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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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우가 돈벌이 재물신이 된 까닭은?

  • 노만수 서울디지털대 문창과 교수·도서출판 일빛 편집장

    입력2007-11-28 15: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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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우가 돈벌이 재물신이 된 까닭은?

    관우의 활약상을 확인할 수 있는 삼국지 게임.

    “유비가 후덕한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한 나머지 위선자같이 되어버렸고, 제갈량이 지모가 많다고 그린다는 것이 요괴에 가깝게 되어버렸다. 오직 관우에 대해서는 특히 뛰어난 표현이 많아, 그의 의리와 용맹이 때때로 눈으로 보는 듯하다.”

    최고의 중국문학 통사라는 평가를 받는 ‘중국소설사’(소명출판)에서 루쉰은 유비는 온후함이 지나쳐 위선자가 되고, 공명의 지혜는 마치 요술사처럼 여겨지는 반면 관우만이 용감한 장수로 훌륭하게 묘사되어 있다고 했다. 하지만 청나라의 장학성이 “나관중의 삼국지는 칠실삼허(七實三虛)”라고 했던바, 관우 또한 픽션이 많이 가미된 인물이다.

    교토대 김문경 인문과학연구소 교수는 ‘삼국지의 영광-베스트소설 천년의 역사’(사계절)에서 관우의 칠실삼허를 이렇게 지적한다. 먼저 청룡도와 적토마는 관우와 관계없고, 술이 식기 전에 화웅을 베다, 문추를 베다, 오관(五關)에서 여섯 장군을 베다, 채양을 베다, 화용도에서 조조를 풀어주다, 초선을 베다, 죽은 뒤 옥천산에서 성(聖)을 드러내다 등 수많은 명장면들이 모두 픽션이다. 또 주창은 실재하지 않았고 아들 관평은 양자가 아니라 친자식이었다는 것.

    고향 산서성 해주 소금장수들이 신격화 전국 유통

    이렇게 하나씩 베일을 벗겨가면 280년 진수가 완성한 ‘정사 삼국지’(민음사)의 관점대로 관우는 오만함 때문에 자멸한 ‘결점 있는 인간’일 뿐이다. 그런데도 관우는 중국에서 한족(漢族)의 시조신인 황제(黃帝)와 더불어 ‘신’으로 모셔지고 있다.



    18세기 말 연암 박지원이 ‘열하일기’(보리)에서 “천하 어디를 가나 관제묘가 있네. 궁핍한 변방과 몇 가구뿐인 작은 마을에도 아름다운 관제묘가 세워져 있네”라고 기록했듯, 그가 신이 된 것은 그 역사도 깊다. 지금도 중국의 많은 도교사원에는 관우상이 모셔져 있다. 일반인의 집에서도 관우 부적은 돈벌이 재물신이다. 찻집 등 상점 앞의 관제상에는 ‘날마다 돈 벌게 해주소서(天天發財)’라고 적힌 문구와 더불어 관운장의 손에 인민폐가 들려 있다. 관우 화상을 살 때는 절대 ‘산다(買)’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청해서 모셔온다(請)’고 말할 정도로 숭배한다. 그러나 관우가 생전에 돈벌이에 능했다는 이야기는 금시초문일 것이다.

    중국에서 황제의 묘엔 능(陵), 성인 무덤엔 림(林)자를 붙이는데 공자의 무덤을 공림, 관우의 무덤은 관림이라고 한다. 무수한 중국역사 인물들 중에 공자와 관우만이 성인으로 추존받고 있는 것이다. 형인 유비나 귀신을 부렸다는 제갈공명도 신이 되지 못했는데 왜 관우만 관왕(關王)이 되고, 나아가 관제(關帝)가 되어 공자와 어깨를 겨누며 신으로 숭배받는 것일까.

    물론 소설 ‘삼국지’대로 관우의 혼령이 ‘내 머리를 돌려달라’며 옥천산에 나타났기 때문에 관우를 원한 맺힌 혼령으로 믿고 제사 지냈을 수도 있다. 또한 조조가 관우의 꿈에 시달리다 죽고, 관우를 공격했던 오나라 장군 여몽도 이후 병사했다는 소설 내용도 민간인들의 기복 신앙심을 자극했을 것이다. 아니면 나관중이 관우와 같은 산서 사람이기 때문에 지나친시(關係) 의식을 발휘한 것일까.

    교토대 김 교수는 ‘삼국지의 영광’에서 관우가 신이 된 것은 그의 생애나 성격과는 관계없을 성싶고 그가 태어난 고향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관우의 고향은 산서성 해주(海州)다. 해주는 중국 최대의 염호(鹽湖·소금호수)로 유명하다. 영어 봉급(salary)의 어원이 소금(salt)이고 고대 로마에서 군인의 월급을 소금으로 지급했던 데서 알 수 있듯, 자고로 소금은 생활필수품이었다. 때문에 동양에서는 염전을 얻는 자가 천하를 지배한다고 했다.

