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누리당 최경환 의원은 명실상부 친박(친박근혜) 좌장이다. ‘좌장(座長)’이라는 말은 과거 새누리당 김무성 전 대표가 친박계로 분류되던 시절 이후 잘 쓰지 않았던 말이다. 2인자를 두지 않는 박근혜 대통령의 스타일 때문이다. 따라서 김 전 대표는 한때 ‘좌장’ 노릇을 했지만, 이명박 정부 시절 원내대표로 발탁돼 타이틀을 내놓아야 했다. 서청원 의원이 좌장 대신 ‘맏형’으로 불리는 것도 그에게 친박계 의원을 조직화할 힘이 없기 때문이다.
5월 24일 정진석 원내대표와 김 전 대표, 그리고 최 의원의 3자 회동은 새누리당 권력의 세 축을 상징한다. 그중 단연 존재감이 큰 인물은 최 의원이다. 3자 회동 후 이들의 행보는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혁신비상대책위원회는 대표와 최고위원을 분리 선출하는 안을 냈고, 최 의원은 대구·경북(TK) 의원들과 ‘식사 정치’에 나섰으며, 김 전 대표는 대권 도전 의사를 간접적으로 밝혔다.
‘5·24 회동’ 물 건너가나
당사자들은 부인했지만, 당시 회동에서 모종의 합의안이 있었으리라는 관측이 당 안팎에서 끊임없이 제기됐다. ‘최경환 당권, 김무성 대권’이라는 공감대가 있었다는 것이다. 4·13 총선 과정에서 적대적 관계를 형성한 두 계파 거두의 ‘역할 분담’은 일단 현재진행형인 것으로 보인다. 특히 ‘최경환 당권’의 의미는 중요하다. 친박계가 대통령선거(대선) 과정에서 소외되지 않을 유일한 기회이기 때문이다. 그뿐일까. 친박계 인사들의 말을 종합하면 큰 그림이 하나 떠오른다. 요약하면 당권을 친박계가 장악한 후 대권을 창출하되, 차기 대통령의 힘을 빼놓아야 한다는 것이다.진박(진짜 친박근혜)으로 대구에서 당선돼 국회에 입성한 한국헌법학회장 출신의 정종섭 의원이 개헌 논의에 적극적인 것은 청와대 의중을 반영한 것이라고 친박 인사들은 말한다. 박 대통령의 ‘개헌 블랙홀’론은 현 정부에서 추진하지 말라는 가이드라인일 뿐이다. 개헌은 원래 친박계가 지핀 불이다. 친박 핵심인 홍문종 의원이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대선 출마를 전제로 이원집정부제를 제안했을 때 다른 친박 인사 사이에서는 ‘천기누설’이라는 말이 나왔다. ‘5·24 회동’의 한 축인 김 전 대표도 6월 20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기자들과 만나 “개헌은 내 소신”이라고 보조를 맞췄다. 최 의원도 사석에서 개헌 필요성을 부인하지 않는다는 전언이다.
정종섭 의원이 연내 개헌론 같은 다소 과격한 주장을 내놓은 배경에는 개헌 이슈로 차기 대선주자들을 얽으려는 포석이 깔려 있다. 차기 주자들이 개헌을 공약으로 내세우면 다음 대통령은 누가 되더라도 개헌 추진을 위해 힘을 소진할 수밖에 없다. ‘신(新)체제’에 앞선 ‘구(舊)체제’의 마지막 대통령이 된다. 차기 대통령의 힘을 빼려고 개헌을 추진한다는 논리다. 그래야 박 대통령도, 친박도 살 수 있다.
