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트는 타자에게 요구되는 기본기지만 의외로 번트를 잘 대는 선수는 많지 않다.
야구가 사람 중심의 스포츠라는 사실은 자기희생(sacrifice)을 하거나 또 요구할 수 있는 유일한 종목이란 점에서도 확인 가능하다. 축구, 농구는 동료에게 도움(assist)은 줄 수 있지만 희생을 요구하거나 행할 수는 없다.
야구에서 자기희생은 희생번트, 희생플라이 등 희생타로 표현된다. 야구는 자신을 버리고 팀을 위해 희생한 것을 보상하려고 타율 계산 시 희생타는 제외해 타자가 손해 보지 않도록 하는 합리적 기록 체계도 갖췄다. 야구를 인간적이면서도 체계적인 스포츠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희생 의지로 한 행위임에도 결과가 좋지 않으면 그 책임은 고스란히 타자에게 돌아가는 탓에 때론 냉혹하다는 비난을 산다. 희생번트를 시도하다 실패하면 타자는 타율에서 손해를 본다.
노아웃 또는 원아웃 상황에서 3루 주자를 불러들이는 희생플라이(3루 주자가 태그업 뒤 득점에 성공한 경우)가 타구를 의도적으로 띄우는 소극적 희생이라면, 희생번트는 선행주자가 진루하도록 일부러 타구를 굴리는 적극적 희생이라고 볼 수 있다.
“박진감 떨어뜨려 vs 적극 공격 수단”
그중 (희생)번트 가치에 대한 논란은 야구계의 오랜 갑론을박 주제였다. 혹자는 번트(이 경우 대부분 보내기 번트, 즉 희생번트를 얘기한다)가 야구의 다양성과 박진감을 떨어뜨린다고 말하는 반면, 다른 한쪽에선 강공보다 오히려 적극적인 공격 수단이라고 주장한다.
번트는 희생번트, 스퀴즈번트, 드래그번트, 푸시번트, 페이크 앤드 슬러시 등 상황과 대는 방법에 따라 종류가 다양하다. 스퀴즈번트는 주자가 3루에 있을 때 득점을 전제로 하는 희생번트다. 짜내기라고도 하며, 자신의 아웃카운트를 소모하면서 선행주자의 진루를 돕는 행위다. 다른 번트는 타자와 주자 모두 살기 위해 시도하는 번트다.
번트는 타자에게 요구되는 가장 큰 기본기다. 어느 상황에서든 감독 지시에 따라 댈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의외로 번트를 잘 대는 선수는 많지 않다. “평생 야구만 한 사람이 번트도 못 한다”고 구박하기 쉽지만, 번트에는 고도의 능력이 필요하다. “잘 치는 선수가 번트도 잘 댄다”는 말이 있다. 롯데 이대호는 1년에 거의 한 번도 희생번트를 대는 일이 없지만, 2008년 베이징올림픽 본선에서 깜짝 희생번트를 성공시켰다.
야구계에선 희생번트를 축구 승부차기와 종종 비교한다. 쉬워 보이지만, 타자 편에선 공을 차는 키커처럼 심적 부담을 안고 나서야 한다. 잘해야 본전이다. 더구나 시속 140km에 가까운 공에 번트를 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희생번트는 아웃카운트 하나를 버리고 선행주자의 진루를 노리는 것이지만, 노아웃 1루에서의 득점 확률이 원아웃 2루일 때보다 높다는 한 통계에서 보듯, 반드시 득점 가능성을 높인다고 볼 수는 없다. 일각에선 아웃카운트를 하나 버리고 나머지 두 아웃카운트에서 득점을 노리는 것이 확률상 바보 같은 짓이라며 극단적으로 비난하기도 한다. 10번 중 7번을 실패하고 3번만 안타를 쳐도 ‘3할 타자’로 추앙받는 게 야구이기 때문이다. 특히 선수의 창의적 플레이를 저해하고, 지켜보는 팬에게 큰 즐거움을 주지 못한다는 측면이 존재한다.
넥센 히어로즈의 송지만 선수.
일본 프로야구가 선호하는 ‘스몰볼’이 번트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과 달리, 메이저리그 스타일의 ‘빅볼’은 희생번트보다 강공을 통한 점수 획득을 추구한다. 김경문 NC 다이노스 감독은 두산 사령탑 시절 빅볼을 구사했으며, 제리 로이스터 전 롯데 감독도 대표적인 빅볼 신봉자였다.
희생번트에 대한 좋지 않은 평가에도 사령탑 대부분은 1점이 중요한 상황일 경우, 희생번트 작전을 활용한다. 승부처에서 번트 실패는 경기 흐름을 끊고 패배의 빌미를 제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위험부담을 갖는다. 아웃카운트 하나를 버리면서까지 작전을 시도했지만 실패할 경우 그 충격은 예상보다 훨씬 크다. 희생번트 작전을 잘 쓰지 않는 감독은 “번트에 실패할 확률, 그리고 아웃카운트를 하나 버린다는 점까지 감안한다면 희생번트의 가치는 의외로 크지 않을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1점의 가치가 더 커지는 포스트시즌 같은 큰 게임에서는 평소보다 희생번트 작전을 더 자주 활용한다. 물론 자주 쓴다고 더 많이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희생번트는 성공했을 때 매력적인 작전이 되지만, 반대의 경우 패착이 되기도 한다.
경기에 따라 각기 다른 맛 지녀
‘빅볼’을 구사하는 로이스터 전 롯데 감독(왼쪽)과 ‘스몰볼’을 추구하는 김성근 전 SK 감독은 번트에 대해서 극명한 대조를 이뤘다.
정규시즌보다 포스트시즌에서 상대적으로 번트 실패가 자주 발생한 데는 ‘몸 쪽 높은 공’에 그 이유가 있다. 단기전의 특성상 페넌트레이스와 달리 각 팀은 ‘현미경 야구’를 통해 상대를 분석하고 달려든다. 정규시즌에서 번트 상황에 몰리면 ‘일부러 대주고’ 아웃카운트를 하나 벌고 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1점의 중요성이 더 큰 단기전에선 상대의 번트 시도 의사가 확인되면 이를 원천봉쇄하기 위해 달려든다. 조금 위험하더라도 번트 실패를 유도하는 투구와 수비 패턴을 형성하고, 투수는 몸 쪽 높고 빠른 공으로 승부한다.
타자는 번트를 하려면 상체를 구부려야 하는데, 이때 갑작스럽게 몸 쪽 높은 공이 들어오면 반사적으로 상체를 벌떡 세울 수밖에 없다. 방망이를 미처 빼지 못할 경우 타구 방향은 타자가 의도한 것과 다르게 갈 가능성이 높다. 준PO 1차전에서 KIA 투수 윤석민과 포수 차일목이 SK 최정의 의도를 간파해 순간적으로 공 배합을 바꿔 병살타를 유도한 것이 좋은 예다.
희생번트에 대한 가치 판단은 절대적일 수 없다. 상황에 따라 다른 데다, 게임의 전체적인 결과 측면에서 접근해야 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 행위에는 각 사령탑의 철학이 담겨 있어, 경기에 따라 각기 다른 맛을 지닌다. 이 같은 사실만으로도 번트는 충분히 매력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