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28일 정동영(오른쪽에서 세 번째) 전 열린우리당 의장과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이 개성공단에 입주한 한 내의 제조업체에서 북측 여성근로자의 설명에 따라 현장체험을 하고 있다.
이 전 총리는 비행기에 오르기 앞서 “특사라는 얘기가 많다”는 질문을 받았다. 그는 노련하게 에둘렀다.
“나는 내 일을 하러 갈 뿐이다.”
이 전 총리의 측근인 조 전 국무조정실장이 최승철 아태평화위 부위원장과 술잔을 나누면서 호형호제할 만큼 평양에서의 일정은 순조로웠다는 게 이 의원의 설명이다. 이 전 총리도 크게 만족했다고 한다.
이 전 총리의 방북을 신호탄으로 신북풍(新北風) 조짐이 갈수록 짙어지고 있다. 정치인들의 북한 방문이 이어진다. 옛 북풍이 ‘대결’을 부추기며 ‘거짓 위기’를 조장했다면, 신북풍은 ‘화해’와 ‘평화’라는 이름으로 포장돼 있다.
3월26일 개성공단은 열린우리당 의원총회를 방불케 했다. 정세균 의장과 장영달 원내대표가 소속 의원 20여 명과 방북한 것.
“개성공단 방문은 우리가 평화개혁 세력임을 강조한 것이다. 5월께 미국 상하원 의원들을 초청해 개성공단을 함께 방문하는 것도 계획하고 있다.”
열린우리당 최성 의원은 “북-미관계에 훈풍이 불어온 뒤 한나라당이 북한에 유화 제스처를 보내고 있는데, 정치적 쇼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열린우리당의 상당수 의원들은 대북문제와 남북정상회담이 한나라당에 쏠린 현 대선구도를 타개하는 수단이 될 것이라고 본다.
그래서일까. 한나라당의 대북 기조도 출렁거린다. 대북정책 패러다임 재검토를 위한 태스크포스(TF)가 구성됐으며 당내 인사들의 방북도 봇물 터지듯 기획되고 있다.
햇볕정책 저격수 정형근 의원도 방북 추진
원내수석 부대표인 이병석 의원과 이주영 의원이 4월 초 방북할 예정이고, 홍준표 의원은 북한의 노동생산성을 고찰하기 위해 4월13일 개성공단을 찾는다. ‘햇볕정책의 저격수’라는 별명을 듣던 정형근 의원도 미국 쪽 루트를 통해 북한 방문을 추진했다.
“뚜렷한 목적도 없는 방북 러시는 민생을 팽개친 과장된 평화행진”이라고 지적한 유기준 한나라당 대변인의 논평(3월26일)이 머쓱해지는 대목이다.
이재정 통일부 장관은 “정치인들이 북한을 방문해 세계의 흐름을 정확하게 알려주는 것은 중요하다”면서 “북한을 방문해 여러 역할을 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고 말했다.
정치인들이 북한을 방문해 교류를 늘리는 것은 기본적으로 바람직한 일이다. 문제는 북-미간 해빙 기류에 편승해 정치적 이득을 챙기겠다는 의도가 노골적으로 드러난다는 점이다.
한 대북소식통은 “정치인들은 평양에 가서 남북문제보다 서울의 일만을 생각한다”고 꼬집었다. 유력 정치인들이 북한 방문에 목말라하는 걸 곱게 볼 수만은 없는 까닭이다.
정치인들은 북한 방문을 서울에서의 입지를 강화하는 수단으로 이용하곤 한다. 언론이 호들갑스럽게 전하는 의원들의 대북 외교도 대부분 알맹이가 없다.
노무현 대통령의 최측근인 안희정 씨와 이화영 의원이 리호남 북한 참사를 비밀리에 만난 지난해 10월, 열린우리당 C 의원도 베이징에서 또 다른 북한 인사 A씨를 만났다. C 의원은 서울에 돌아와 접촉 결과를 브리핑했는데, 일부 언론은 “C 의원이 남북관계 분야의 ‘핵심적 위치’에 있는 북측 인사와 면담했다”며 대화 내용을 공개했다
당시 C 의원은 신문, 방송, 통신과 잇따라 인터뷰하면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그러나 C 의원이 만난 A씨는 핵심이기는커녕 북-미관계 및 남북관계와 관련해 발언할 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C 의원은 A씨가 실제 평양 핵심부와 말이 통하는 인사로 안 것일까? A씨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이발사 출신으로 알려졌는데, 대외사업을 나온 것도 김 위원장의 배려에 의한 것이었다고 한다.
