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3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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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 만의 엔화 약세에 ‘노(no) 재팬’ 지고 ‘바이(buy) 재팬’ 뜬다

일본 여행객 급증하고 ‘엔테크’ ‘일학개미’ 주식투자 봇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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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슬아 기자

    island@donga.com

    입력2023-06-25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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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 블라인드에 올라온 엔화 및 일본 주식투자 관련 게시물들. [GettyImages]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 블라인드에 올라온 엔화 및 일본 주식투자 관련 게시물들. [GettyImages]

    “엔화가 싸서 이번 여름휴가를 일본 교토로 가기로 했다. 한 달 사이 엔화 가격이 다시 오를까 봐 여행 자금도 미리 환전해놨다.”

    서울 은평구에 사는 직장인 이 모 씨의 말이다. 최근 일본 엔화 가격이 100엔당 800원대까지 떨어지면서 이 씨처럼 일본으로 눈길을 돌리는 사람이 늘고 있다. 평소보다 저렴한 가격에 즐길 수 있는 일본 여행을 계획하는 것은 물론, 환차익을 염두에 두고 엔화를 매수하는 등 ‘바이(buy) 재팬’ 열풍이 불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일본 증시까지 33년 만에 신고가를 경신하면서 일본 주식에 투자하는 이른바 ‘일학개미’도 증가하고 있다.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 블라인드에는 “지금까지 외환투자는 해본 적이 없는데 엔화가 너무 싸니 안 사면 손해 보는 것 같다”거나 “일본 주식에 대해 잘 아는 전문가가 있으면 괜찮은 종목이나 ETF(상장지수펀드)를 추천해달라”는 말들이 오간다.

    2015년 이후 첫 800원대 환율

    6월 들어 엔화 가격은 8년 만에 최저 수준을 나타내고 있다(그래프 참조). 6월 19일 원/엔 환율은 장중 한때 900원 선이 무너지며 897.49원까지 하락했다. 원/엔 환율이 800원대를 기록한 것은 2015년 6월 25일(897.91원) 이후 약 8년 만이다.

    엔저(低) 현상 배경에는 일본 정부의 완화적 통화정책이 있다. 일본은 지난해부터 이어진 전 세계적 긴축 흐름을 거스르고 최근까지 나 홀로 저금리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일본 중앙은행(BOJ)은 6월 16일 열린 금융정책결정회의에서 단기금리를 -0.1%로 동결했다. 장기금리 지표인 10년물 국채금리도 0% 수준으로 유지하기로 했다. ‘잃어버린 30년’ 이후 실물경기 회복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는 일본 정부가 인플레이션 우려에도 1년 넘게 유동성을 공급해 엔화 가치가 하락했다는 분석이다.

    당장 국내에서는 2019년 ‘노(no) 재팬’과 대비되는 ‘바이 재팬’ ‘예스(yes) 재팬’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일본 여행 수요가 급증하는 게 그중 하나다. 항공통계에 따르면 6월 1~10일 국내 항공사의 인천↔나리타(도쿄) 노선을 이용한 여행객은 8만9847명이었다. 이는 1월 같은 기간(6만6741명)보다 34.6% 증가한 수치다. 일본 여행객은 다가오는 여름 휴가철에 본격적으로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6월 들어 국내 여행사의 일본 여행상품 예약 건수가 크게 증가한 데다, 이들 여행사의 6~8월 일본 패키지 여행상품 예약이 대부분 마감된 상태기 때문이다.



    ‘엔테크’(엔화+환테크)에 나서는 사람도 늘었다. 금융권에 따르면 KB국민·신한·우리·하나 등 4대 시중은행의 5월 기준 엔화 매도액(은행이 고객 요구로 원화를 받고 엔화를 내준 금액)은 301억6700만 엔(약 2748억 원)으로 집계됐다. 4월(228억3900만 엔·약 2080억5000만 원)과 비교해 한 달 만에 32% 증가한 것이다. 지난해 같은 기간(62억 8500만 엔·약 572억5300만 원)보다는 5배 늘어난 규모다.

    4대 은행의 엔화 예금 잔액도 5월 말 기준 6978억5900만 엔(약 6조3571억 원)에서 6월 15일 8109억7400만 엔(약 7조 3875억 원)으로 16% 늘어난 것으로 확인됐다. 지난해 6월 말 잔액(5862억3000만 엔·약 5조3400억 원)과 비교해 38% 많은 수치다.

