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상업 사진을 그만 찍겠다고 선언한 김중만(57) 씨는 2년 동안 한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자연을 렌즈에 담았다. 인물이 아닌 자연 사진이라니, 그에게도 대중에게도 낯선 일이다. 무엇보다 익숙지 않은 건 7년 동안 고수해온 레게 머리가 짧은 커트 머리로 변했다는 것. 그동안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서울 강남의 한 스튜디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창가 쪽에 수북이 쌓인 사진 자료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주제별로 구분된 자료에는 ‘나무 2010년 5월(밀착)’ ‘돌 2009년 6월(밀착)’ ‘바다 2008년 9월(밀착)’ 식으로 이름표가 달렸다. 2007년 연예 및 패션 등 상업 사진을 찍지 않고 예술 사진을 시작하겠다고 선언한 그의 작업실 풍경이다. 스튜디오 곳곳에는 아프리카 내음이 나는 소품이 널렸고, 구관조 3마리가 낯선 이의 방문을 주인에게 고하듯 재잘댔다. 일본으로 보낼 작품집에 한 장 한 장 서명하고 있던 그는 낮고 굵은 목소리로 객을 반겼다. 그런데 앗!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레게 머리가 짧고 단정한 커트 머리로 변해 있었다.
▼ 7년이나 고수해온 헤어 스타일을 바꿨네요. 큰 심적 변화가 있었던 건가요.
“다소 거만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사람들이 너무 알아봐서요. 그게 불편해요. 어디에 가든 거의 10m 전방에서 제 이름이 들려요. 연예인도 아니고, 카메라 앞에 서는 걸 별로 좋아하지도 않아요. 카메라 뒤에 있는 걸 좋아하죠. 어느 시점부터 좀 불편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자유로워지고 싶어서 6월 24일 제 손으로 머리를 잘랐어요.”
그 뒤 미용실에서 살짝 머리를 다듬고 그가 향한 곳은 홍대 타투 숍이었다. 인생에 중차대한 일이 벌어질 때마다 문신을 새기는 그는 이번에는 오른쪽 팔뚝에 2011624라는 숫자를 새겼다. 그의 몸에는 20여 년 동안 새겨온 20여 개 문신이 있다.
“김대중 대통령이 서거했을 때, 천안함이 침몰했을 때… 주로 마음이 아플 때 문신을 해요.”
▼ 얼마 전 예슬 사진 전시회를 열었는데 반응은 어땠나요.
“사람들의 반응은 별로 관심 없어요. 상업 사진을 그만 찍겠다고 선언한 후 ‘한국의 재발견’이라는 주제로 전국을 다니며 찍었죠. 그 안에 전통 구조물, 계곡, 바다, 나무 등 여러 주제가 있어요. 이번엔 돌 시리즈만 선보였어요. 돌이 주는 여러 철학적 의미를 담고 싶었는데, 돌처럼 모진 역경과 풍파 속에서도 아무 소리 없이 견뎌내는 게 우리 민족의 마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나이 예순에 나의 뿌리와 한국인 깨달아
▼ 갑자기 상업 사진을 접겠다고 선언한 이유는 뭔가요.
“쉰 살이 넘으니 더는 소모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진은 육체노동이고, 사진가는 일용직 노동자예요. 지금은 더 빨리 이 일을 시작할 걸 그랬구나 후회하고 있어요.”
상업 사진을 포기하자 수입이 급격히 줄었다. 일당 2000만 원을 받으며 한 해 17억 원 매출을 올리던 그가 2008년에는 8000만 원밖에 벌어들이지 못했다. 직원 월급 주고 남는 돈으로 스튜디오 살림을 겨우겨우 꾸려갔다. 다행히 해가 갈수록 수입이 조금씩 늘어나 4년째인 올해는 3억 원 정도를 벌 것 같다고 한다.
▼ 많이 벌다 적게 벌면 당장 생활이 불편할 것 같은데요.
“지금껏 사진을 하면서 재테크를 한 적이 한 번도 없어요. 돈이 생기는 대로 장비 사고, 프린터 사고…. 저는 오로지 사진밖에 몰라요. 어떻게 하면 지금 필요한 사진 장비를 구입할지, 필름은 어디에서 어떻게 구할지가 주 관심사죠. 물론 돈 굴리는 재주가 없는 건 자랑이 아니지만요.”
▼ 부인은 불만이 없나요.
