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말 한국관광공사에서 새로운 프로젝트에 대한 자문을 요청한 일이 있었다. 예술가 출신 주무장관의 성향이 반영된 걸까. 꽤 신선해 보이는 사업이었다. 게다가 쥐꼬리만큼이나마 자문료도 챙길 수 있으니 즐거운 마음으로 회의에 참석하곤 했다. 그러다 문득 대회의실 벽에 걸린 큼직한 액자에 눈길이 갔다. 시골학교 급훈을 연상시키는 그 유리액자에는 다음과 같은 글자가 한자로 씌어 있었다.
‘근면, 성실, 자조.’
장엄했다. 아니 우스웠다. 담당직원에게 그것을 가리켰더니 몹시 쑥스러워하며 말한다.
“좀 촌스럽죠?”
근면하고 성실하게 하는 관광사업이란 어떤 걸까. 짐작건대 이런 유가 아닐까. ‘찬란한 우리 민족의 고유 문화유산을 열심히 알려 세계인을 기절시켜버리자!’
하지만 아무리 팔이 안으로 굽는다 해도 찬란한 궁궐을 보고 기절하는 것은 베이징의 자금성이나 이화원에서 벌어질 일이지 경복궁 창덕궁으로는 상대가 될 것 같지 않다. 그럼 어쩌라고?
더 재미있는 곳만 죽어라 찾아가는 사람들
내 생각에는 그 기관의 교시와 정반대로 가면 될 것 같다. 즉, 근면하고 성실한 세상에서 이탈하는 것이다. 시골 노인도 해외관광 길에 나서는 대중관광의 시대가 아닌가. 제아무리 규모와 미학에서 앞질러가는 곳이 있어도 이제 사람들은 더 재미있는 곳만 찾아가게 돼 있다. 거대하고 심심한 자금성보다는 조촐하지만 까무러치게 재미있다면 관광객들은 경복궁 놀이를 선호할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그게 어디 관광에만 해당하겠는가.
문제는 표어의 촌스러움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멘털리티’에 있다. 그야말로 과도기 현상일 수도 있지만, 뇌리에 아니 모세혈관에까지 속속들이 각인된 산업사회가 도통 지워지지 않은 채 우리는 디지털 정보사회를 살고 있다. 근면 성실의 가치관은 근육과 기계의 힘으로 세상이 돌아가던 때의 덕목이다. 관광을 포함해 과거의 놀이란 고전적인 발달심리학으로 보면 ‘잉여에너지론’과 ‘휴식론’으로 설명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유한계층은 에너지가 남아돌아서, 생산계층은 힘겨운 노동에 소모한 에너지를 재충전하기 위한 방편으로 놀이며 여행을 추구했다.
하지만 지금은 ‘에너지 총량의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 비물질 부호의 원리로 세상이 돌아간다. 근육과 기계의 힘 대신에 디지털 정보네트워킹의 끝없는 확대재생산을 통해 가치가 창출된다. 에너지가 남아돌거나 충전이 필요해서 ‘놀이’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에너지와는 상관없는 범주에서 사람들이 일하고 노는 환경이 도래한 것이다. 이런 초유의 환경은 사람들에게 전혀 다른 삶의 태도와 능력을 요구한다. 그것은 ‘열심히’의 건너편에 있는 세계, 근면 성실이 오히려 장애가 되는 세계다. 한마디로 창의성이 요구되는 세상을 말한다.
대체 창의성이란 무엇일까. 문화심리학자들은 그것을 ‘이미 존재하는 사물의 정보를 재배치해 낯설고 새롭게 보이도록 만드는 일’이라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창의적인 능력은 어떻게 생겨나는 걸까. 경영학자들은 그것을 ‘일과 놀이의 균형’에서 찾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말은 실제로 일은 줄이고 놀이시간을 더 많이 가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대로 놀아본 적 없기 때문에 놀면 불안
근면 성실을 지고의 가치로 받들며 개발시대를 건너온 한국인에게 이 같은 주문은 낯설고 황당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잘 놀아야 잘살 수 있다’니 이게 무슨 소린가. 정부가 나서서 반강제적으로 주5일제 근무를 시행했지만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샴페인을 일찍 터뜨려 IMF 체제를 맞았으니 이제라도 더 열심히 일해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생각한 것이다.