문제는 친박계가 이 같은 시나리오를 관철할 기획력과 함께 ‘세(勢)’가 있느냐 여부다. 아쉽게도 ‘5·24 회동’의 주역 3인은 ‘87년 체제’ 이후 정치적 공백기를 메우며 부상한 ‘3김’의 영향력과 비교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먼저 김 전 대표는 비박(비박근혜)계의 상징적 인물이긴 하나, 유승민 의원 같은 강력한 경쟁자와 겨뤄야 할 처지다. 당분간은 힘을 합할 수 있겠지만 보수성향이 강한 친김무성계와 ‘보수개혁’을 외치는 유 의원의 성향은 딱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최 의원은 친박 좌장이긴 하나 총선 참패 여파로 좀처럼 세를 불리지 못하고 있다. 6월 16일 유 의원 복당 승인 이후 추진된 친박계 회동에는 의원 6명만 화답했다. 세를 과시하고자 2차 회동을 추진했는데, 겨우 26명 모이는 데 그쳐 오히려 약해진 결속력을 드러내고 말았다. 친박계 의원이 70~80명 수준이라는 게 허수일 개연성이 높음을 방증한다. 만약 최 의원이 회동 조직에 간여했다면 좌장으로서 허상을 드러낸 것이고, 간여하지 않았다면 친박계에 대한 내부 통제가 먹히지 않는다는 뜻이 된다.
몸을 사릴 수 없는 딜레마
당권으로 가는 최 의원의 길도 험난하다. 당대표 경선과 최고위원 경선을 분리하면서 1인 선출직 쟁탈을 위한 양 진영의 계파 간 세 대결이 현실화됐지만, 친박계는 당권주자 교통정리에 애를 먹고 있다. 이미 호남지역 상징성을 내세운 박 대통령의 ‘복심’ 이정현 의원이 당권 도전을 기정사실화한 상태다. 그는 전국을 돌며 당원, 대의원을 만나고 있다. 계파 색깔은 엷지만 현 정부에서 장관을 지낸 이주영 의원도 당권 도전 의지를 보이고 있다.
변수도 있다. 친박계는 당초 유 의원 복당을 전당대회 이후로 상정했다. 박 대통령도 4월 26일 유 의원 등의 복당 문제를 두고 “앞으로 (새누리당이) 지도체제가 잘 안착되면 그때 협의해 판단할 문제”라고 했다. 전당대회 전 복당은 안 된다는 ‘당무 개입’성 발언이었다. 유 의원 복당 전에는 친박계에 대항할 인물이 마땅치 않았다. 최 의원은 느긋하게 전당대회를 준비하면 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비박계에 ‘구심점’이 생겼다. 유 의원의 복당은 ‘최경환 당권, 김무성 대권’의 ‘5·24 회동’ 질서를 깨뜨리는 것이었다. 친박계가 유 의원의 복당을 기를 쓰고 막으려 했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막 복당한 유 의원의 당권 도전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그가 특정 후보에 힘을 실어주면 판세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 특히 수도권 대의원들에게 미치는 파장은 만만치 않을 전망이다.
친박계가 ‘반기문 카드’를 선점해 ‘충청+
TK 연합론’으로 치고 나갔지만, 이정현 의원 등 후보가 난립하고 유 의원이 비박 후보를 적극 지원한다면 결과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 만약 최 의원이 당권 도전에 실패한다면 친박계는 내년 대선 과정에서 급류에 휩쓸리는 ‘낙동강 오리알’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최 의원과 친박계의 기세를 봤을 때 이 같은 복잡한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카드는 딱히 없어 보인다.
측근 및 자녀의 취업 특혜 의혹, 대구고 챙기기 의혹 등 현 정부 실세로 야당의 주요 타깃이 돼왔던 최 의원의 주변 상황도 녹록지 않다. 최근에는 롯데그룹 수사와 관련해 그가 몸담았던 대구고 동문모임 ‘아너스 클럽’의 멤버 노병용 롯데물산 사장과의 관계가 주목받고 있다. 실세인 최 의원이 힘을 쓴 덕에 롯데그룹이 2013년 세무조사 과정에서 솜방망이 처분을 받은 것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된다. 또한 KDB산업은행 부실감독 책임론도 부각된다. 아직은 잠잠하지만 경선 국면에 들어가면 ‘4·13 총선 패배 책임론’이 부상할 수밖에 없다. 몸을 사려야 하나 사릴 수 없는 딜레마에 빠진 최 의원의 전방 시계는 ‘제로(0)’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