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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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재현의 심중일언

“제 묘비명에 한 글자만 새기라면 ‘낭비할 비(費)’를 새기겠습니다”

고려대 심경호 교수 | 올봄 합쳐서 3000쪽 분량 책 3권 동시 출간한 노학자의 한마디

  • |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입력2018-06-05 13:4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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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해윤 기자]

    [박해윤 기자]

    “저는 한문학을 없애버리기 위해 한문학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귀를 의심했다. 근면 성실한 한문학자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그의 입에서 도저히 나올 소리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올봄에도 나란히 3권의 두툼한 책을 펴냈다. ‘안평 : 몽유도원도와 영혼의 빛’(1224쪽) ‘김삿갓 한시’(900쪽), ‘내면기행’(768쪽)이다. 괄호 안의 쪽수가 말해주듯 한 권 한 권이 방대한 책들이다. 

    ‘안평’은 1985년 일본 교토대 유학 시절 접한 ‘몽유도원도시화권’을 종합 기획한 안평대군에 관한 자료를 집대성해 28년만에 완성한 평전이다. 세종의 셋째 아들이던 안평대군은 ‘동국정운(東國正韻)’ 등 당시 혼란스러운 한자음을 표준화하는 작업을 맡으면서 단순히 서예의 대가를 넘어 조선 초 한시(漢詩)의 완성자로 우뚝 섰다. 한시는 과거시험의 답안 작성을 위해 조선시대 엘리트가 익혀야 할 필수 교양이었지만 수만 자나 되는 한자의 발음을 106운으로 체계화해 암기하려면 10여 년간 각고의 노력이 필요했다.

    달팽이처럼 느리지만 꾸준히

    [사진 제공 · 알마]

    [사진 제공 · 알마]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당나라 시절 중국어 발음에 기초한 106운의 한국어 발음을 표준화하기 위함이었다. 이를 완성해 조선 왕실에서 유일하게 자유자재로 한시를 지을 수 있었던 안평대군은 실로 막강한 문화 권력을 손에 쥐고 있었던 셈. 훗날 세조가 되는 그의 둘째 형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키면서 문자향서권기(文字香書卷氣)에 취해 있던 안평대군을 역모 주역으로 몰아 강화도로 유배 보냈다가 결국 사사했다. 그는 이를 “조선시대 엘리트층에 대한 안평대군의 문화 권력을 시기하고 경계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제29회 김달진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된 ‘김삿갓 한시’는 ‘안평’ 대척점에 선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안평대군이 조선 초 한시의 완성자였다면 김삿갓은 조선 말 한시의 해체자였기 때문이다. 심 교수는 김삿갓의 시로 알려진 480여 편의 한시를 분석해 김삿갓이 조선시대 엘리트의 전유물이던 한시를 통속화하는 방식으로 그들의 문화 권력을 풍자하고 현실을 비판한 방랑시인의 결집체임을 규명했다. 

    거기엔 오늘날 김삿갓의 대명사가 된 김병연(1807~1863), 경기 광주 출신인 김난(金鸞), ‘함경도의 한삼택’, 김사립, 김대립, 김초모, 그리고 1930년대 말까지 생존했던 인물까지 포함된다. 더 나아가 이들 무명시인들을 한 명의 민중시인으로 형상화해 ‘조선의 이시카와 다쿠보쿠(石川啄木)’로 삼고자 했던 1930년대 식민지 조선 지식인들의 열망의 산물로서 ‘김삿갓=김병연’의 신화가 만들어진 과정을 추적했다. 

    앞의 두 책이 조선시대 문화 권력의 상징으로서 한시의 완성과 해체를 다뤘다면 ‘내면기행’은 그 두 시대를 관통하는 내밀한 산문기록을 다루고 있다. 고려 말~조선 말 자신의 묘비명을 스스로 쓴 선비 58명이 죽음의 문제에 어떻게 대처했는지를 농밀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자화상으로 유명한 표암 강세황과 퇴계 이황, 다산 정약용이 포함된 거기엔 육체적 죽음 이후 잊히는 것에 대한 조바심이나 현실과 이상의 간극을 좁히지 못한 것에 대한 한탄이 교차하는 드라마가 담겼다. 2009년 발표했던 작품을 대폭 개정해 새롭게 내놓은 책이다. 

    이 3권을 포함해 지금까지 그의 단독 저술이 30여 권, 공저는 70여 권, 번역은 40여 종에 이르는 한문학자. 바로 고려대 한문학과의 심경호 교수다. 심 교수는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대학원 시절 통학버스에서 책을 보던 습관 탓에 오른쪽 눈 망막이 손상돼 30여 년간 한쪽 눈으로 책을 봐왔다. 2010년 뇌종양 수술을 두 차례 받은 뒤로 오른쪽 귀가 안 들리기 시작했다. 정년이 2년 남았지만 왼쪽 눈과 왼쪽 귀에 의지하면서 한문학 텍스트를 번역하고 해석하는 작업을 쉼 없이 해오고 있다. 