일이 즐겁고 노는 게 괴로울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도 여가의 확장을 문제삼는 것은 놀면 불안하게 느끼기 때문이다. 놀면 허무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한 번도 제대로 놀아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굳이 오늘날 한국인이 노는 법을 정의한다면 ‘자기 학대’와 ‘시체 애호’ 둘 중 하나라고 말하고 싶다. 평일엔 2차, 3차, 4차에 걸쳐 폭탄주를 들이붓고 노래방에 가서 목청을 찢는다. 주말에는 산을 찾아 이를 악물고 정상을 정복한다. 이것이 자기 학대다. 더 많은 사람들이 즐겨 하는 시체 애호는 말 그대로 무기력증에 빠져 마냥 빈둥빈둥 여가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당신은 다른가?
놀이가 창의성의 원천이라는 측면에서 생각을 펼쳐나가보자. 놀이란 일종의 시뮬레이션 같은 것이다. 실제 세계의 원리가 섞여들면 더는 놀이가 아니다. 예를 들어 프로선수가 하는 축구는 승리에서 오는 이득이 목적이지만 조기축구회 멤버라면 승패가 아니라 축구 자체가 목적이 된다. 만일 이기는 데 목숨 거는 멤버가 있으면 ‘강제 퇴출’시켜야 마땅하다.
요즘 부쩍 늘어난 별자리 애호가들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사진작가 윤광준이 증언하기를, 강원도 정선에 모이는 별 애호가들의 반응에서 한국인과 서양인의 모습이 너무나 다르다고 한다. 기다리던 성운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 서양인들은 예외 없이 “원더풀, 어메이징!” 하며 탄성을 지르고 즐거워하는 반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부분 심각한 표정으로 저것은 무슨 별, 또 저것은 몇호 별 하면서 알고 있는 과학지식을 확인하기에 급급하다는 것이다. 우리에겐 재미 자체를 추구하며 즐겨본 체험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재미를 추구하는 놀이의 세계는 느슨하게 즐기는 태도만을 요구하는 것일까. 우리는 기이한 삶을 살아가는 마니아나 오타쿠들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알고 있다. 그들이 자신의 취미에 쏟아붓는 노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야말로 현실과 꿈이 뒤바뀐 상태로 살아간다. 물론 그 일로 어떤 이득을 얻는 것은 아니다. 이득을 찾는다면 그렇게까지 열성을 기울일 수가 없을 것이다. 마니아들은 단지 재미있기 때문에 그 일에 온힘을 쏟는다. 오직 재미로 해야 하는 놀이에 목숨 거는 태도이니 잘못된 것은 아닐까.
열심히 노력한다고 사물을 다르게 볼 수 없어
여기서 우리는 한 하늘 아래 존재하는 두 개의 다른 공간을 떠올려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현실원리로 작동되는 생존의 공간이다. 생존공간에서는 더 열심히, 더 근면 성실하게 노력하는 사람이 보상을 받았다. 산업사회는 그렇게 해서 거대한 문명의 탑을 쌓아올렸다. 생산성을 위한 강제와 억압이 동원됐고 특히 자발적 강제를 위해 이데올로기라는 주술까지 발명해냈다.
하지만 인간의 삶에는 생존영역과 구별되는 또 하나의 세계가 존재한다. 그것은 외부의 모든 관계와 단절된 실존의 영역이다. 실존영역에서는 생존을 위한 고투가 무상한 것으로 여겨지기까지 한다. 실존적 자아의 눈으로 보면 사물의 의미와 가치가 다르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부모가 지어준 이름 대신 스스로 자기 아이디를 만들어 다른 인격체로 존재할 수 있는 사이버 공간, 비물질 부호 조작으로 생산-소비의 관계를 역전시킬 수 있는 프로슈머의 세상, 또한 그런 자립적이고 독자적인 존재들이 한없이 연결돼 있는 네트워킹의 세계, 이것은 인간의 실존영역이 확장된 것과 무척 흡사한 양상을 보인다. 생존적인 삶에 포개져 있으되 작동원리는 다른 것이다.
그 같은 다른 원리, 그것이 창의성이다. 산업사회인이 새로운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창의적인 존재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하지만 머리 싸매고 열심히 노력한다고 해서 창의적인 인간이 되는 것은 아니다. 사물을 다르게 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같은 하늘 아래 존재하는 다른 세상, 즉 생존논리와는 구별되는 실존의 영역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 실존의 세계 역시 무언가를 치열하게 추구하는 일이다. 하지만 그것은 눈앞의 현실적 이득을 취하는 것과는 다른 맥락의 치열함이다. 타인의 눈에 비친 그 모습은 마치 노는 것처럼 보인다. 노는 일은 재미가 있을 때만 몰두할 수 있다. 그러니까 진정으로 재미있게, 달리 말해 치열하게 논다면 이미 창의적인 삶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다. 허망할 정도로 간단한 결론이지만 세상의 모든 이론가들이 내리는 결론은 같다.
