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3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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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와 손잡고 석유 감산 나선 빈 살만 사우디 왕세자

OPEC+ 추가 감산… 인플레이션 감축 노력해온 미국에 찬물

  • 이장훈 국제문제 애널리스트 truth21c@empas.com

    입력2023-04-16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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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 왕세자 겸 총리(왼쪽)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2019년 G20 정상회의에서 만나 웃으며 대화하고 있다. [SPA]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 왕세자 겸 총리(왼쪽)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2019년 G20 정상회의에서 만나 웃으며 대화하고 있다. [SPA]

    압둘아지즈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에너지장관과 알렉산드르 노박 러시아 부총리 겸 에너지장관이 3월 16일 사우디 수도 리야드에서 긴급 회동했다. 미국 서부텍사스중질유(WTI) 가격이 전날 2021년 12월 20일 이후 처음으로 배럴당 70달러 밑으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국제유가가 급락한 이유는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 파산과 유럽 크레디트스위스(CS)의 유동성 위기가 잇따르면서 글로벌 금융위기가 재발할 수 있다는 우려가 시장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두 장관은 국제유가를 끌어올릴 모종의 합의를 했지만 언론에 밝히지는 않은 채 헤어졌다.

    네옴시티를 지켜라

    이후 사우디가 주도하는 석유수출국기구(OPEC) 회원국과 러시아 등 비(非)OPEC 산유국 간 협의체인 OPEC+가 4월 2일 원유 생산을 추가로 대폭 줄이는 조치를 전격 발표했다. 5월부터 연말까지 하루 116만 배럴의 원유를 감산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사우디 50만 배럴, 이라크 21만1000배럴, 아랍에미리트연합(UAE) 14만4000배럴, 쿠웨이트 12만8000배럴, 카자흐스탄 7만8000배럴, 알제리 4만8000배럴, 오만 4만 배럴 등이다.

    서방의 가격 상한제 도입에 대한 보복으로 3월부터 6월까지 하루 50만 배럴 감산에 들어간 러시아도 관련 조치를 연말까지 연장하기로 결정했다. 결국 5월부터 원유 생산량이 하루 166만 배럴씩 줄어들 전망이다. 총 감산 규모는 전 세계 수요의 3.7% 수준이다. 이번 감산은 지난해 10월 OPEC+ 회의에서 결정했던 하루 200만 배럴 감산과는 별도의 조치다.

    사우디의 실세인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 겸 총리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손잡고 추가 원유 감산을 결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복동생인 압둘아지즈 에너지장관의 보고가 무함마드 왕세자의 결정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압둘아지즈 장관은 국제유가가 자칫하면 배럴당 50달러 아래로 떨어질 수 있으며, 이 경우 사우디의 막대한 지출 계획이 위태로워질 수 있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제출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재정수지 균형을 위한 국제유가를 사우디는 배럴당 66.80달러, UAE는 65.80달러로 추산하고 있다. 유가가 해당 가격대 위에서 형성돼야 정부 재정이 손익분기점을 넘길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무함마드 왕세자는 탈(脫)석유 경제개혁 정책인 ‘비전 2030’을 추진 중이다. 국제유가가 배럴당 66달러 이하로 내려가면 스마트 도시 ‘네옴(NEOM)시티’ 건설 등 대규모 사업을 모두 중단해야 할 수 있다. 중동 전문가인 크리스티안 코츠 울리히센 미국 라이스대 베이커공공정책연구소 연구원은 “이번 감산은 무함마드 왕세자의 야심찬 대규모 프로젝트에 자금을 지원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높은 유가를 유지하기 위해 결정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무함마드 왕세자의 비전 2030계획에 따라 사우디는 이미 홍해에 인접한 사막과 산악지대에 5000억 달러(약 662조 원)를 들여 서울의 44배 크기에 달하는 네옴시티를 건설하고 있다. 사우디는 2030년 이 도시가 완성되면 900만 명이 거주할 것으로 전망한다.

    흔들리는 에너지 패권

    지난해 3월 18일 국제유가가 러시아발(發) 공급 감소 우려로 3거래일 만에 100달러 선을 다시 돌파하자 유가가 치솟았다. 사진은 당시 서울의 한 주유소 모습. [뉴스1]

    지난해 3월 18일 국제유가가 러시아발(發) 공급 감소 우려로 3거래일 만에 100달러 선을 다시 돌파하자 유가가 치솟았다. 사진은 당시 서울의 한 주유소 모습. [뉴스1]

    사우디는 수도 리야드에 활주로 6개를 갖춘 ‘킹 살만 국제공항’도 건설하고 있다. 킹 살만 공항은 기존 킹 칼리드 국제공항을 포함하는 57㎢ 부지에 들어서는데, 6개 활주로를 갖출 계획인 만큼 규모도 엄청나다. 전 세계 공항 순위에서 선두권을 달리는 한국 인천국제공항과 싱가포르 창이공항의 활주로가 각각 4개, 3개다. 킹 살만 공항이 완공되면 연간 1억2000만 명의 여행객을 소화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사우디 정부는 이번 공항 프로젝트가 리야드를 세계 10대 경제 도시로 변모시키기 위한 방안이라며 800만 명인 리야드 인구를 2030년까지 1500만~2000만 명으로 늘릴 것이라고 강조했다.

    사우디는 3월 제2 국적 항공사 ‘리야드 에어(Riyadh Air)’ 설립을 발표했고 제3 국적 항공사 ‘네옴 에어라인(Neom Airline)’ 설립 계획도 밝혔다. 미국 항공기 제작사 보잉으로부터 787 드림라이너 121대(약 48조8000억 원 규모)를 구매하는 계약까지 체결했다. 이런 엄청난 계획들을 추진하려면 막대한 오일머니가 필요하다. 무함마드 왕세자가 고유가 유지를 위해 원유 추가 감산에 나선 이유다.