    5월 30일 서울 성북구 고려대 안암캠퍼스 구법관 3층에 있는 그의 ‘와각서실(蝸角書室)’을 찾았다. 30m²(약 9평) 크기의 연구실에 책이 가득 쌓여 있어 한 사람이 간신히 지나다닐 정도의 통로만 난 것이 ‘달팽이 뿔’ 같다고 해 지어진 이름이다. 올해 나란히 나온 3권의 책이 주로 집필된 공간이기도 하다. 거기서 매우 다양한 그의 학문적 성과의 줄기를 잡아보고 싶었다. 그런데 한문학을 없애버리기 위해 한문학을 시작했다니. 

    “1970년대 서울대 국어국문학과를 다니던 시절 국문학에서 한문학은 아예 제외돼 있었어요. 그러다 경성제대 법문학부 출신으로 훗날 남로당 간부로 처형된 천태산인 김태준이 1931년 스물여섯 나이에 쓴 ‘조선 한문학사’를 읽었습니다. 그 발문에 ‘전통은 골동품에 지나지 않아 크게 중요하지 않지만 누군가 그 결산보고서를 써야 했기에 이 책을 썼다’라는 내용이 들어 있었어요. 크게 공감했습니다. 다만 그 결산보고서가 너무 엉성해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런데 당시 제 지도교수가 정병욱 선생(윤동주의 연세대 후배로 그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발간한 주역)이었는데 그즈음 한문학을 국문학에 편입시켜야 함을 절감하고 저에게 교토대 유학을 권하셨어요. 그래서 ‘미완의 결산보고서를 내가 완성하자’는 심정으로 일본 유학을 떠났습니다.” 

    그는 교토대에서 청대의 고증학을 배우면서 ‘신실증주의’에 눈을 뜬다. 실증주의라는 게 서구 제국주의의 산물이라 경원시하던 그는 고증학과 문헌학을 배우면서 한문학이 엄청난 가치를 지닌 골동품임을 발견했다.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한문학의 진가를 다시 일깨워준 스승이 위당 정인보의 학맥을 이은 불교학자이자 동양사학자였던 서여 민영규(1915~2005)였다. 심 교수는 일본 유학을 다녀온 뒤 1989년 4월부터 한국학중앙연구원(옛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로 재직하면서 위당의 딸 정양완 선생을 통해 ‘강화학 최후의 광경’을 펴낸 서여를 알게 된 후 문사철(문학·역사·철학)을 아우르는 조선 지성사에 비로소 눈을 뜨게 됐다고 밝혔다. 

    “한문학의 최고봉이 한시입니다. 이게 단순한 서정시가 아닙니다. 1980년대 문학이론의 잣대였던 게오르그 루카치의 반영론에 따르면 최고의 문학은 서사문학이며 서정시는 그보다 질적으로 떨어진다고 봤습니다. 루카치가 말한 서정시는 독일 특정 시기의 특정 장르를 지칭한 것이었고, 한시는 그렇게 감상적인 장르가 아닙니다. 거기엔 오늘날 인문학이라 칭하는 문학·역사·철학이 다 녹아 있습니다. 바로 ‘중용’에 등장하는 박학심문(博學審問·널리 배우고 자세히 묻는다)의 세계입니다. 양명학을 기초로 그 박학심문의 세계에 천착한 강화학파야말로 그러한 전통의 진정한 계승자였습니다.”

    한문학이란 골동품의 진가와 한계

    문제는 그 박학심문의 세계로 들어가는 진입장벽이 너무 높다는 데 있었다. 앞에서 언급했던 한시를 지을 수 있으려면 당나라 때 중국어 발음에 기초해 3만5000자의 한자를 머릿속에 106운으로 딱딱 분류할 수 있어야 했고, 과거 문사철에 대한 해박한 지식(典故)도 갖춰야 했다. 

    “조선 왕실에서 자유자재로 한시를 지을 수 있었던 최초의 인물이 안평대군이었습니다. 한시를 짓는 데 필요한 압운과 평측, 구법 등의 외재율이 우리말에는 없었고, 그마저도 현실음이 아니라 당나라 시대 중국어 발음을 따르는 이상적 독서음에 기초한 것이라 익히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세종도 엄두를 못 냈던 것을 안평대군이 해낸 거죠. 그래서 수양은 이를 질투했던 것이고. 후대에 천재로 소문났던 정약용도 한시 작법을 익히는 데 5년이란 세월이 필요했습니다. 그런 정약용도 과거시험을 통과할 때 경전에 대한 논술로 합격한 생원이지, 한시 문장으로 합격한 진사가 아닌 점에 콤플렉스가 컸습니다. 그래서 자찬묘지명에 자신이 진사 출신이라고 자신의 기억까지 조작합니다.” 

