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요즘 추천서를 읽느라, 그리고 추천서를 써주느라 바쁘다. 추천의 계절이 돌아온 것이다. 이제는 대학입시나 대학원 입시 모두에서 추천서가 빠지지 않으며, 또 그것은 학생을 평가하는 중요한 자료로 활용된다. 제대로 된 추천서를 읽으면 두 가지 상(像)이 떠오른다. 하나는 추천대상 학생의 이미지고, 다른 하나는 추천한 분의 성격이나 기준이다.
그런데 추천자와 피추천자의 모습이 전혀 떠오르지 않는 추천서도 종종 있다. 우리나라의 추천서는 대부분 천편일률적이어서, 특히 대학입시 수시모집에서 받아본 추천서들에는 ‘이 학생은 성적이 우수하고, 품행이 방정하며, 책임감과 봉사정신이 투철하다’는 기본 가락에 약간씩의 수사가 보태지기는 하지만, 기본 요지는 똑같다. 모두 영화에나 나오는 슈퍼맨과 슈퍼우먼들뿐이다. 도대체 추천서를 읽어서는 이 학생이 어떤 사람인지 현실적 이미지도 떠오르지 않고, 추천한 분의 체취나 기준을 느끼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그래서 추천서를 담임교사가 직접 작성한 것인지 의심되기까지 한다.
거기에다 내신성적까지 부풀려져 있어 심한 경우에는 과목에 따라 학생 대부분이 ‘수’를 받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추천서와 내신을 가지고 학생들을 선별하는 일은 괴롭기만 하다. 그래서 추천전형은 분명 우리 교육문제를 풀어갈 묘안인데도 전혀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적당히, 혹은 학생들이 손수 채워버린 그 빈 자리를 단시간의 면접과 수능점수가 메우게 된다.
서로의 평가를 신뢰하지 못하는 사회에서 ‘질적’ 평가는 아예 불가능해진다. 그리고 점수를 기반으로 한 획일성이 ‘공정성’의 이름으로 지배하게 된다. 그 와중에 점수에 따른 줄 세우기 논쟁과, 줄 세우기를 없애기 위해 수능석차분포를 비밀로 덮어두려는 교육당국의 방침은 ‘눈 가리고 아옹’식의 처방이 될 수밖에 없다.
흔히 우리는 스스로 우리 사회의 운명을 만들어 나가는 데 일조하면서도 그것을 눈치채지 못할 때가 많다. 대부분의 사회현상은 미시적 개인들의 믿음과 관행이 모아져 낳은 거시적 결과인 때가 많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추천서 문화가 정착된다면, 우리 사회의 교육문제는 상당부분 해결될 수 있다. 사실 추천서는 추천자가 오랫동안 관찰한 피추천자의 능력이나 품성에 대해 솔직하고 자세한 정보를 평가자에게 전해주어, 일회성 필기시험이나 면접만으로는 알기 어려운 깊이 있는 정보에 접할 수 있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사회적 신뢰야말로 추천서 문화가 정착하는 기초가 된다. 직접적인 안면관계가 없는 제삼자에게 자신의 제자에 대한 공정한 질적 평가정보를 제공하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선별과정에서 불필요한 시간과 노력의 낭비를 줄일 수 있다. 그래서 사회적 신뢰가 정착된다면, 대학은 별도의 시험을 치르지 않고도 추천받은 학생들만으로 정원을 채울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 외국 대학들이 학생을 선별하는 과정은 이러한 방식에 크게 의존한다. 대학은 고등학교 교사들의 추천을 진지하게 검토하고, 교사들은 자신의 평가에 최대한 자세하고 공정한 평가정보를 담고자 노력한다. 엉터리 정보로 학생을 추천한 경우, 다음 번 입시에서는 유무형의 제재가 가해지므로, 각 고등학교는 자신들의 명성과 평판을 관리하기 위해서라도 성실한 추천을 하게 된다. 학부모와 대학이 추천하는 교사를 믿게 되면 교육현장에서 교사의 권위가 서고, 교실붕괴를 막을 수 있다. 오랜 기간 학생과 생활하며 관찰한 교사의 평가보다 더 정확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올 겨울에도 나는 추천서를 써주느라 바쁘다. 국내외 석·박사과정에 진학하려는 제자들의 부탁 때문이다. 빈 추천서를 앞에 두고 나는 한참을 생각한다. 얼마나 오랫동안 이 학생과 인연을 맺었는지, 그의 장단점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의 열망은 무엇인지. 그리고는 고심해서 빈칸을 채운다. 내가 모르는, 그러나 나와 같은 고민을 할, 내 추천서를 읽게 될 또 다른 동료를 생각하면서.
