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서태지다. 1992년 “난 알아요”를 외치며 새로운 세대의 출현을 알린 서태지는 얼마 안 돼 “이제 그런 가르침은 됐다”면서 ‘문화 대통령’에 등극했고, 96년 정상에서 은퇴함으로써 그 시절의 ‘신화’로 남는 듯했다. 하지만 98년 솔로앨범으로 다시 돌아온 그는 2000년과 2004년 새 앨범을 발표할 때마다 ‘서태지 신드롬’이라고 불릴 만한 반향을 일으켰다. 데뷔한 지 15년이 흘렀고 휴지(休止) 기간이 활동 기간을 넘어선 지 오래지만, 서태지는 늘 대중의 관심사다.
“8집(신보)이 조만간 나올 것”이라는 소문이 도는 요즘, 가요계는 물론 대중문화계 전체가 술렁이고 있다. 11월3일 서울 코엑스에 문을 연 ‘서태지 15주년 기념관’은 일주일 만에 2만명이 방문하는 등 폭발적인 관심에 힘입어 일주일 연장 전시까지 치른 결과, 2주간 총 5만명의 방문기록을 세웠다. ‘서태지 데뷔 15주년 기념음반’ 역시 온라인과 오프라인 예약 판매를 시작하자마자(온라인 예약 10분, 오프라인 매장 3시간) 마감됐다. 올해 최다 음반판매량을 달성한 SG워너비가 20만여 장, 그 뒤를 이은 에픽하이가 11만여 장을 기록한 요즘 상황에서, 일반 CD값의 10배에 이르는 9만7900원의 고가 앨범 1만5000장이 순식간에 품절된 것은 놀랄 만한 사건이다.
‘서태지 파워’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2월1일 열리는 ‘서태지 15주년 기념공연-·’은 현재 8집 음반작업 중인 서태지는 빠진 채 후배 음악인들만이 참여하는 콘서트임에도 온라인 예매 시작 10분 만에 전석 매진됐다.
“어이 친구~ 나 또 왔음. 들국화의 노래를 들으며 닥터 슬럼프를 보고 자란 우리는 친구. 언제까지라도 기다릴 거야. 조급해하지 말고 자신이 만족할 수 있는 음악을 만들길…. 언제까지나 태지 팬~. 콘서트 때 만나~.”(‘서태지 15주년 기념관’에 한 팬이 남긴 글)
최근 서태지 열풍에는 ‘서태지 세대’가 있다. 서태지 세대란 ‘서태지와 아이들’이 데뷔한 1992년부터 은퇴한 96년 사이에 그의 음악이나 스타일에 영향을 받으며 자란 세대를 일컫는다. 서태지컴퍼니 측도 서태지 파워의 주역으로 “‘서태지와 아이들’의 전성기 시절 사춘기나 청년기를 보낸 10년 지기 팬들”을 꼽는다. 70년대 초반생에서부터 80년생까지 넓게 퍼져 있는 이들을 하나로 묶는 데는 무리가 있어 보이지만, ‘90년대 초반 문화’에 대한 향수는 이들이 공유하는 핵심 코드다. ‘신세대’라는 용어가 등장한 것도 이때부터다.
“‘우리는 다르다’고 생각하면서도 그게 뭔지 몰랐어요. 그렇다고 앞선 세대가 붙인 ‘X세대’라는 말은 싫었고요. ‘규정할 수 없다’고 규정해버리는 게 뭔가 이상했으니까요. 그런 점에서 서태지는 우리가 찾아낸, 우리 세대의 정체성처럼 보였죠.”