제대로 놀 줄 모르는 대가로 지금 우리가 치르고 있는 것이 10여 년째 이어지는 국가적 정체상태다. 열심히 근면 성실하게 노력해 세계 10위권의 경제규모를 이뤘지만 우리는 더 불행해지고 온갖 불만은 끝없이 늘어만 간다. 이 같은 정체상태에 대한 돌파구로 ‘더욱 열심히 일하자’라는 구호가 난무하고 있다. 그렇다면 중국 인도 브라질은 열심히 일하지 않는단 말인가. 만일 우리가 재미 자체를 목적으로 놀 줄 아는 첫 세대가 된다면, 이 땅에서 삶의 행복이 무엇인지 느껴본 최초의 한국인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혹시 모른다. 우리 다음 세대는 선진화 달성을 자축하며 샴페인을 터뜨릴지. 어쨌든 자기 학대, 시체 애호는 결코 재미있는 놀이가 아니다.
‘근면, 성실, 자조.’
장엄했다. 아니 우스웠다. 담당직원에게 그것을 가리켰더니 몹시 쑥스러워하며 말한다.
“좀 촌스럽죠?”
근면하고 성실하게 하는 관광사업이란 어떤 걸까. 짐작건대 이런 유가 아닐까. ‘찬란한 우리 민족의 고유 문화유산을 열심히 알려 세계인을 기절시켜버리자!’
하지만 아무리 팔이 안으로 굽는다 해도 찬란한 궁궐을 보고 기절하는 것은 베이징의 자금성이나 이화원에서 벌어질 일이지 경복궁 창덕궁으로는 상대가 될 것 같지 않다. 그럼 어쩌라고?
더 재미있는 곳만 죽어라 찾아가는 사람들
내 생각에는 그 기관의 교시와 정반대로 가면 될 것 같다. 즉, 근면하고 성실한 세상에서 이탈하는 것이다. 시골 노인도 해외관광 길에 나서는 대중관광의 시대가 아닌가. 제아무리 규모와 미학에서 앞질러가는 곳이 있어도 이제 사람들은 더 재미있는 곳만 찾아가게 돼 있다. 거대하고 심심한 자금성보다는 조촐하지만 까무러치게 재미있다면 관광객들은 경복궁 놀이를 선호할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그게 어디 관광에만 해당하겠는가.
문제는 표어의 촌스러움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멘털리티’에 있다. 그야말로 과도기 현상일 수도 있지만, 뇌리에 아니 모세혈관에까지 속속들이 각인된 산업사회가 도통 지워지지 않은 채 우리는 디지털 정보사회를 살고 있다. 근면 성실의 가치관은 근육과 기계의 힘으로 세상이 돌아가던 때의 덕목이다. 관광을 포함해 과거의 놀이란 고전적인 발달심리학으로 보면 ‘잉여에너지론’과 ‘휴식론’으로 설명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유한계층은 에너지가 남아돌아서, 생산계층은 힘겨운 노동에 소모한 에너지를 재충전하기 위한 방편으로 놀이며 여행을 추구했다.
‘펀경영’의 모범 사례로 꼽히는 아모레퍼시픽의 ‘굿타임 파티’
대체 창의성이란 무엇일까. 문화심리학자들은 그것을 ‘이미 존재하는 사물의 정보를 재배치해 낯설고 새롭게 보이도록 만드는 일’이라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창의적인 능력은 어떻게 생겨나는 걸까. 경영학자들은 그것을 ‘일과 놀이의 균형’에서 찾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말은 실제로 일은 줄이고 놀이시간을 더 많이 가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대로 놀아본 적 없기 때문에 놀면 불안
근면 성실을 지고의 가치로 받들며 개발시대를 건너온 한국인에게 이 같은 주문은 낯설고 황당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잘 놀아야 잘살 수 있다’니 이게 무슨 소린가. 정부가 나서서 반강제적으로 주5일제 근무를 시행했지만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샴페인을 일찍 터뜨려 IMF 체제를 맞았으니 이제라도 더 열심히 일해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생각한 것이다.
일이 즐겁고 노는 게 괴로울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도 여가의 확장을 문제삼는 것은 놀면 불안하게 느끼기 때문이다. 놀면 허무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한 번도 제대로 놀아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굳이 오늘날 한국인이 노는 법을 정의한다면 ‘자기 학대’와 ‘시체 애호’ 둘 중 하나라고 말하고 싶다. 평일엔 2차, 3차, 4차에 걸쳐 폭탄주를 들이붓고 노래방에 가서 목청을 찢는다. 주말에는 산을 찾아 이를 악물고 정상을 정복한다. 이것이 자기 학대다. 더 많은 사람들이 즐겨 하는 시체 애호는 말 그대로 무기력증에 빠져 마냥 빈둥빈둥 여가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당신은 다른가?
