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샤라프-미국 손잡은 뒤 파키스탄 자유전사 고립

지도상으로 보면 이슬라마바드에서 파키스탄령 카슈미르의 주도인 무자파라바드까지의 직선거리는 얼마 되지 않는다. 도로 길이도 150km 남짓이다. 그러나 가파른 고갯길, 깎아지른 절벽길 등 산악지방 특유의 험한 길을 5시간쯤 내달려야 한다.

그러나 막상 카슈미르주 경계선 안으로 들어서자 각종 규제가 많았다. 우선 사진을 마음대로 찍을 수 없었다. 모든 지형지물을 군사시설물로 여기는 까닭이다. 특히 교량 등 주요 시설물을 향해 카메라를 들이대는 것은 금기였다.
인구 380만명인 카슈미르의 주도 무자파라바드 입구에 들어서면서 일단의 시위대를 만났다. 그곳 잠무카슈미르 대학 학생들이 주축인 그들은 “인도 정부는 이슬람교도들의 인권을 탄압하지 말라”는 구호를 외치며 UNMOGIP 초소(돔멜 초소)까지 시위를 벌였다. 무슬림 여성들이 쓰는 차도르를 두르고 두 눈만 내놓은 채 시위대를 이끄는 한 여학생은 마이크로 “카슈미르인에게 자유를!”이라고 되풀이해 외쳤다.
시위행렬에 참여한 잠무카슈미르 대학 영문과 타크디스 길라니 교수(35ㆍ여)를 다음날 따로 만났다. ‘HOPE’라는 이름의 지역 인권단체 대표를 맡고 있는 그는 “국제사회가 카슈미르 사람들의 인권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입을 열었다. ‘테러와의 전쟁’으로 체첸족이나 위구르족의 인권이 실종됐듯, 카슈미르인들의 인권도 실종되고 있다는 주장이었다. 무샤라프 장군이 미국과 손잡은 뒤부터 인도로부터의 분리독립을 원하는 파키스탄 ‘자유 전사’들이 설 땅을 잃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는 파키스탄의 실권자 무샤라프 장군이 반(反)탈레반 쪽으로 돌아선 것은 “파키스탄의 국익을 위해선 잘한 일”이라면서도 “카슈미르인들이 테러와의 전쟁에서 희생양이 돼서는 안 된다”는 논리를 폈다.

올 1월 들어 무샤라프 장군은 인도 뉴델리 국회의사당 테러사건(2001년 12월)의 배후로 꼽히는 5개 이슬람 과격단체의 활동을 금지했다. 이에 따라 파키스탄 내 양대 이슬람 과격단체인 수니파의 시파-이-사하바와 시아파의 테리크-이 자프리아, 테리크-니파즈-이-샤리아트의 활동이 금지된 한편, 카슈미르의 이슬람 무장단체인 자이쉬-이-무하마드, 라쉬카르-이-타이바의 사무실도 폐쇄됐다.

카슈미르는 인도령(Jammu and Kashmir)과 파키스탄령(Azad Kashmir)으로 나뉘어 지난 50여년간 크고 작은 분쟁에 휘말려 왔다. 면적은 인도령이 두 배나 넓다. 인도령 카슈미르의 일부는 인도-중국 국경분쟁의 불씨가 되기도 했다. 한반도 넓이와 비슷한 카슈미르 지역은 인도 북부와 파키스탄 북동부 그리고 중국 서부와 맞닿아 있다. 1947년 8월 영국이 인도대륙에서 철수할 당시 카슈미르는 지역주민 다수가 이슬람교도(77%)였고 힌두교도(22%)는 소수였다. 그러나 인도-파키스탄 분리독립 과정에서 당시 통치권자인 마하라자 하라싱이 다수 주민의 뜻과 달리 인도 편입을 결정한 것이 분쟁의 씨앗이었다. 인도령 카슈미르도 그동안 인구지도가 크게 바뀌었으나 힌두교도보다는 이슬람교도가 여전히 다수다(61%).
카슈미르는 2차에 걸친 인도-파키스탄 전쟁(1948년, 1964년)으로 수천명의 사망자를 냈다. 전투원뿐만이 아니다. 카슈미르 분쟁으로 1300만명의 카슈미르인 가운데 많은 사람이 사망했고, 살아남은 자들은 고향을 등지거나 이산의 슬픔을 안고 살아왔다. 이 지역에서 UNMOGIP가 1949년부터 활동해 왔으니, 유엔 평화유지활동의 원조인 셈이다. 한국군도 1994년부터 10여명의 장교를 파견해 UNMOGIP 요원으로 참여했다(현재는 우리 장교 9명을 포함해 45명의 다국적 장교가 근무중이다).

