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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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국은 전쟁범죄서 예외?

7월1일 출범 ‘국제형사재판소’ 美·러·中 비준 거부… 대외정책 뒤탈 염려 비난 감수

  • < 뉴욕=김재명/ 분쟁지역 전문기자 > kimsphoto@yahoo.com

    입력2004-10-04 14:2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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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량학살 등 반인륜적 전쟁범죄를 심판하는 헤이그 국제형사재판소(ICC)가 7월1일 공식 출범한다. 그러나 ICC의 미래는 순탄치 않을 듯하다. 미국과 중국, 러시아가 비준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 러시아는 각각 티베트와 체첸에 대한 자국의 강압정책이 껄끄럽고, 미국도 해외정책을 고려하면 비준이 꺼려지기는 마찬가지. 5월5일 콜린 파월 미국 국무장관은 ABC방송에 출연해 미국의 ICC 불참 의사를 재차 확인했다. 유럽 여론은 “앞날에 일어날 전쟁범죄를 막자는 데 이런저런 이유를 달 필요가 있느냐”면서 부시 행정부를 비난했다. 강대국으로서의 책임 있는 행동이 아니라는 지적이다.

    “포데이 산코를 붙잡아 전쟁범죄 특별법정에 세울 수 있을까?” 2000년 봄 시에라리온 내전 취재를 갔을 때 전쟁 피해자들에게 들은 하소연이다. 수도 프리타운의 외곽지대에는 산코의 혁명연합전선(RUF) 반군들에게 붙잡혀 손목을 도끼로 잘린 400여명이 집단으로 거주하고 있다. 그곳에서 만난 피해자의 대부분은 비전투원이었다. 그들이 나무 그늘에 모여 앉아 “살아생전에 산코가 법의 심판을 받는 모습을 볼 수 있을까”를 둘러싸고 입씨름 벌이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반인륜 범죄 예방과 체계적 심판

    시에라리온은 10년 동안 내전에 시달려온 서부 아프리카의 작은 나라다. 2만명의 무장 반군을 거느린 산코가 전범재판소의 심판을 받을 가능성은 당시만 해도 거의 없어 보였지만, 산코는 2000년 5월 체포됐고 지난 3월 시에라리온 국내 법정에 모습을 드러냈다.



    국제 사회는 복잡한 제도와 예산 탓에 산코를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처럼 전범재판에 세우지는 못하고 있다. 하지만 ICC가 정식으로 출범하면 산코 같은 전쟁범죄자를 체계적으로 심판할 수 있다.

    1990년대 들어 지역분쟁·종족분쟁이 빈발하면서 반인륜적 범죄가 연이어 발생하고 있다. 반인륜적 범죄를 막기 위해 1998년 7월 120개국 대표가 이탈리아 로마에 모여 ICC 출범을 결의했다. 그러나 ICC의 출범 요건인 60개국의 비준을 채우는 데만 4년을 보내야 했다. 4월11일 보스니아, 캄보디아를 비롯한 10개국이 비준서를 제출해 비준국이 60개국을 넘자, 유엔 법률 자문관 한스 코렐은 “인류사의 한 페이지가 넘어갔다”면서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ICC는 상설 전범재판소다. 특별법정의 경우보다 시간과 예산을 크게 절약할 수 있다. ICC는 대량학살 등 전쟁범죄가 발생한 해당 국가가 이에 대한 재판을 거부하거나 재판할 능력이 없을 때 사건을 처리하게 된다. 따라서 캄보디아의 킬링필드처럼 당사국이 국내법 처리를 고집할 경우엔 ICC 법정이 열리지 못한다. 이론적으로는 ICC가 모든 전쟁범죄에 개입할 수 있지만, 해당 국가가 ICC 협약 비준국이 아니거나 개입을 거부할 경우엔 기소 자체가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ICC의 범죄예방 기능에 주목해야 한다. 예비 전쟁범죄자에게는 존재 자체가 큰 부담이 될 수 있다. 보스니아 유엔 대사 미즈라 쿠슬류지치는 “만약 ICC가 1990년대 초에 마련됐더라면 보스니아에서 대량학살이 벌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반인륜 범죄를 예방, 단죄하기 위한 교두보가 마련된 셈이지만 ICC의 앞날은 그다지 밝지 않다. 무엇보다 미국 러시아 중국 등 강대국들로부터 ICC가 외면당하고 있는 것이 문제다.