그런데 추천자와 피추천자의 모습이 전혀 떠오르지 않는 추천서도 종종 있다. 우리나라의 추천서는 대부분 천편일률적이어서, 특히 대학입시 수시모집에서 받아본 추천서들에는 ‘이 학생은 성적이 우수하고, 품행이 방정하며, 책임감과 봉사정신이 투철하다’는 기본 가락에 약간씩의 수사가 보태지기는 하지만, 기본 요지는 똑같다. 모두 영화에나 나오는 슈퍼맨과 슈퍼우먼들뿐이다. 도대체 추천서를 읽어서는 이 학생이 어떤 사람인지 현실적 이미지도 떠오르지 않고, 추천한 분의 체취나 기준을 느끼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그래서 추천서를 담임교사가 직접 작성한 것인지 의심되기까지 한다.
거기에다 내신성적까지 부풀려져 있어 심한 경우에는 과목에 따라 학생 대부분이 ‘수’를 받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추천서와 내신을 가지고 학생들을 선별하는 일은 괴롭기만 하다. 그래서 추천전형은 분명 우리 교육문제를 풀어갈 묘안인데도 전혀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적당히, 혹은 학생들이 손수 채워버린 그 빈 자리를 단시간의 면접과 수능점수가 메우게 된다.
서로의 평가를 신뢰하지 못하는 사회에서 ‘질적’ 평가는 아예 불가능해진다. 그리고 점수를 기반으로 한 획일성이 ‘공정성’의 이름으로 지배하게 된다. 그 와중에 점수에 따른 줄 세우기 논쟁과, 줄 세우기를 없애기 위해 수능석차분포를 비밀로 덮어두려는 교육당국의 방침은 ‘눈 가리고 아옹’식의 처방이 될 수밖에 없다.
흔히 우리는 스스로 우리 사회의 운명을 만들어 나가는 데 일조하면서도 그것을 눈치채지 못할 때가 많다. 대부분의 사회현상은 미시적 개인들의 믿음과 관행이 모아져 낳은 거시적 결과인 때가 많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추천서 문화가 정착된다면, 우리 사회의 교육문제는 상당부분 해결될 수 있다. 사실 추천서는 추천자가 오랫동안 관찰한 피추천자의 능력이나 품성에 대해 솔직하고 자세한 정보를 평가자에게 전해주어, 일회성 필기시험이나 면접만으로는 알기 어려운 깊이 있는 정보에 접할 수 있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사회적 신뢰야말로 추천서 문화가 정착하는 기초가 된다. 직접적인 안면관계가 없는 제삼자에게 자신의 제자에 대한 공정한 질적 평가정보를 제공하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선별과정에서 불필요한 시간과 노력의 낭비를 줄일 수 있다. 그래서 사회적 신뢰가 정착된다면, 대학은 별도의 시험을 치르지 않고도 추천받은 학생들만으로 정원을 채울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 외국 대학들이 학생을 선별하는 과정은 이러한 방식에 크게 의존한다. 대학은 고등학교 교사들의 추천을 진지하게 검토하고, 교사들은 자신의 평가에 최대한 자세하고 공정한 평가정보를 담고자 노력한다. 엉터리 정보로 학생을 추천한 경우, 다음 번 입시에서는 유무형의 제재가 가해지므로, 각 고등학교는 자신들의 명성과 평판을 관리하기 위해서라도 성실한 추천을 하게 된다. 학부모와 대학이 추천하는 교사를 믿게 되면 교육현장에서 교사의 권위가 서고, 교실붕괴를 막을 수 있다. 오랜 기간 학생과 생활하며 관찰한 교사의 평가보다 더 정확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올 겨울에도 나는 추천서를 써주느라 바쁘다. 국내외 석·박사과정에 진학하려는 제자들의 부탁 때문이다. 빈 추천서를 앞에 두고 나는 한참을 생각한다. 얼마나 오랫동안 이 학생과 인연을 맺었는지, 그의 장단점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의 열망은 무엇인지. 그리고는 고심해서 빈칸을 채운다. 내가 모르는, 그러나 나와 같은 고민을 할, 내 추천서를 읽게 될 또 다른 동료를 생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