“다행히 네오 엄마는 그런 걸로 바가지를 긁지 않아요. 돈이 있으면 쓰고, 없으면 안 쓴다는 주의도 저와 같고요. 지금껏 아내나 저나 사고 싶은 게 있으면 사고, 없으면 안 사고 그랬어요. 상업 사진을 할 때와 안 할 때 가장 큰 차이가 뭐냐면, 시계를 안 산다는 거예요. 제가 시계를 무척 좋아하거든요. 사고 싶은 시계가 이제 하나 남았는데 아직 안 샀어요. 4년 전만 해도 길거리를 지나가거나 잡지를 보다가 마음에 드는 시계가 있으면 바로 매장에 전화해 주문하곤 했어요. 3년 전 포르쉐 자동차를 샀는데, 판단을 잘못해서 돈 잘 벌 때 살 것을 괜히 돈 없을 때 사서 매달 400만 원씩 갚느라 엄청 고생했어요(웃음).”
▼ 예술을 하기로 하고 가장 처음 찍은 사진은 뭔가요.
“한국관광공사에서 엽서를 찍어달라는 의뢰가 들어왔어요. 그 덕에 새로운 세상을 만나기 시작했죠. 그동안 저를 비롯한 많은 사람이 우리나라를 너무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봤구나 싶었어요. 우리가 동남아시아 등 후진국을 여행할 때 아무리 후미지고 지저분한 광경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잖아요. 그런데 정작 내 나라 내 땅은 조금만 더럽고 촌스러워도 금방 고개를 돌려버리더군요. 저 역시 그랬고요. 그런 마음을 바꿔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반성하는 마음으로 1년을 돌아다녔고, 그다음에는 문화재청에서 의뢰가 들어와 또 한국을 찍을 수 있는 기회가 생겼어요. 그 후로는 어떤 기관의 도움 없이 혼자 다니며 작업하고 있어요.”
▼ 자연 사진은 인물 사진과 비교해 어떤 감흥을 주나요.
“저는 여태껏 ‘나는 누구인가’를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중학생 때 정부 파견 의사인 아버지를 따라 아프리카로 떠났고, 고등학교와 대학을 모두 프랑스에서 다녔어요. 한국에 와서는 끊임없이 톱스타들과 패션 사진을 찍으면서 ‘나는 세계인’이라는 생각으로 살았죠. 저의 정체성에 대해 잠시도 고민해본 적이 없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한국이라는 나라 자체에 별 관심이 없었어요. 그런데 자연을 찍으면서 한국을 재발견했고, 저 자신이 누구인지 되돌아보게 된 거죠. 나의 뿌리는 어디인지, 돌아갈 곳이 어디인지를 고민한 거예요. 결국 저는 한국인인데 말이죠. 나이 예순이 다 돼 이제야 그걸 깨달았어요. 그것이 제게는 말로 다 설명하기 힘든 새로운 경험이에요.”
▼ 스튜디오에 있는 스태프 중 외국인도 눈에 띄네요. 제자를 뽑는 기준이 따로 있나요.
“저 친구는 미국인이에요. 보통 스튜디오에서 일하려면 자신의 포트폴리오를 제출하는데, 저는 그건 그렇게 중요하게 보지 않아요. 오로지 열정이죠. 죽어서 관 속까지 카메라를 들고 갈지 안 들고 갈지만 봐요(웃음). 얼마 전 프랑스에 살던 큰아들 에니가 사진을 배우고 싶다며 저를 찾아왔어요. 처음 월급은 40만 원이고 6개월마다 올려주는데 괜찮겠느냐고 했더니 상관없다며 열정을 보여서 일하게 했어요. 아들이라고 특별대우는 절대 없어요. 이쪽 바닥은 서열이 중요해서 아들도 스튜디오 청소부터 하고 있어요.”
그는 두 번 이혼하고 세 번 결혼했다. 프랑스인인 첫 부인과 이혼하고 신상옥 감독의 전 부인이던 영화배우 오수미 씨와 재혼해 화제를 뿌렸다. 더구나 그는 신 감독과 오씨 사이에서 태어난 두 아이를 직접 키우는 남다른 부정을 보였다. 오씨와 이혼한 후 1988년 당시 톱모델이던 이인혜 씨와 결혼해 90년 아들 네오를 얻었다. 그는 프랑스에 살던 큰아들 에니가 자신에게 사진을 배우겠다고 했을 때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 그동안 정신적, 경제적으로 아들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그에게 늦게나마 기회가 찾아왔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프랑스인인 전 부인도 좋아하기는 마찬가지.