10년지기 팬 서태지 세대 변함없는 애정
고등학생과 대학생 시절 서태지의 음악과 함께 보낸 신기주(32·영화전문지 기자) 씨는 1990년대를 “적과 아군이 모호한 회색빛 시대”였다고 표현한다. 94학번인 그는 자기 세대에 대해 “80년대 학번의 영향을 받아 광주에 대한 원죄의식을 느끼도록 학습받은 세대”지만 “특정 이념이나 집단에 완벽하게 몸을 싣지 못한, 그렇다고 밀려오는 소비문화에 저항 없이 몸을 담는 것도 불편했던 세대”라고 말한다. 그의 말대로 서태지가 등장한 92년 이후는 그 이전과 뚜렷하게 구별되는 다른 세상이었다. 92년 문민정부가 들어섰고, 버블경제로 전에 없던 호황을 누렸다.
기성의 것에 반(反)하는 음악과 형식으로 등장한 서태지는 이들 세대에게 새로운 대안처럼 여겨졌다. 평론가들은 1990년대 서태지의 등장과 인기에 대해 “90년대에 떠오른 포스트모더니즘, 세계화, 소비주의 같은 문화적 조짐을 확실하게 보여준 상징적인 사례”라고 설명한다.
“… 두말할 것도 없이 마광수 교수가 1991년 발표한 ‘즐거운 사라’로 구속된 것도, ‘모든 것이 이제 다 무너지고 있어도 환상 속에 그대가 있다’고 노래한 ‘서태지와 아이들’이 데뷔한 것도 바로 1992년의 일이었다. 1991년 5월 이전까지만 해도 대뇌의 언어로 말하던 사람들이 1992년부터 모두 성기의 언어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그게 바로 1991년 5월 이후의 세상을 살아가던 사람들의 내면 풍경이었다.”(김연수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중에서)
서태지가 활동했던 1990년대는 ‘한국 대중문화의 르네상스’라고 할 만큼 문화적으로 풍요로운 시기였다. 일본에서 전공투 세대의 직후 세대가 문화적 풍요를 누린 것처럼, 80년대 정치투쟁 이후 90년대의 한국 상황도 유사했다. 80년대 운동권 출신들은 비평이나 예술장르로 옮겨갔고, 각종 문화계간지와 영화잡지가 출간됐다. 또한 양질의 문화비평 등 PC 온라인상에 담론의 장이 형성되기도 했다.
특히 장르 특성상 젊은 스타의 진입이 쉬웠던 당시 대중음악판의 경우 그 변화 폭이 더욱 컸다. 대중음악 음악평론가 강명석 씨는 1990년대 초·중반 대중음악계의 분위기를 “오버그라운드의 인기와 음악성이 비례했다”고 설명하면서 “(90년대는) 끊임없이 새로운 음악을 요구하고, 새로움이 무기가 되던 시기”라고 정의한다.
여기에 1980년대 초반부터 컬러TV를 접하고, 88서울올림픽을 경험한 서태지 세대의 문화적 욕구는 전에 없던 문화 소비로 이어졌다. 물론 여기에는 이전보다 한 단계 발전한 마케팅도 한몫했다. 새로움은 예술이자 상품이었고, 가장 새로운 형식을 보여준 서태지는 뛰어난 예술인이자 마케팅의 귀재였다.
서태지 세대에 대해 “탈정치화된 시대의 에너지를 문화에 분출한 세대”라고 표현한 강씨는 이들이 “앞으로도 문화 영역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라고 내다본다.
“앨범 컬렉터 가운데 상당수가 아마 90년대에 음악을 듣던 서태지 세대일 겁니다. 현재 대중문화의 여론을 주도하는 것도 이들이고요.”
20, 30대 스타 태부족, 그래서 더 열광
그러나 자신을 (서태지 음악을 좋아하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서태지 세대’로 받아들이는 90년대 초·중반 학번과 달리, 대학생이나 고등학생 시절에 외환위기를 겪은 ‘서태지 세대’는 여기에 함께 묶기엔 어려운 부분이 있다. 20대 후반인 송선영 씨는 초등학생 시절부터 “서태지의 아이”였고 “서태지의 삶을 동경”할 만큼 확실하게 영향도 받았지만, 중3 때 “HOT의 출현을 보고 난 뒤 ‘HOT 세대’가 됐다”고 한다.