    현재 러시아는 체첸의 분리독립운동 세력과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다. 러시아군은 체첸에 대한 무자비한 군사작전으로 국제 사회의 비난을 받아왔다. 러시아가 ICC 협약에 비준한다면 언젠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나 러시아군 책임자가 국제법의 이름으로 법정에 서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중국의 사정도 마찬가지다. 신장 지역의 분리운동과 티베트의 독립(자치)운동을 강압적으로 눌러온 중국도 부담이 크다.

    ICC에 대한 미국의 외면은 더 큰 문제다. 클린턴 행정부가 2000년 12월 서명한 로마조약을 부시 행정부가 거부하고 있는 상태다. 국제법학자들은 “1969년 맺어진 ‘국제조약법에 관한 빈조약’에 따르면 미국은 ICC 비준 여부에 관계없이 ICC의 규정을 준수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빈조약 18조는 “국회 비준을 받지 않았더라도 일단 (대통령이) 서명했다면 당사국은 그 국제 조약을 훼손해선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부시 행정부는 국제 관례를 무시하고 “클린턴의 실수였다”며 발뺌하고 있다.

    국제정치학자들이 설명하는 미국의 특성 가운데 하나가 예외주의다. ‘미국만은 다르다’는 오만한 예외주의는 ICC 비준 과정에도 나타났다. 미국은 “미국 군인과 관리에게 면책권을 준다면…”이란 단서를 내걸었다. 하지만 국제법에 그런 예외규정을 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비준을 거부하고 있는 부시 행정부의 논리는 “미국 군인이나 정치인이 자신이 저지른 범법행위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정치적 공세 때문에 ICC 법정에 설 가능성이 있다”(피에르 프로스퍼 미국 전쟁범죄 담당 대사)는 것이다. 그러나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해외에 파병한 미군 병사들이 미국 법정이 아닌 곳에서 재판받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미국의 이러한 태도를 심심찮게 보아왔다. 한미행정협정(SOFA)을 구실로 중범죄를 저지른 미군들을 미군 영내로 빼돌려온 것도 한 예다.

    미국은 1990년 이후 걸프전과 보스니아 전쟁, 소말리아 전쟁, 코소보 전쟁, 아프간 전쟁을 수행했다. 이들 전쟁을 거치며 미국은 오폭으로 많은 민간인에게 피해를 주었다. 일각에선 미국의 이러한 행동을 전쟁범죄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미국의 입장에서 ICC 비준은 미국 지도자나 군 지휘관을 국제법적 심판 대상으로 법정에 서게 만드는 자충수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1990년대 말까지 밀로셰비치가 유고전범재판 특별법정에서 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칠레의 전 군사독재자 피노체트 장군이 30년 전 저지른 범죄로 전전긍긍하고 있는 것도 미국으로선 ‘남의 일’이 아니다.

    클린턴 행정부 때 로마협약 서명에 관여한 데이비드 셰퍼 전 대사는 “부시 행정부가 ICC를 피하는 것은 군사대국으로서의 책임 있는 행동이 아니다”고 비판한다. 미군이 의도적으로 전쟁범죄를 저지르지 않을 바에야 굳이 피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코피 아난 국제연합(UN) 사무총장은 ICC를 통해 지구촌의 ‘법질서’가 바로잡히기를 기대하고 있다. 국제법 전문가들은 ICC가 정식으로 출범하고 탄력적으로 운영된다면 참여국이 늘어날 것이라고 전망한다. 그러나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들의 자국 이기주의가 큰 걸림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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