대선은 괴물 같다. 국가적 이슈를 게걸스럽게 삼킨다. 평양은 연초부터 대선에 본격 개입할 의사를 노골적으로 밝혀왔다. 선거 때마다 북풍 변수는 크든 작든 서울을 긴장시켰다. 유력 정치인들은 북풍의 수혜자가 되거나, 적어도 손해를 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범여권 대선주자인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은 3월28일 개성 방문에 앞서 “남북정상회담은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사항”이라고 역설했다. 정 전 장관은 통일부 장관 시절의 경험을 살려 남북문제의 해결사 이미지를 구축하려는 듯하다.
그는 2005년 6월 200만kW 송전이라는 카드를 제기했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 북한의 6자회담 복귀를 이끌어냈다.
그러나 평양 내부 사정에 정통한 한 북한전문가는 “정 전 장관의 최근 대북 행보는 상대(북한)는 전혀 인정하지 않는 실속 없는 과장처럼 보인다”고 꼬집었다. “평양은 정 전 장관에 대한 호감과 관심을 접은 지 오래”라는 것.
200만kW 송전안도 ‘깜짝쇼’에 불과했다는 지적이 많다. 평양 내부의 반응은“그거 몇 년 걸리는 거야?” “가능하긴 한 소리인가?”에 모아졌다고 한다. 유사시 남쪽에서 송전을 끊으면 한국에 당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왔다고 한다.
이해찬 전 총리 북한과 핫라인 구축
한나라당 유력주자인 이명박 전 서울시장과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의 최근 대북관도 한결 유연해졌다. 북한이 긍적적으로 바뀌고 있으므로 한나라당의 대북정책도 달라져야 한다는 논리다. 북한 핵문제 전개 과정과 관련해 국내외 요로의 백그라운드 브리핑을 들었다고 한다.
박 전 대표는 2002년 5월 김 위원장을 만난 바 있다. 한나라당 주자로는 유일하게 김 위원장을 직접 대면한 셈이다. 박 전 대표가 이사로 참여한 유럽-코리아재단이 다리를 놓았다. 이 재단 장 자크 그로하 이사장의 북측 인맥이 두꺼운 것으로 알려졌다. 박 전 대표의 방북과 관련해 평양에서 회자되는 얘기다.
“(박 전 대표도) 평양에서 뭔가를 하기보다는 서울을 먼저 걱정했다. 다녀가고 난 뒤 감사 편지 한 장 보내오지 않았다. 한 달여 만에야 보내온 감사 편지는 옆구리 찔러 절 받은 격이었다.”
이 전 시장도 재임 시절 김정일 면담을 추진했다.‘경평(서울-평양) 축구대회’를 평양시와 함께 개최하는 계획과 실향민 방문 등 눈물샘을 자극하는 행사 등이 추진됐는데, 평양(브로커) 쪽에서 지나치게 높은 옵션(대가)을 요구해 무산됐다.
대선주자군 중 현재 북한과 끈끈한 관계를 맺은 사람은 이해찬 전 총리가 유일하다. 이화영 의원에 따르면, 이 전 총리는 3월7일 방북을 통해 최 부위원장과 핫라인을 구축했다. 최 부위원장은 대남관계 총책으로 ‘뜬’ 사람이다. 최승철 부위원장에겐 12월 대선과 관련한 평양의 숙제도 떨어져 있다고 한다. 북한 사정에 정통한 한 대북소식통의 분석이다.
“이해찬-아태 라인은 한국의 대선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정치적 거래 가능성을 탐색하는 모양새가 다시 시작된 것이다. 신북풍이다.”
4월, 정치인들의 방북이 러시를 이룬다. 신북풍이 더욱 사나워질 것 같아 걱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