▼ 큰아들 에니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에니라는 이름은 저와 에니 엄마가 좋아하던 레즈바니라는 이란 작가의 이름에서 따온 거예요. 저와는 프랑스어로 대화하지만 한국어를 배우겠다는 의지가 강하고, 사진은 이미 오래전부터 하고 싶었다고 하더군요. 현재 홍대 근처 오피스텔에 사는데 막내 네오가 사는 곳에서 5분밖에 안 걸려요. 네오도 사진을 전공해 두 아이가 자주 만나 친하게 지내요. 아주 감사한 일이죠. 제가 자식이 아들 셋에 딸 하나인데, 모두 똑같이 대해요. 방학 때는 에니도 불러 들여 다 데리고 있었어요. 그래서인지 아이들끼리 사이가 무척 좋아요. 아버지로서 아이들과 시간을 많이 보내지 못했는데도 아이들이 다 저를 좋아하고 잘 따라요. 복 받은 거죠.”
사진 역사에 이름 남기는 것이 목표
그는 프랑스 니스 국립응용미술대에서 영화를 전공하다 사진과 만났다. 어느 날 사진하는 친구를 따라 암실에 들어갔다가 이내 사진의 매력에 빠졌다. 하지만 사진은 그에게 많은 시련을 안겨줬다. 1980년대에는 한국 국적을 포기했다는 이유로, 또 프랑스 국적을 가지고 전시회를 열었다는 이유로 두 번이나 강제 추방을 당했고, 절망감을 이기지 못해 미국에서 1년 동안 마약에 빠져 지냈다. 1993년에도 마약 복용 혐의로 구속돼 두 달 동안 형을 살았고, 정신병원에도 입원했다.
▼ 한국을 원망했겠군요.
“상당히 보수적이고 폐쇄된 사회에서 저 같은 사람이 나타났으니 곱게 볼 리 없었죠.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일을 겪으면서 성숙해진 것 같아요. 마약을 안 했는데 했다며 정신병원에 감금됐을 때는 출강하던 대학에서도 잘리고, 어려움이 많았어요. 하지만 정신병원에 가보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돈 주고도 갈 수 없는 곳이죠. 그곳에서 사흘 정도 있으니까 ‘대한민국이 나를 진짜 예술가로 만들려고 작심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웃음).”
▼ 또 다른 변신 계획은 없나요.
“글쎄요. 앞으로 사진 역사의 한 페이지에 이름을 남기는 게 목표라면 목표예요. 물론 생전에 이루기 힘들 수도 있고, 영원히 불가능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 꿈을 포기하지 않고 살 거예요. 37년 동안 단 하루도 사진을 찍지 않은 날이 없는데, 앞으로도 끊임없이 새로운 걸 찍으며 살고 싶어요.”
서울 강남의 한 스튜디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창가 쪽에 수북이 쌓인 사진 자료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주제별로 구분된 자료에는 ‘나무 2010년 5월(밀착)’ ‘돌 2009년 6월(밀착)’ ‘바다 2008년 9월(밀착)’ 식으로 이름표가 달렸다. 2007년 연예 및 패션 등 상업 사진을 찍지 않고 예술 사진을 시작하겠다고 선언한 그의 작업실 풍경이다. 스튜디오 곳곳에는 아프리카 내음이 나는 소품이 널렸고, 구관조 3마리가 낯선 이의 방문을 주인에게 고하듯 재잘댔다. 일본으로 보낼 작품집에 한 장 한 장 서명하고 있던 그는 낮고 굵은 목소리로 객을 반겼다. 그런데 앗!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레게 머리가 짧고 단정한 커트 머리로 변해 있었다.
▼ 7년이나 고수해온 헤어 스타일을 바꿨네요. 큰 심적 변화가 있었던 건가요.
“다소 거만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사람들이 너무 알아봐서요. 그게 불편해요. 어디에 가든 거의 10m 전방에서 제 이름이 들려요. 연예인도 아니고, 카메라 앞에 서는 걸 별로 좋아하지도 않아요. 카메라 뒤에 있는 걸 좋아하죠. 어느 시점부터 좀 불편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자유로워지고 싶어서 6월 24일 제 손으로 머리를 잘랐어요.”
그 뒤 미용실에서 살짝 머리를 다듬고 그가 향한 곳은 홍대 타투 숍이었다. 인생에 중차대한 일이 벌어질 때마다 문신을 새기는 그는 이번에는 오른쪽 팔뚝에 2011624라는 숫자를 새겼다. 그의 몸에는 20여 년 동안 새겨온 20여 개 문신이 있다.
“김대중 대통령이 서거했을 때, 천안함이 침몰했을 때… 주로 마음이 아플 때 문신을 해요.”
▼ 얼마 전 예슬 사진 전시회를 열었는데 반응은 어땠나요.