    사실 중국의 중원은 바로 이 해주의 소금을 소비하며 융성했다. 진시황제도 먼저 해주를 제압하며 천하통일 전쟁을 시작했다. 한나라 때 소금은 국가의 전매품이 되었다. 국가 보호 아래 해주 사람들은 소금을 전매하며 막대한 이익을 얻고 전국의 상권을 장악했다. 더구나 산서지방은 예부터 유목민족과 대치하는 군사 요충지였던 까닭에 막대한 군사비는 주로 소금장수들 몫이었다. 하지만 빛이 있으면 그늘이 있듯 정부에 의한 소금 전매는 민간의 소금 밀매를 낳기도 했다. 당나라 말기의 황소, 원나라 말기의 장사성 등 반란군 대장들은 모두 소금 밀매 상인이었다. 대만을 세운 장개석도 소금장수 아들이었고 해주 소금장수들이 그의 경제적 후원자였다.

    중국인들은 특히 향토애가 강하다. 그래서 산서 소금장수들도 장사를 떠나면서 행선지마다 관우신상(神像)을 짊어지고 다녔다고 한다. 이로부터 관우를 군사의 신이자 상업신, 비밀결사의 수호신으로 떠받는 관우 신격화 현상이 전국으로 퍼진다. 지금도 화교가 동남아시아를 비롯해 세계 곳곳에서 뿌리를 내릴 때는 관제묘가 세워진다.

    원래 중국에서는 궁중에서 군신(軍神)을 제사하는 습관이 있었다. 첫 번째 신이 바로 화하족의 신황제와 싸워 패한 동이족의 전쟁신 치우인데, 한나라 고조 유방은 천하통일을 하고 먼저 치우에게 제사를 지냈다. 그런데 당나라 때 군신의 자리를 주나라 무왕을 도와 은나라를 친 태공망 강자아가 차지한다. 송나라 때는 궁중에서 여전히 강태공을 제사 지냈지만 민간에서는 관우의 존재가 부각되기 시작했다. 그 시점에 관우가 산서성 해지에서 치우를 무찔렀다는 전설이 생겨났다. 원나라 때는 치우와 강태공을 앞질러 촉한정통론의 촉나라 장수 관우가 전국적 군신의 자리에 오른다. 이민족의 나라인 원나라 치하에서 정통 한족 출신 장수를 군신으로 대접해 몽골족의 원나라에 정신적으로나마 저항한 것이다. 명나라의 영락제는 자신의 쿠데타가 성공한 것은 관우가 도왔기 때문이라며 관우에게 제(帝)라는 시호까지 붙였다.

    그래서 김운회 동양대 경영관광학부 교수는 ‘삼국지 다시 읽기’(삼인)에서 관우가 충의의 화신으로 재탄생해 신격화된 데는 송나라의 주자와 명나라 촉한공정이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한다.

    얼굴 빨갛다는 전설 때문에 집단운동의 상징으로

    한편 관우는 고향에서 탐관오리를 죽이고 도망자 신세로 쫓기다 강물로 얼굴을 씻을 때 물속 관음보살의 도움으로 얼굴이 빨갛게 되어 추격자의 눈을 속이고 관(關)을 벗어날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때 이름을 관이라고 속였으며 원래 성은 관씨가 아니라고 한다. 흥미로운 것은 중국인은 빨간색을 성실, 재물복, 충성심으로 생각한다. 교토대 김 교수는 관우의 얼굴이 빨갛다는 전설이 바로 관우를 체제 측과 반체제 측 모두에서 신으로 모시는 기원이 되었다고 한다. 실제 원나라 말기의 홍건적에서 중국 공산당 홍군에 이르기까지 관우는 하나의 집단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또 만주족의 청나라 타도를 목적으로 생겨난 비밀결사에서도 관우를 수호신으로 숭배했고, 청나라 정부도 한족을 달래고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관우를 궁중에서 제사 지냈다. 정부는 충성을 다한 관우를 정부홍보용으로, 서민은 보잘것없는 유비를 끝까지 섬긴 관우에게서 대리만족을 느끼며 신격화한 것이다.

    그런데 ‘삼국지’는 언제부터 우리나라에서 유행했을까. 임진왜란 이후라는 게 정설이다. 당시 원병으로 온 명나라 군인 태반이 관우를 신으로 모시고 있어 조선에도 관우사당이 세워졌는데, 현재 서울의 동묘(東廟)가 유명하고 서울 장충동에 있는 관우사당에는 관우부인의 초상도 있다. 남산 기슭에 있는 와룡묘(臥龍廟)는 제갈공명과 함께 관우의 신상을 모시는데, 단군묘나 삼성각처럼 우리나라 재래신앙과 관련된 사당도 나란히 있다. 우리나라 무속신앙에는 소열황제 유비, 와룡선생 제갈공명, 관우의 사부 옥천대사, 오호대장, 감부인, 미부인도 등장한다. 원래 샤머니즘은 민족의 무의식을 반영한다. 최영·임경업 장군 등이 신격화된 것은 그들이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하는 서민들의 대리욕망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삼국지 인물들을 이렇게 신으로 숭배하고 있는 것일까. 소중화주의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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