    조선왕조의 엘리트 충원 방식은 바로 과거를 통해 이런 한시에 능통한 자를 뽑는 것이었다. 백성들의 자유로운 의사소통을 위해 한글을 창제한 세종은 자신이 한시를 짓지는 못했지만 그 오묘한 세계에 대해선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안평대군을 내세워 한시를 지을 때 106운에 맞도록 중국어의 현실음과 독서음을 정비하게 한 것이다. 

    “한시에 쓰이는 독서음은 현실음과 다른 이상적 언어였습니다. 과거의 라틴어나 오늘날의 에스페란토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문제는 한자가 워낙 많은 데다 중국어에 있는 4성 체계가 더해져 오늘날 사법고시처럼 수많은 세월을 들여 암기해야 비로소 터득이 가능하다는 데 있었습니다. 한시 본고장인 중국에서도 이를 감당할 수 없어 현실음을 따르는 백화문체계로 간 것이죠. 이를 수입한 조선에선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더 클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입시출세를 위한 등용문으로서 과거시험을 양반뿐 아니라 평민에게도 열어두고 있었기에 나라의 동량이 될 사람들이 너도나도 일상의 삶과 철저히 유리된 이상향의 변두리를 맴돌게 되는 문제를 초래했습니다.” 

    김삿갓으로 통칭되는 방랑시인들은 문화 권력의 자장 밖으로 퉁겨진 아웃사이더였다. 한시체계라는 내부 논리에 정통하면서도 외부에서 겉돌게 된 그들의 눈에는 그 체제의 불합리성과 모순이 고스란히 보였다. 그들은 자신이 배운 한시 형식에 대한 파격과 해체를 통해 모순을 표현해냈다는 것이 심 교수의 통찰이다. 

    “김삿갓의 시라고 알려진 한시들은 과거시험용 시인 과시(科詩)에 정통하면서도 그 형식을 비틀고 통속화합니다. 우리말과 한자를 뒤섞은 육담풍월의 형식을 창안한 것이 대표적입니다. 한마디로 파격적 희작(戱作)을 펼친 거죠. 혁명적 변화라고 할 수는 없어도 형식에 대한 반항이 펼쳐진 겁니다. 안평대군이 기초한 한시체계가 김삿갓에 의해 해체되기 시작한 겁니다.”

    한국한문학사의 완성을 꿈구며

    [박해윤 기자]

    [박해윤 기자]

    조선시대로 국한하면 안평대군에서 김삿갓, 시대를 더 확장하면 최초의 한시 시인이었던 최치원에서 조선 한시의 최고봉으로 불린 조선 말의 이건창까지 한시의 알파와 오메가를 섭렵한 심 교수는 이제 최종 목표를 향하고 있다. 젊은 날 호기롭게 말했던 결산보고서로서 ‘한국한문학사’ 집필이다. 

    물론 거기엔 한시만 포함된 것이 아니다. 조선의 4대가로 불리던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이서구는 한시의 대가가 아니라 산문의 대가였다. 심 교수는 한문 산문을 대상으로 최초의 논문을 발표한 한국학자 가운데 한 명이었다. 또 그가 명말청초의 문인 원굉도의 10권짜리 문학작품 전집(‘역주 원중랑집’)의 번역과 역주를 단 것 역시 원굉도가 허균, 박지원, 박제가, 정약용, 이덕무, 유득공 등 17~18세기 조선 문장가들의 역할 모델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한문학의 대상으로 삼은 산문은 문학성 높은 글만이 아니다. 고구려 광개토태왕비부터 조선시대 자찬묘비명까지 당대의 삶과 죽음을 기록한 다양한 텍스트를 아우른다. ‘내면기행’은 그런 분투의 산물이었다. 

    “제가 이 책을 기획할 때 유학자는 ‘삶을 모르면서 어찌 사후의 일을 논하겠는가’라는 공자의 가르침에 따라 죽음의 문제에 달관한 사람들이라 별 의미가 없을 것이란 얘기를 들었습니다. 하지만 주자학의 비조인 주희의 스승이자 선승이던 대혜 종고(大慧宗杲)가 ‘사대부들은 지금의 시각이 세밑(섣달그믐)이라는 것을 모르고 발밑의 대사인연(大事因緣)을 소홀히 한다’고 질타했다는 글을 읽고 돌파구가 열리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들도 우리와 같은 사람인데 어찌 죽음의 문제에 쉽게 달관할 수 있었으랴 하고 자찬묘비명을 읽어보니 그들도 우리 같은 인간이었음이 드러나더군요.” 

