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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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자의 문화유산 산책

한국미 널리 알린 이야기꾼

미술사학자 최순우

  • 문화재청 문화재위원 sjchoi5402@naver.com

    입력2016-06-27 14:3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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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는 최순우(1916~84)가 태어난 지 100주년이 되는 해다. 평생 박물관과 함께 살면서 한국의 미를 진솔하게 이야기한 사람이 최순우다. 그는 이야기꾼이었다. 한옥과 사랑방의 정갈한 목가구나 앞뒤뜰의 자생 꽃, 나무의 아름다움은 그의 이야기 속에서 재생됐다. 그가 신문과 잡지에 쓴 수많은 글은 우리 삶에서 스쳐가는 소재였다. 그림과 도자기, 건축과 목가구, 옷과 음식, 벽돌과 기와, 탈과 금관 등 갖가지 유산이 되살아났다.  

    4월 27일 100세를 기념하는 음악회가 최순우의 서울 성북동 옛집에서 열렸다. 6월 4일에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최순우 선생의 생애와 학문세계’를 기념하는 학술대회가 한국미술사연구소(소장 문명대) 주최로 열렸다. 강연회와 전시회도 이어졌다. 조촐히 살다간 문화인을 한 세대가 지나도 기억하는 것은 드문 일이다. 정양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은 “최순우 이전에 한국의 미, 한국의 마음을 글과 말로 대중에게 널리 심은 사람은 없었다”고 말한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애주가, 애연가, 미식가이며 검은색 무지양말과 줄무늬 코르덴바지를 멋스럽게 입었던 문학 지망생 최순우가 일제강점기, 해방기, 6·25전쟁 등 격동기에 박물관이라는 한 우물만 팠던 생애와, 하숙을 치며 남편을 뒷바라지한 개성 출신 부인 박금섬 여사의 내조는 풍부한 이야깃거리를 지녔다”고 인식을 같이한다.

    최순우는 개성 출신으로 송도고보를 졸업했다. 본명은 희순이나 간송 전형필이 순우라는 필명과 혜곡이란 아호를 지어줬다. 그의 박물관 생활은 고유섭 개성부립박물관장과 만난 1943년 시작된다. 45년부터 74년까지 국립박물관 학예연구실에서 29년간 일했고, 74년부터 84년까지 10년간 국립중앙박물관장을 맡았다. 박물관장으로서 그는 문화재보존기술실을 설치해 문화와 과학을 어울리게 하거나, 박물관회를 만들어 문화인과 박물관이 동행하는 길을 열었다. “그의 박물관 생활 40년은 국립중앙박물관의 창세기에 해당한다”고 지건길 후배 관장은 말한다.

    문화를 보는 최순우의 ‘눈맛’은 세대를 뛰어넘어 감칠맛이 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연말까지 여는 ‘최순우가 사랑한 전시품’전에 나온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달항아리, 분청사기 모란 무늬 편병, 고려 철조석가여래좌상을 보면 그의 감식안을 알 수 있다. 한국 문화의 상징인 반가사유상은 그의 설명으로 한국 역사 속에서 제 위치를 찾았고, 커다란 달항아리는 그의 이야기를 담아 영국박물관 한국실 등에 자리 잡았다. 그는 글을 만연체로 쓴다. ‘도설 한국미술오천년’(현암사·1978)과 ‘최순우전집’ 5권(학고재·1992)에서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글과 만난다.

    5월 18일 정양모 전 관장은 ‘최순우 선생의 박물관 사업과 한국미술사 연구의 의의란’이란 강연에서 “그분은 전통문화뿐 아니라 현대미술에도 관심의 폭이 넓었어요. 김기창, 김환기, 이대원, 이종상, 천경자, 이중섭, 이경성과도 가까웠죠. 또 한국미술평론가협회 대표도 맡았죠. 1960, 70년대 답사를 가면 으레 전통시장이나 토속민속품을 찾아보고 직접 본 것을 글로 썼어요. 호랑이 그림 꽃방망이도 제주 풍물시장을 둘러보다 발견했죠”라고 회고했다. ‘최순우가 사랑한 전시품’전을 맡은 오다연 학예사는 “초중고 학생은 최순우 전 관장님을 잘 모릅니다. 대학생은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의 저자로 알고 있죠. 전시품 해설을 최 전 관장님 글에서 따왔는데 젊은 층은 만연체 글을 읽기 어려워해요”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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