“제 또래가 HOT 세대, 아이돌 문화를 겪은 세대로 구분되기도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봐요. 서태지 팬들은 자신이 좋아한 스타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있어요. 우리가 좋아했던 스타가 새로운 것을 만들고, 세상의 일부를 바꿨다는 자부심 같은 거죠.”
김씨처럼 서태지 세대 가운데 일부는 서태지 이후 HOT, god 등으로 이어지는 대형 연예기획사의 아이돌 ‘상품’을 접했다. 아이돌 팬덤문화 역시 ‘저항정신’과 마찬가지로 서태지가 영향을 끼친 부분이다. 대중음악 평론가 김작가 씨는 “1990년대 후반부터 대중음악에 대한 선호는 두 갈래로 나뉜다”면서 “서태지 등 90년대 음악인들의 영향으로 다양한 인디 문화가 만들어졌지만, 연예기획사가 치밀한 마케팅하에서 아이돌을 생산한 것도 90년대 후반”이라고 설명했다.
서태지 이후 ‘포스트 서태지’는 아직 출현하지 않았다. 현재 가요계를 비롯한 대중문화판에는 80, 90년대의 ‘오빠들’과 40대가 돈줄을 쥐고 있는 문화산업에 의해 기획된 아이돌만 존재할 뿐 ‘서태지 세대’에 속하는 20, 30대 스타는 부족하다.
한 문화평론가는 서태지의 성공에 대해 “‘자유’나 ‘반항’의 표현이 성공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지만, 그 영향을 받은 서태지 세대는 “외환위기 이후, 자기표현을 강조해 뮤지션으로 나간 경우와 산업적인 측면을 파악하고 연예산업을 발전시킨 경우 두 갈래로 나뉜다”고 분석했다. 결국 기성세대가 돼가고 있는 서태지 세대도 다음의 두 갈림길에 서 있는 셈이다. 서태지가 보여준 ‘정신’을 흡수하거나, 서태지의 산업적 ‘마케팅 능력’을 파악하거나. 둘 다 갖춘 ‘포스트 서태지’는 과연 불가능할까.
“마이클 잭슨 이후 너바나가 나왔고, 또 그 후에 에미넴이 나왔잖아요. 경로가 다르긴 하겠지만, 또 다른 서태지도 곧 나오지 않을까요?”(강명석)
‘솔직한 해답을 갖자 / 영웅이란 존재는 더는 없어 / 이미 죽은 지 오래 무척 오래 저 태양 아래 / 바로 이날의 영웅은 바로 너야’(서태지 ‘울트라매니아’ 중에서)
더는 영웅을 기대하기 어려운 시대라지만 ‘영웅’에 대한 희망은 계속된다. 그래서 ‘다시, 서태지’인지 모른다.
“8집(신보)이 조만간 나올 것”이라는 소문이 도는 요즘, 가요계는 물론 대중문화계 전체가 술렁이고 있다. 11월3일 서울 코엑스에 문을 연 ‘서태지 15주년 기념관’은 일주일 만에 2만명이 방문하는 등 폭발적인 관심에 힘입어 일주일 연장 전시까지 치른 결과, 2주간 총 5만명의 방문기록을 세웠다. ‘서태지 데뷔 15주년 기념음반’ 역시 온라인과 오프라인 예약 판매를 시작하자마자(온라인 예약 10분, 오프라인 매장 3시간) 마감됐다. 올해 최다 음반판매량을 달성한 SG워너비가 20만여 장, 그 뒤를 이은 에픽하이가 11만여 장을 기록한 요즘 상황에서, 일반 CD값의 10배에 이르는 9만7900원의 고가 앨범 1만5000장이 순식간에 품절된 것은 놀랄 만한 사건이다.
‘서태지 파워’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2월1일 열리는 ‘서태지 15주년 기념공연-·’은 현재 8집 음반작업 중인 서태지는 빠진 채 후배 음악인들만이 참여하는 콘서트임에도 온라인 예매 시작 10분 만에 전석 매진됐다.