    심 교수는 그들의 고민이 ‘사기’를 쓴 사마천의 문제의식과 공명한다고 봤다. 죽음에 대처하기 어렵다는 ‘처사자난(處死者難)’이란 화두다. 대의를 따라 죽으려다 살아남아 천하의 명재상이 된 관중, 평생 실리만 추구하다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은 이사, 그리고 궁형(거세형)을 당한 치욕 속에 죽지 않고 살아남아 ‘사기’를 집필하고 있는 사마천 그 자신…. 

    “이 땅의 사대부들 역시 그 내면으로 들어가 보면 지향(이상)과 행사(현실)의 모순과 괴리를 절감하면서 대한(大限) 속에서 그 간극을 줄이고자 몸부림치는 것이 인생이라는 깨달음을 보여줍니다. 또 ‘잊히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조바심이 곳곳에 드러납니다. 자찬묘비명을 쓴다는 것 자체가 다른 사람의 기억 속에 남고 싶다, 올바르게 평가받고 싶다는 욕망의 발현 아니겠습니까.” 

    그중에는 다산처럼 콤플렉스를 이기지 못해 기억까지 조작하는 사람도 있고, 영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이의현처럼 자신의 관직을 죽 나열하는 방식으로 벼슬길에서 자신이 겪은 평지풍파를 넌지시 알리는 사람도 있다. 구한말 학자 간재 전우처럼 스승이 내린 주역의 간(艮)괘에 맞춰 평생을 은인자중하며 살아갔음을 역설하는 이도 있고, 조선시대 가장 방대한 백과사전 ‘임원경제지’를 집필했음에도 ‘인생을 낭비한 죄’가 크다며 자신의 인생 키워드로 ‘비(費)’를 내세운 풍석 서유구 같은 이도 있다. 심 교수는 누구의 묘비명이 가장 와 닿았을까.

    극(克) 벌(伐) 원(怨) 욕(欲)을 넘어

    [박해윤 기자]

    [박해윤 기자]

    “우리의 자찬묘비명을 보면 서양의 고백문학에 보이는 죄의식이 없습니다. 인생을 살면서 자신이 저지른 은밀한 잘못을 고백하는 경우를 거의 찾을 수 없습니다. 사대부로서 항상 떳떳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도덕주의의 부작용이기도 합니다. 영화 ‘빠삐용’에서 주인공 빠삐용이 꿈속의 재판정에서 인정한 죄를 똑같이 인정한 서유구의 묘비명이 제 심금을 울렸습니다. 저 역시 이것저것 공부한답시고 가족을 돌보는 의무를 등한시하고 인생의 참맛을 제대로 맛보지 못했다는 점에서 서유구와 같은 죄를 지었다고 생각합니다.” 

    올해 펴낸 책의 분량을 합치면 3000쪽이나 되는 저자의 말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대답이었다. 사실 ‘내면기행’은 그의 인생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된 징크스 같은 작품이다. 죽음은 영원한 타자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처음 이 책을 완성한 직후 뇌종양 수술을 받았고, 올해 다시 책을 출간한 뒤 가장 아끼던 제자 중 한 명이 암이 재발해 숨졌다. 

    “ ‘내면기행’은 제가 이만하면 됐다고 방심하거나 게을러질 때마다 제 영혼을 내리치는 죽비 같은 책입니다. 책의 표지사진이 검은 묘비석에 빗방울이 맺힌 것인데, 이걸 볼 때마다 겸손해집니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죄의식이 없다고 했는데, 여성이던 사주당 이씨는 ‘논어’를 인용해 당파싸움에 몰두한 그들의 죄가 극(克), 벌(伐), 원(怨), 욕(欲)에 있다고 갈파했습니다. 무릎을 치게 만드는 탁견입니다. 극은 이김질하려는 마음, 벌은 자랑질하려는 마음, 원은 남 탓하는 마음, 욕은 탐욕을 말합니다. 저 역시 이 네 가지 죄에서 자유롭지 못한 사람입니다. 이렇게 인터뷰에 응한 것도 남들에게 이김질하고 자랑질하려는 마음 때문 아니겠습니까.(웃음) 그중에서 가장 나쁜 게 노욕(老欲), 꼰대질 아닐까 합니다. 제가 이미 갖고 있는 것을 조금도 뺏기지 않고 더 많이 쌓으려는 마음이죠. 그래서 이제 마음을 비우고 초심으로 돌아가 (한문학) 결산보고서의 뼈대라도 만드는 일에 집중하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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