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0년대 삼국지 열풍의 진원지는 대학입시였다. 해마다 수석 합격생들이 입을 맞춘 듯 삼국지 효과를 언급했던 것이다. 그 수혜를 가장 많이 누린 것은 민음사의 이문열 삼국지(전10권)였다. 88년 초판 발행 이래 지금까지 1400만부가 팔렸다.

어린 나이에 삼국지를 읽으면 애늙은이가 된다는 말이 있다. 세상 이치와 물정에 너무 일찍 눈뜨는 것이 비교육적이라고 해서 조선시대에는 어린 친구들이 삼국지 읽는 것을 금했다고 한다. 거꾸로 삼국지는 초등학교, 늦어도 중학교 수준에서 읽을 책이지 고등학생이 삼국지를 필독서로 삼는 현실은 그만큼 한국 학생들의 빈약한 독서실태를 반영한 것 아니겠느냐는 지적도 있다. 어쨌든 대학입시는 30~40대 남성이 주류였던 삼국지 독자의 저변을 확대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연령층이 크게 낮아진 것은 물론, 역사소설이나 무협소설을 선호하지 않는 여학생들까지 삼국지를 접할 기회가 생겼다.

서로 다른 판본들을 비교해 가며 읽는 삼국지 애호가들의 독특한 독서패턴 때문에 출판시장에는 매년 새로운 종의 삼국지가 등장하고 있다. 사실 출판사 입장에서 삼국지는 놓치기 아까운 대어다. 삼국지 한 질 없는 집이 없을 만큼 많이 팔렸다지만 매년 50만~60만부의 새로운 삼국지 시장이 형성되고 있다. 앞서 밝혔듯, 다 아는 이야기라 해도 ‘다른 맛’을 원하는 독자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삼국지 시장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던 이문열 삼국지가 최근 판매가 주춤한 점도 새로운 삼국지 출판에 기회가 되고 있다. 이문열 삼국지는 워낙 많은 사람이 이미 읽었거나 소장하고 읽기 때문에 신규 독자층이 형성되지 않고 있다. 이런 점을 의식해 이문열씨는 유비 이후 이야기를 대폭 보강해 2~3권을 더 늘린 삼국지를 준비중이다.
새로운 삼국지의 등장에는 출판사의 상업적 계산뿐만 아니라 스스로 삼국지마니아인 작가들의 집필의욕도 크게 작용한다. 최근 열림원에서 삼국지를 낸 조성기씨는 “그동안 번역된 삼국지 가운데 단연코 삼국지는 없다”는 주장을 펴 화제가 되었다. 이 말의 배경에는 우리나라에서 번역된 삼국지들이 대부분 ‘삼국지연의’를 다시 각색하여 내놓은 작품들로 삼국지 원본을 정확하게 번역한 책이 거의 없다는 작가의 판단이 있었다.

30대 이상의 독자들이 가장 먼저 접한 것은 박종화의 소설 삼국지일 것이다. 대현출판사는 99년 개정판을 내면서 “젊은 작가들의 삼국지가 전자밥통에 쪄낸 밥이라면 박종화의 삼국지는 무쇠솥에 장작 지펴 구워낸 밥”이라는 말로 신세대 삼국지와의 차별성을 강조했다. 역사소설의 대가답게 사건 중심으로 물 흐르듯 읽히는 것이 박종화 삼국지의 특징. 그러나 74년 김구용 삼국지가 정본완역을 들고 나오면서 정통성을 주장했고, 88년 이문열의 평역(각색) 삼국지가 나오기 전까지 삼국지를 대표했다. 그 밖에도 김동리, 정비석, 박정수, 황병국, 김홍신, 정소문, 한무희 등의 삼국지가 각축을 벌였다. 여기에 조성기에 이어 내년에는 황석영과 장정일씨까지 가세하니 삼국지 군웅할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편 지난해 동방미디어에서 펴낸 ‘소설 삼국지’는 완역이나 평역 수준을 떠나 전혀 새로운 각도에서 삼국지를 본 책이다. 저자 이 재운씨는 “나는 단지 재미를 위해 이소설을 쓰지 않았다. 우리나라 소설가로서 삼국지가 숨기고 있는 중국인(한족)들의 음모를 벗기기 위해 쓴다”고 밝혔다. 그는 농경정착민족과 유목이동민족 간의 대결로 삼국지를 재구성했으나, 독자들은 원전에 충실한 삼국지를 더 선호했다.
한국 작가는 삼국지를 쓴 작가와 쓰지 않은 작가, 이미 쓴 작가와 앞으로 쓸 작가로 나뉜다는 말이 있다. 여기에 ‘다르게 읽는 삼국지 이야기’나 ‘의리로 본 삼국지’ ‘만화 삼국지’ ‘삼국지 기행’ ‘나관중도 몰랐던 삼국지 이야기’ 등 파생상품까지 포함하면 작가와 독자층은 더욱 넓어진다. 21세기 정보화 시대에 군신의 의리와 충성심 등 전근대적 인간관계를 강조한 삼국지 열기가 아이러니컬하지만, 삼국지는 새로운 세기에도 살아남을 문화상품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