놀이가 창의성의 원천이라는 측면에서 생각을 펼쳐나가보자. 놀이란 일종의 시뮬레이션 같은 것이다. 실제 세계의 원리가 섞여들면 더는 놀이가 아니다. 예를 들어 프로선수가 하는 축구는 승리에서 오는 이득이 목적이지만 조기축구회 멤버라면 승패가 아니라 축구 자체가 목적이 된다. 만일 이기는 데 목숨 거는 멤버가 있으면 ‘강제 퇴출’시켜야 마땅하다.
요즘 부쩍 늘어난 별자리 애호가들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사진작가 윤광준이 증언하기를, 강원도 정선에 모이는 별 애호가들의 반응에서 한국인과 서양인의 모습이 너무나 다르다고 한다. 기다리던 성운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 서양인들은 예외 없이 “원더풀, 어메이징!” 하며 탄성을 지르고 즐거워하는 반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부분 심각한 표정으로 저것은 무슨 별, 또 저것은 몇호 별 하면서 알고 있는 과학지식을 확인하기에 급급하다는 것이다. 우리에겐 재미 자체를 추구하며 즐겨본 체험이 없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을 사로잡는 ‘비보이’ 공연.
열심히 노력한다고 사물을 다르게 볼 수 없어
여기서 우리는 한 하늘 아래 존재하는 두 개의 다른 공간을 떠올려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현실원리로 작동되는 생존의 공간이다. 생존공간에서는 더 열심히, 더 근면 성실하게 노력하는 사람이 보상을 받았다. 산업사회는 그렇게 해서 거대한 문명의 탑을 쌓아올렸다. 생산성을 위한 강제와 억압이 동원됐고 특히 자발적 강제를 위해 이데올로기라는 주술까지 발명해냈다.
하지만 인간의 삶에는 생존영역과 구별되는 또 하나의 세계가 존재한다. 그것은 외부의 모든 관계와 단절된 실존의 영역이다. 실존영역에서는 생존을 위한 고투가 무상한 것으로 여겨지기까지 한다. 실존적 자아의 눈으로 보면 사물의 의미와 가치가 다르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부모가 지어준 이름 대신 스스로 자기 아이디를 만들어 다른 인격체로 존재할 수 있는 사이버 공간, 비물질 부호 조작으로 생산-소비의 관계를 역전시킬 수 있는 프로슈머의 세상, 또한 그런 자립적이고 독자적인 존재들이 한없이 연결돼 있는 네트워킹의 세계, 이것은 인간의 실존영역이 확장된 것과 무척 흡사한 양상을 보인다. 생존적인 삶에 포개져 있으되 작동원리는 다른 것이다.
그 같은 다른 원리, 그것이 창의성이다. 산업사회인이 새로운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창의적인 존재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하지만 머리 싸매고 열심히 노력한다고 해서 창의적인 인간이 되는 것은 아니다. 사물을 다르게 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같은 하늘 아래 존재하는 다른 세상, 즉 생존논리와는 구별되는 실존의 영역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 실존의 세계 역시 무언가를 치열하게 추구하는 일이다. 하지만 그것은 눈앞의 현실적 이득을 취하는 것과는 다른 맥락의 치열함이다. 타인의 눈에 비친 그 모습은 마치 노는 것처럼 보인다. 노는 일은 재미가 있을 때만 몰두할 수 있다. 그러니까 진정으로 재미있게, 달리 말해 치열하게 논다면 이미 창의적인 삶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다. 허망할 정도로 간단한 결론이지만 세상의 모든 이론가들이 내리는 결론은 같다.
제대로 놀 줄 모르는 대가로 지금 우리가 치르고 있는 것이 10여 년째 이어지는 국가적 정체상태다. 열심히 근면 성실하게 노력해 세계 10위권의 경제규모를 이뤘지만 우리는 더 불행해지고 온갖 불만은 끝없이 늘어만 간다. 이 같은 정체상태에 대한 돌파구로 ‘더욱 열심히 일하자’라는 구호가 난무하고 있다. 그렇다면 중국 인도 브라질은 열심히 일하지 않는단 말인가. 만일 우리가 재미 자체를 목적으로 놀 줄 아는 첫 세대가 된다면, 이 땅에서 삶의 행복이 무엇인지 느껴본 최초의 한국인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혹시 모른다. 우리 다음 세대는 선진화 달성을 자축하며 샴페인을 터뜨릴지. 어쨌든 자기 학대, 시체 애호는 결코 재미있는 놀이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