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여권 의원들은 정동영 이인제 문국현 후보(왼쪽부터)의 단일화보다 내년 총선 공천에 더 큰 관심이 있다는 지적이다.
정 후보가 당사 회의실을 나가기 직전 선대위 최고고문인 김원기 전 국회의장이 한마디 충고를 했다. “절대로 숫자 가지고는 합의하지 마십시오.” 숫자로 표현되는 구체적인 내용은 실무협상을 통해 결정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이날 오후 11시40분경 발표된 양당 4인 회동 합의 선언문에는 숫자가 많이 들어 있었다. ‘지도부 및 각종 의사결정기구는 양당 동수(同數)로 구성한다’는 것이 대표적. 사실상 2008년 총선 공천도 양당이 50대 50의 지분을 갖게 된다는 뜻이었다.
대통령후보 등록(25, 26일) 이전에는 성사되기 어려운 대통합민주신당과 민주당의 통합이 결렬된 속내를 파악하려면 이 숫자와 얽힌 ‘복합방정식’을 풀어야 한다.
이인제와 안희정
민주당에 지분 50%를 내주고 합당 합의를 했다는 소식에 정 후보 계열 일부 의원을 제외한 대통합민주신당 대부분의 의원들은 부글부글 끓었다. 의원 수로도 140(대통합민주신당)대 8(민주당)의 압도적 우위인데, 민주당에 내년 총선 공천의 절반을 떼어준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는 것이었다. 50%를 떼어준다는 말은 결국 대통합민주신당 현역 의원의 상당수가 공천을 받지 못한다는 뜻이다.
단적인 예가 충남 논산이다. 현재 지역구 의원은 민주당 대선 후보인 이인제 의원이다. 대통합민주신당이 최근 발표한 논산지역 선거대책위원장은 노무현 대통령의 386 최측근 안희정 씨. 안씨는 18대 총선 출마를 염두에 두고 논산에서 텃밭 다지기에 주력해왔다.
민주당 핵심 당직자는 “안희정 씨는 범법자다. 당연히 논산 총책은 이인제 의원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통합 작업이 제대로 되기란 처음부터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민주당의 지역적 기반인 호남, 그중에서도 광주·전남 지역 대통합민주신당 의원들의 불만은 상당했다. 민주당이 공천 50%를 받아간다 해도 주요 전략 공천 지역은 광주·전남과 서울, 수도권의 호남 출신 유권자 밀집지역에 집중될 것이기 때문이다.
전남 지역의 대통합민주신당 한 초선의원은 “최근 당에서 실시한 전국 지역별 여론조사에서 열세인 것으로 드러난 광주지역 의원들이 더 불안할 것”이라고 말했다.
민주당과의 통합을 반기는 목소리도 있다. 서울의 대통합민주신당 한 초선의원은 “통합이 안 되더라도 민주당은 내년 총선에서 상당수 지역에 후보를 낼 것이다. 그럼 한나라당과의 1대 1 대결이 아니라 3자 대결이 된다. 지지층이 비슷한 민주당 후보가 1000~3000표를 가져간다면 솔직히 (내가) 이길 가망은 적어진다”고 말했다. 민주당과의 통합은 반기기도, 반기지 않기도 힘든 딜레마라는 얘기다.
대통합민주신당은 ‘6개 족장 연합당’?
민주당 유종필 대변인은 11월22일 국회 브리핑에서 “대통합민주신당은 6개 족장 연합당”이라고 꼬집었다. 대통합민주신당 내 6개 계파가 대선은 안중에도 없고 총선에만 몰두하며 각자 살기 위해 내부 권력투쟁에 전념하느라 통합이 제대로 될 리 없다는 주장이다.
대통합민주신당은 올해 8월 출범했다. 대통합민주신당은 정 후보 계파를 비롯해 손학규 전 경기지사 진영, 이해찬 전 총리를 중심으로 한 친노(親盧) 그룹, 미래창조연대로 대표되는 시민사회세력, 김근태 전 열린우리당 의장계, 그리고 정균환 최고위원을 중심으로 한 민주당 탈당파 등 6개 계파로 나눠졌다.
따라서 민주당 지분이 50%라는 것은 이들의 지분이 절반으로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통합민주신당 고위 당직자는 “우리는 당 안에만 계파가 6개다. 5대 5로는 안 된다”고 말했다. 한 당직자는 “문국현 창조한국당 후보와 단일화를 한다면 또 지분을 나눠야 하는데, 그럼 대통합민주신당의 ‘주인’이 50% 지분도 못 가지게 된다”고 주장했다.
물론 이들 6개 계파가 민주당과의 합당을 숫자놀음 같은 지분 문제만으로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들이 대선 이후 당권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민주당이 50%의 지분을 차지하는 것은 용납하기 어려웠다.
노무현과 김대중
통합 협상에 참여했던 민주당 고위당직자는 “신당 내 모든 세력이 민주당과의 통합을 반대했다. 여기에 노 대통령 측, 김대중 전 대통령 측도 동참했다”고 주장했다.
노 대통령은 11월8일 광주·전남지역 인사들과의 오찬에서 “민주당과는 정책적 연대만 하면 된다. 합치면 영원히 큰 판에서 지게 된다”며 양당 통합에 대한 속내를 비쳤다. 그러나 이후 통합과 관련된 어떤 언급도 하지 않고 있다. 정 후보 선대위 고위관계자는 “청와대에서 어떤 개입도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2003년 민주당 분당 사태를 뒷받침한 노 대통령으로서는 다시 민주당과 합치는 것에 불쾌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노 대통령의 이런 속내를 잘 아는 대통합민주신당 친노 진영이 민주당과의 통합을 달가워하지 않은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김 전 대통령 측, 즉 동교동계가 통합을 반대했는지에 대해선 의견이 엇갈린다. 양당의 통합 협상이 초반에 급물살을 탄 데는 막후에서 동교동계, 특히 권노갑 전 민주당 고문의 역할도 한몫한 것으로 알려졌다. 권 전 고문 측은 “권 고문이 정 후보와 민주당 박 대표를 만나 통합 원칙을 설명하며 민주당에 지분 50%를 주도록 설득했다”고 주장했다. 당 대선후보의 지지율이 2%에 못 미치고 당내 호남 출신 의원들의 탈당 가능성으로 고사 위기에 몰린 민주당을 살린 셈이다. 권 고문은 지분 50%는 ‘민주당의 이름값’이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민주당 사정에 밝은 대통합민주신당 관계자는 “권 고문이 역할을 한 것은 맞다. 그런데 동교동은 양당 통합보다 선거연합을 더 선호했다”고 말했다. 박상천 대표가 민주당 쪽 공천권을 장악하면 동교동계가 장악할 수 있는 공천 지분이 줄어들기 때문이라는 해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