“사람들의 반응은 별로 관심 없어요. 상업 사진을 그만 찍겠다고 선언한 후 ‘한국의 재발견’이라는 주제로 전국을 다니며 찍었죠. 그 안에 전통 구조물, 계곡, 바다, 나무 등 여러 주제가 있어요. 이번엔 돌 시리즈만 선보였어요. 돌이 주는 여러 철학적 의미를 담고 싶었는데, 돌처럼 모진 역경과 풍파 속에서도 아무 소리 없이 견뎌내는 게 우리 민족의 마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나이 예순에 나의 뿌리와 한국인 깨달아
2000년 열린 ‘아프리카의 여정전’ 작품 中.
“쉰 살이 넘으니 더는 소모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진은 육체노동이고, 사진가는 일용직 노동자예요. 지금은 더 빨리 이 일을 시작할 걸 그랬구나 후회하고 있어요.”
상업 사진을 포기하자 수입이 급격히 줄었다. 일당 2000만 원을 받으며 한 해 17억 원 매출을 올리던 그가 2008년에는 8000만 원밖에 벌어들이지 못했다. 직원 월급 주고 남는 돈으로 스튜디오 살림을 겨우겨우 꾸려갔다. 다행히 해가 갈수록 수입이 조금씩 늘어나 4년째인 올해는 3억 원 정도를 벌 것 같다고 한다.
▼ 많이 벌다 적게 벌면 당장 생활이 불편할 것 같은데요.
“지금껏 사진을 하면서 재테크를 한 적이 한 번도 없어요. 돈이 생기는 대로 장비 사고, 프린터 사고…. 저는 오로지 사진밖에 몰라요. 어떻게 하면 지금 필요한 사진 장비를 구입할지, 필름은 어디에서 어떻게 구할지가 주 관심사죠. 물론 돈 굴리는 재주가 없는 건 자랑이 아니지만요.”
▼ 부인은 불만이 없나요.
“다행히 네오 엄마는 그런 걸로 바가지를 긁지 않아요. 돈이 있으면 쓰고, 없으면 안 쓴다는 주의도 저와 같고요. 지금껏 아내나 저나 사고 싶은 게 있으면 사고, 없으면 안 사고 그랬어요. 상업 사진을 할 때와 안 할 때 가장 큰 차이가 뭐냐면, 시계를 안 산다는 거예요. 제가 시계를 무척 좋아하거든요. 사고 싶은 시계가 이제 하나 남았는데 아직 안 샀어요. 4년 전만 해도 길거리를 지나가거나 잡지를 보다가 마음에 드는 시계가 있으면 바로 매장에 전화해 주문하곤 했어요. 3년 전 포르쉐 자동차를 샀는데, 판단을 잘못해서 돈 잘 벌 때 살 것을 괜히 돈 없을 때 사서 매달 400만 원씩 갚느라 엄청 고생했어요(웃음).”
▼ 예술을 하기로 하고 가장 처음 찍은 사진은 뭔가요.
“한국관광공사에서 엽서를 찍어달라는 의뢰가 들어왔어요. 그 덕에 새로운 세상을 만나기 시작했죠. 그동안 저를 비롯한 많은 사람이 우리나라를 너무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봤구나 싶었어요. 우리가 동남아시아 등 후진국을 여행할 때 아무리 후미지고 지저분한 광경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잖아요. 그런데 정작 내 나라 내 땅은 조금만 더럽고 촌스러워도 금방 고개를 돌려버리더군요. 저 역시 그랬고요. 그런 마음을 바꿔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반성하는 마음으로 1년을 돌아다녔고, 그다음에는 문화재청에서 의뢰가 들어와 또 한국을 찍을 수 있는 기회가 생겼어요. 그 후로는 어떤 기관의 도움 없이 혼자 다니며 작업하고 있어요.”
2007년 김중만이 촬영한 나미브 사막.
“저는 여태껏 ‘나는 누구인가’를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중학생 때 정부 파견 의사인 아버지를 따라 아프리카로 떠났고, 고등학교와 대학을 모두 프랑스에서 다녔어요. 한국에 와서는 끊임없이 톱스타들과 패션 사진을 찍으면서 ‘나는 세계인’이라는 생각으로 살았죠. 저의 정체성에 대해 잠시도 고민해본 적이 없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한국이라는 나라 자체에 별 관심이 없었어요. 그런데 자연을 찍으면서 한국을 재발견했고, 저 자신이 누구인지 되돌아보게 된 거죠. 나의 뿌리는 어디인지, 돌아갈 곳이 어디인지를 고민한 거예요. 결국 저는 한국인인데 말이죠. 나이 예순이 다 돼 이제야 그걸 깨달았어요. 그것이 제게는 말로 다 설명하기 힘든 새로운 경험이에요.”