“어이 친구~ 나 또 왔음. 들국화의 노래를 들으며 닥터 슬럼프를 보고 자란 우리는 친구. 언제까지라도 기다릴 거야. 조급해하지 말고 자신이 만족할 수 있는 음악을 만들길…. 언제까지나 태지 팬~. 콘서트 때 만나~.”(‘서태지 15주년 기념관’에 한 팬이 남긴 글)
최근 서태지 열풍에는 ‘서태지 세대’가 있다. 서태지 세대란 ‘서태지와 아이들’이 데뷔한 1992년부터 은퇴한 96년 사이에 그의 음악이나 스타일에 영향을 받으며 자란 세대를 일컫는다. 서태지컴퍼니 측도 서태지 파워의 주역으로 “‘서태지와 아이들’의 전성기 시절 사춘기나 청년기를 보낸 10년 지기 팬들”을 꼽는다. 70년대 초반생에서부터 80년생까지 넓게 퍼져 있는 이들을 하나로 묶는 데는 무리가 있어 보이지만, ‘90년대 초반 문화’에 대한 향수는 이들이 공유하는 핵심 코드다. ‘신세대’라는 용어가 등장한 것도 이때부터다.
“‘우리는 다르다’고 생각하면서도 그게 뭔지 몰랐어요. 그렇다고 앞선 세대가 붙인 ‘X세대’라는 말은 싫었고요. ‘규정할 수 없다’고 규정해버리는 게 뭔가 이상했으니까요. 그런 점에서 서태지는 우리가 찾아낸, 우리 세대의 정체성처럼 보였죠.”
10년지기 팬 서태지 세대 변함없는 애정
고등학생과 대학생 시절 서태지의 음악과 함께 보낸 신기주(32·영화전문지 기자) 씨는 1990년대를 “적과 아군이 모호한 회색빛 시대”였다고 표현한다. 94학번인 그는 자기 세대에 대해 “80년대 학번의 영향을 받아 광주에 대한 원죄의식을 느끼도록 학습받은 세대”지만 “특정 이념이나 집단에 완벽하게 몸을 싣지 못한, 그렇다고 밀려오는 소비문화에 저항 없이 몸을 담는 것도 불편했던 세대”라고 말한다. 그의 말대로 서태지가 등장한 92년 이후는 그 이전과 뚜렷하게 구별되는 다른 세상이었다. 92년 문민정부가 들어섰고, 버블경제로 전에 없던 호황을 누렸다.
11월3일부터 2주간 열린 ‘서태지 15주년 기념관’에는 총 5만명이 방문했다.
“… 두말할 것도 없이 마광수 교수가 1991년 발표한 ‘즐거운 사라’로 구속된 것도, ‘모든 것이 이제 다 무너지고 있어도 환상 속에 그대가 있다’고 노래한 ‘서태지와 아이들’이 데뷔한 것도 바로 1992년의 일이었다. 1991년 5월 이전까지만 해도 대뇌의 언어로 말하던 사람들이 1992년부터 모두 성기의 언어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그게 바로 1991년 5월 이후의 세상을 살아가던 사람들의 내면 풍경이었다.”(김연수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중에서)
서태지가 활동했던 1990년대는 ‘한국 대중문화의 르네상스’라고 할 만큼 문화적으로 풍요로운 시기였다. 일본에서 전공투 세대의 직후 세대가 문화적 풍요를 누린 것처럼, 80년대 정치투쟁 이후 90년대의 한국 상황도 유사했다. 80년대 운동권 출신들은 비평이나 예술장르로 옮겨갔고, 각종 문화계간지와 영화잡지가 출간됐다. 또한 양질의 문화비평 등 PC 온라인상에 담론의 장이 형성되기도 했다.
특히 장르 특성상 젊은 스타의 진입이 쉬웠던 당시 대중음악판의 경우 그 변화 폭이 더욱 컸다. 대중음악 음악평론가 강명석 씨는 1990년대 초·중반 대중음악계의 분위기를 “오버그라운드의 인기와 음악성이 비례했다”고 설명하면서 “(90년대는) 끊임없이 새로운 음악을 요구하고, 새로움이 무기가 되던 시기”라고 정의한다.