    워런 버핏 일본 투자 5→8.5%

    바이 재팬 열풍은 엔화를 넘어 일본 주식으로까지 번지고 있다. 일본 증시 호황이 그 원인으로 꼽힌다. 6월 들어 일본 증시는 유동성 증가에 따른 자금 유입과 자동차·반도체 등 기술주 강세로 33년 만에 최고점을 찍었다. 일본의 대표 주가지수인 닛케이225(닛케이)는 6월 13일 전거래일 대비 1.8% 오른 3만3018.65에 장을 마감했다. 1990년 7월 이후 처음으로 종가가 3만3000 선을 돌파한 것이다.

    일본 증시 상승세에는 ‘투자의 귀재’로 불리는 워런 버핏 버크셔 해서웨이 회장의 발언도 영향을 미쳤다. 버핏 회장은 4월 11일 일본을 방문해 “일본 종합상사들에 대한 지분 보유를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며 “추가 투자를 검토하고 싶다”고 말했다. 버크셔 해서웨이는 2020년 8월 일본 5대 종합상사 지분을 평균 5% 이상 보유했고, 최근 지분율을 7.4%까지 늘렸다. 6월 20일에는 자회사 내셔널인뎀니티를 통해 이들 종합상사에 대한 지분율을 8.5%로 한 번 더 끌어올렸다. 이 지분 가치는 버크셔 해서웨이가 미국 외 해외에서 보유한 전체 주식 가치를 웃돈다.

    일본 주식에 대한 국내 투자자의 관심도 커지고 있다. 싸진 엔화를 들고 국내 증시보다 활황인 일본 증시로 투자자들이 몰리고 있는 것이다. 한국예탁결제원에 따르면 2분기(4월 3일~6월 20일) 국내 투자자의 일본 주식 매수 건수는 2만1447건, 매수 금액은 4억3631만 달러(약 5614억 원)로 집계됐다. 지난해 4~6월과 비교했을 때 건수(1만5585건)는 37%, 금액(2억3093만 달러·약 2981억7680만 원)은 88%가량 증가했다. 이 기간 미국, 홍콩, 중국 등에서는 되레 국내 자금이 빠져나갔다. 이들 일학개미가 가장 많이 순매수한 일본 주식(6월 20일 기준)은 개별 종목은 소니그룹, ETF는 ‘GLOBALX 일본 반도체 ETF’로 나타났다.

    월가 “일본 증시 추가 상승 가능”

    전 세계적 긴축 흐름에서 벗어난 일본 정부의 저금리 기조가 엔화 약세를 이끌고 있다. [GettyImages]

    전 세계적 긴축 흐름에서 벗어난 일본 정부의 저금리 기조가 엔화 약세를 이끌고 있다. [GettyImages]

    월가의 글로벌 투자은행(IB)들은 일본 증시의 추가 상승을 예상하고 있다. 골드만삭스는 최근 보고서를 통해 “도쿄증권거래소가 주주 친화적 정책을 펴는 등 구조개혁을 꾸준히 진행해 외국인 투자자들의 신뢰가 커지면서 일본 증시에 대규모 자금이 추가로 유입될 가능성이 있다”고 예측했다. 골드만삭스는 일본 대표 주가지수 중 하나인 토픽스(TOPIX)가 현재 수준에서 3%가량 상승해 연말 2200에 도달할 것으로 보고 있다. 뱅크오브아메리카는 “해외에서 현금성 자산이 추가 유입될 여지가 있다”며 “인플레이션 체제가 정착되고 기업들이 두 자릿수 자기자본이익률(ROE)을 달성한다면 1989년 고점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뱅크오브아메리카는 닛케이 지수가 3만2500에서 최대 3만3500까지 오를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바이 재팬 열풍의 중심에 있는 엔화 약세도 당분간은 지속될 것이라는 게 국내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일본 정부가 완화적 통화정책 기조에서 벗어나 긴축으로 돌아설 유인이 지금으로서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김정식 연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는 “인플레이션이 더 심해지지 않는 데다, 실물경기 회복이라는 차원에서 금리를 의도적으로 낮게 유지하는 것은 일본 이익에 부합하는 전략”이라며 “미국의 환율조작국 지정을 피하면서 환율을 낮추려면 지금처럼 미국이 금리를 올릴 때 자국 금리는 현상을 유지하는 방법이 유일한데, 이 절묘한 타이밍에 일본 정부가 긴축을 택할 것 같지는 않다”고 설명했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도 “구로다 하루히코 전 일본은행 총재가 교체되면서 일본 통화정책에도 변화가 있을까 싶었지만 현재로서는 엔저에 방점을 둔 통화정책이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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