인도군의 인권 탄압은 악명 높다. 카슈미르의 중도파 정당인 아메르 자마아트-에-이슬라미 당 총재 압둘 라시드 투라비는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1990년대에만 4만명이 투옥됐다고 전한다. “인도군은 이슬람교도들을 마구잡이로 검거해 고문과 강간을 일삼았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인도 정부 입장에서 그들 범법자는 ‘테러리스트’ 혹은 그 방조자나 협력자들일 뿐이다.

UNMOGIP 소속의 두 한국군 장교(심재천 중령과 이원기 소령)와 함께 LoC를 찾았다. 파키스탄령 카슈미르 주도 무자파라바드에서 동남쪽으로 60km쯤 떨어진 차코티 지역이었다. 평지 같으면 1시간이면 족히 닿을 거리였지만 깎아지른 절벽 밑으로 히말라야 산맥에서부터 흐르는 강을 아득히 내려다보며 달리는 섬뜩한 꼬부랑길이라 2시간 넘게 걸렸다. 신통한 것은 그런 산악지대 곳곳에도 사람들이 모여 마을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었다. 곳곳에 천막촌이 보였다. 인도군의 박해를 피해온 난민들이었다. 그 가운데 제법 큰 규모인 자파르 난민수용소엔 170가구 1100명이 살고 있다. 4년 전 인도군의 포격을 피해 이곳으로 왔다는 모하마드 압둘라(42)는 당시 포격으로 머리를 다쳐 줄곧 천막 속에서 누워 지낸다. 그가 병석에서 입고 있는 옷은 놀랍게도 땀에 절은 양복. 달리 입을 마땅한 옷이 없어서일 것이다. 촌장은 “난민으로서의 대접도 제대로 못 받아 하루하루 삶이 고단하기 짝이 없다”고 하소연한다.
LoC가 가까워질수록 눈이 쌓인 고지 곳곳에 파키스탄군 초소들이 보였다. 통제선 500m 전방에 콘크리트로 다진 방호벽이 접근 가능한 최전방이었다. 그로부터 1km쯤 떨어진 곳에 자리한 인도군 초소가 망원경으로 보였다. 그쪽에서도 망원경을 통해 필자를 보고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자 섬뜩한 느낌이 스쳤다. 최전방을 지키는 파키스탄 군인들은 필자가 사진을 찍으려 하면 막무가내로 손을 내저었다. “요즘 상황이 좋지 않아 더 그럴 것”이라고 동행한 심재천 중령이 귀띔한다. 인도령 카슈미르에서도 근무한 적이 있는 이원기 소령은 “그쪽 인도군은 파키스탄군보다 외부인들에게 더 거부반응을 보인다”고 덧붙였다.
필자가 카슈미르 통제선을 찾은 것은 1월20일. 그때는 그나마 인도-파키스탄 사이에 짧은 소강상태를 보이고 있을 때였다. 그러나 1월22일 인도 동부 캘커타의 미국문화원에 중무장한 괴한들이 총격을 가해 인도 경비경찰 등 4명이 숨지고, 특히 1월25일 인도가 핵무기를 탑재할 수 있는 아그니(Agni)미사일 개량형 모델(사거리 700km 정도의 중거리 미사일)을 시험발사하자 양국간 긴장은 다시 높아졌다. 열흘 가량 잠잠했던 카슈미르 계곡엔 다시 포성이 울려 퍼졌다.
필자가 카슈미르 취재를 마치고 비행기에 오르던 지난 1월26일 인도군이 카슈미르 접경 파키스탄 진지에 포격을 가해 파키스탄 병사 12명이 숨지고 파키스탄군 벙커 10개가 파괴됐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인도측이 공화국기념일(1월26일) 바로 전날을 발사 시점으로 정한 것은 순전히 기술적 요인 때문이라 밝혔다. 그러나 여기엔 정치적 메시지가 담긴 것으로 보인다. 파키스탄에 대한 군사적 시위다. 파키스탄도 이에 맞춰 또 다른 핵실험으로 자존심 대결을 벌일 가능성도 없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