여기에 1980년대 초반부터 컬러TV를 접하고, 88서울올림픽을 경험한 서태지 세대의 문화적 욕구는 전에 없던 문화 소비로 이어졌다. 물론 여기에는 이전보다 한 단계 발전한 마케팅도 한몫했다. 새로움은 예술이자 상품이었고, 가장 새로운 형식을 보여준 서태지는 뛰어난 예술인이자 마케팅의 귀재였다.
서태지 세대에 대해 “탈정치화된 시대의 에너지를 문화에 분출한 세대”라고 표현한 강씨는 이들이 “앞으로도 문화 영역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라고 내다본다.
“앨범 컬렉터 가운데 상당수가 아마 90년대에 음악을 듣던 서태지 세대일 겁니다. 현재 대중문화의 여론을 주도하는 것도 이들이고요.”
20, 30대 스타 태부족, 그래서 더 열광
‘서태지 세대’란 90년대 초 전성기의 서태지에게 영향받은 지금의 20대 후반과 30대를 뜻한다.
“제 또래가 HOT 세대, 아이돌 문화를 겪은 세대로 구분되기도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봐요. 서태지 팬들은 자신이 좋아한 스타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있어요. 우리가 좋아했던 스타가 새로운 것을 만들고, 세상의 일부를 바꿨다는 자부심 같은 거죠.”
김씨처럼 서태지 세대 가운데 일부는 서태지 이후 HOT, god 등으로 이어지는 대형 연예기획사의 아이돌 ‘상품’을 접했다. 아이돌 팬덤문화 역시 ‘저항정신’과 마찬가지로 서태지가 영향을 끼친 부분이다. 대중음악 평론가 김작가 씨는 “1990년대 후반부터 대중음악에 대한 선호는 두 갈래로 나뉜다”면서 “서태지 등 90년대 음악인들의 영향으로 다양한 인디 문화가 만들어졌지만, 연예기획사가 치밀한 마케팅하에서 아이돌을 생산한 것도 90년대 후반”이라고 설명했다.
서태지 이후 ‘포스트 서태지’는 아직 출현하지 않았다. 현재 가요계를 비롯한 대중문화판에는 80, 90년대의 ‘오빠들’과 40대가 돈줄을 쥐고 있는 문화산업에 의해 기획된 아이돌만 존재할 뿐 ‘서태지 세대’에 속하는 20, 30대 스타는 부족하다.
한 문화평론가는 서태지의 성공에 대해 “‘자유’나 ‘반항’의 표현이 성공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지만, 그 영향을 받은 서태지 세대는 “외환위기 이후, 자기표현을 강조해 뮤지션으로 나간 경우와 산업적인 측면을 파악하고 연예산업을 발전시킨 경우 두 갈래로 나뉜다”고 분석했다. 결국 기성세대가 돼가고 있는 서태지 세대도 다음의 두 갈림길에 서 있는 셈이다. 서태지가 보여준 ‘정신’을 흡수하거나, 서태지의 산업적 ‘마케팅 능력’을 파악하거나. 둘 다 갖춘 ‘포스트 서태지’는 과연 불가능할까.
“마이클 잭슨 이후 너바나가 나왔고, 또 그 후에 에미넴이 나왔잖아요. 경로가 다르긴 하겠지만, 또 다른 서태지도 곧 나오지 않을까요?”(강명석)
‘솔직한 해답을 갖자 / 영웅이란 존재는 더는 없어 / 이미 죽은 지 오래 무척 오래 저 태양 아래 / 바로 이날의 영웅은 바로 너야’(서태지 ‘울트라매니아’ 중에서)
더는 영웅을 기대하기 어려운 시대라지만 ‘영웅’에 대한 희망은 계속된다. 그래서 ‘다시, 서태지’인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