▼ 스튜디오에 있는 스태프 중 외국인도 눈에 띄네요. 제자를 뽑는 기준이 따로 있나요.
“저 친구는 미국인이에요. 보통 스튜디오에서 일하려면 자신의 포트폴리오를 제출하는데, 저는 그건 그렇게 중요하게 보지 않아요. 오로지 열정이죠. 죽어서 관 속까지 카메라를 들고 갈지 안 들고 갈지만 봐요(웃음). 얼마 전 프랑스에 살던 큰아들 에니가 사진을 배우고 싶다며 저를 찾아왔어요. 처음 월급은 40만 원이고 6개월마다 올려주는데 괜찮겠느냐고 했더니 상관없다며 열정을 보여서 일하게 했어요. 아들이라고 특별대우는 절대 없어요. 이쪽 바닥은 서열이 중요해서 아들도 스튜디오 청소부터 하고 있어요.”
그는 두 번 이혼하고 세 번 결혼했다. 프랑스인인 첫 부인과 이혼하고 신상옥 감독의 전 부인이던 영화배우 오수미 씨와 재혼해 화제를 뿌렸다. 더구나 그는 신 감독과 오씨 사이에서 태어난 두 아이를 직접 키우는 남다른 부정을 보였다. 오씨와 이혼한 후 1988년 당시 톱모델이던 이인혜 씨와 결혼해 90년 아들 네오를 얻었다. 그는 프랑스에 살던 큰아들 에니가 자신에게 사진을 배우겠다고 했을 때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 그동안 정신적, 경제적으로 아들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그에게 늦게나마 기회가 찾아왔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프랑스인인 전 부인도 좋아하기는 마찬가지.
▼ 큰아들 에니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에니라는 이름은 저와 에니 엄마가 좋아하던 레즈바니라는 이란 작가의 이름에서 따온 거예요. 저와는 프랑스어로 대화하지만 한국어를 배우겠다는 의지가 강하고, 사진은 이미 오래전부터 하고 싶었다고 하더군요. 현재 홍대 근처 오피스텔에 사는데 막내 네오가 사는 곳에서 5분밖에 안 걸려요. 네오도 사진을 전공해 두 아이가 자주 만나 친하게 지내요. 아주 감사한 일이죠. 제가 자식이 아들 셋에 딸 하나인데, 모두 똑같이 대해요. 방학 때는 에니도 불러 들여 다 데리고 있었어요. 그래서인지 아이들끼리 사이가 무척 좋아요. 아버지로서 아이들과 시간을 많이 보내지 못했는데도 아이들이 다 저를 좋아하고 잘 따라요. 복 받은 거죠.”
사진 역사에 이름 남기는 것이 목표
그는 프랑스 니스 국립응용미술대에서 영화를 전공하다 사진과 만났다. 어느 날 사진하는 친구를 따라 암실에 들어갔다가 이내 사진의 매력에 빠졌다. 하지만 사진은 그에게 많은 시련을 안겨줬다. 1980년대에는 한국 국적을 포기했다는 이유로, 또 프랑스 국적을 가지고 전시회를 열었다는 이유로 두 번이나 강제 추방을 당했고, 절망감을 이기지 못해 미국에서 1년 동안 마약에 빠져 지냈다. 1993년에도 마약 복용 혐의로 구속돼 두 달 동안 형을 살았고, 정신병원에도 입원했다.
▼ 한국을 원망했겠군요.
“상당히 보수적이고 폐쇄된 사회에서 저 같은 사람이 나타났으니 곱게 볼 리 없었죠.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일을 겪으면서 성숙해진 것 같아요. 마약을 안 했는데 했다며 정신병원에 감금됐을 때는 출강하던 대학에서도 잘리고, 어려움이 많았어요. 하지만 정신병원에 가보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돈 주고도 갈 수 없는 곳이죠. 그곳에서 사흘 정도 있으니까 ‘대한민국이 나를 진짜 예술가로 만들려고 작심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웃음).”
▼ 또 다른 변신 계획은 없나요.
“글쎄요. 앞으로 사진 역사의 한 페이지에 이름을 남기는 게 목표라면 목표예요. 물론 생전에 이루기 힘들 수도 있고, 영원히 불가능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 꿈을 포기하지 않고 살 거예요. 37년 동안 단 하루도 사진을 찍지 않은 날이 없는데, 앞으로도 끊임없이 새로운 걸 찍으며 살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