    무함마드 왕세자의 또 다른 의도는 사우디가 최소한 2030년까지 국제 에너지 시장에서 ‘스윙 프로듀서(swing producer)’ 지위를 유지하기를 바라서다. 스윙 프로듀서란 자체적인 생산량 조절을 통해 국제 석유시장의 수급에 영향을 끼치는 산유국을 일컫는다. 서방의 러시아산 석유 가격 상한제에 따라 미국은 유럽에서 러시아를 제치고 원유를 가장 많이 수출하는 국가가 됐다. 특히 미국은 원유 수출국 1위를 달성해 1950년대 이후 처음으로 ‘석유 패권’을 차지했다. 에너지 전문가 대니얼 예르긴 S&P글로벌 부회장은 “미국이 1950년대 이후 세계 에너지 분야에서 다시 지배적인 위치로 올라섰다”고 평가했다.

    인플레이션 잡으려는 노력이…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가 주도하는 네옴시티 ‘옥사곤’ 전경. [네옴시티 홈페이지]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가 주도하는 네옴시티 ‘옥사곤’ 전경. [네옴시티 홈페이지]

    미국이 원유 생산량과 국제유가를 좌지우지하면 사우디로서는 자국의 영향력 약화와 상당한 경제적 불이익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무함마드 왕세자가 국제 석유시장의 수급 조절 및 유가 통제에 나서는 등 러시아와 에너지 동맹을 맺고 미국의 석유 패권 견제에 나선 배경이다. 사우디와 러시아는 세계 2, 3위 산유국으로 두 국가의 원유 생산량은 전 세계의 25%를 차지한다. 우크라이나 관련 전비로 국가 재정이 바닥나고 있는 러시아는 사우디의 제안을 두 손 들어 환영했다.

    문제는 사우디가 주도한 OPEC+의 추가 감산 조치가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애써온 미국 등 서방 국가들의 노력에 찬물을 끼얹었다는 점이다. 국제유가가 올라가면 서방 국가들이 그동안 물가를 잡기 위해 추진해온 각종 정책이 수포로 돌아갈 수 있다. 실제로 국제유가는 감산 조치 발표 후 배럴당 80달러 선을 돌파했다. 자칫 배럴당 100달러를 넘을 수도 있다는 전망까지 나온다. 스위스 투자은행 UBS는 6월까지 브렌트유 가격이 배럴당 100달러에 달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미국 투자은행 골드만삭스도 연말 브렌트유 가격 전망치를 배럴당 90달러에서 95달러로 상향했다. 미국 등 서방 각국의 중앙은행은 국제유가 상승이 인플레이션을 다시 끌어올릴 수 있기에 금리인상 등 대책 마련에 고심하고 있다.

    “中, 중동 영향력 커져 복잡”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왼쪽)이 지난해 12월 8일 사우디 왕궁을 방문해 영접 나온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와 인사하고 있다. [SPA]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왼쪽)이 지난해 12월 8일 사우디 왕궁을 방문해 영접 나온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와 인사하고 있다. [SPA]

    한 가지 주목할 점은 미국이 과거와 달리 사우디에 대한 비판을 자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존 커비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전략소통조정관은 “시장의 불확실성을 감안하면 OPEC+의 추가 감산은 바람직하지 않다”면서도 “지난 80년간 그랬던 것처럼 사우디는 여전히 전략적인 파트너”라고 강조했다. 미국 정부가 지난해 10월 OPEC+가 하루 200만 배럴을 감산하자 ‘근시안적 결정’ ‘후과가 있을 것’이라며 사우디와의 관계를 재검토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과는 상당한 차이가 난다. 미국이 격앙된 반응을 자제하는 것은 대응할 수단이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미국이 현재 보유한 전략비축유(SPR)는 전체 규모의 절반 수준인 3억7100만 배럴이다. 미국은 지난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치솟는 유가를 안정시키고자 SPR 1억8000만 배럴을 방출했다. 미국이 또다시 SPR을 방출하더라도 OPEC+가 생산량을 조절하면 별 효과도 없이 SPR만 소진될 수 있다.

    미국이 태도를 바꾸게 된 가장 중요한 원인은 중동 지역에서 벌어지는 지정학적 역학관계의 변화다. 사우디는 최근 미국의 제재 대상인 이란, 시리아 등 중동 국가들과 관계 회복에 적극 나서고 있다. 중국의 중재로 이란과 국교 복원 합의에 이어 양국 정상회담도 추진할 것으로 보인다. 사우디는 5월 자국에서 개최하는 아랍연맹(AL) 정상회의에 바샤르 알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을 초청할 움직임도 보이고 있다. 사우디는 최근 중국과 러시아가 미국을 견제하려고 만든 상하이협력기구(SCO)에 대화 파트너로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특히 사우디는 세계 최대 에너지 소비국인 중국과의 관계를 강화하고 있다. 미국 ‘뉴욕타임스’는 “미국과 사우디의 관계는 사우디와 이란의 화해를 중재한 중국이 중동 지역에서 영향력을 키우면서 더욱 복잡해지고 있다”고 평가했다. 미국으로선 이 상황에서 사우디를 또다시 몰아붙이면 양국 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 수준으로 악화되고, 도리어 중국이 중동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을 수 있다. 무함마드 왕세자의 ‘승부수’가 성공할지 여부는 확실치 않지만 감산 조치를 통해 석유가 ‘전략무기’라는 점을 다시 한 번 입증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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