공익적 시민단체 원칙에 맞지 않게 하는 것은 시민을 속이는 겁니다. ‘정권 지지활동’ ‘특정후보 지지활동’은 시민운동의 정파적 중립성 유지 원칙과는 맞지 않아요. 돈으로 시민단체를 우군으로 만들려는 정부도 잘못이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