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유세장에는 재향군인들이 유난히 눈에 많이 띈다. 이들 재향군인 앞에서 케리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전쟁터에서 피를 흘린 적이 있지만, 부시 대통령은 그 어떤 곳에서도 피를 흘린 적이 없다.”
케리야말로 이라크 전쟁을 이끈 부시에게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그는 베트남 전쟁에서 무공훈장을 받은 전쟁영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전쟁영웅이면서도 반전운동가로 극적인 변신을 했다. 전쟁이 끝난 뒤 그는 ‘반전참전용사회’를 공동으로 설립하고 이 단체의 대변인으로 활동하면서 반전운동가가 됐다. 전쟁영웅이 펼치는 반전운동이었기 때문에 그의 말은 그 누구의 말보다 설득력이 있었고 그는 금세 전국적 인물로 떠올랐다. 그가 30대이던 1970년대에 벌써 TV 시사프로그램에서 “당신은 대통령에 출마할 계획인가”라는 질문까지 받을 정도였다.
케리의 참전 경력은 부시 진영에겐 가장 취약한 대목이다. 수많은 미군의 희생을 치르며 이라크 전쟁을 이끌고 있는 부시는 현역이 아닌 국내 방위군 근무를 했을 뿐이다. 그런데 그마저도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다는 의혹을 지난 선거 때부터 받아왔다. 앨 고어와 맞붙은 지난 선거에서는 이 문제가 크게 쟁점화되지 않았으나 이번에는 전쟁영웅을 만났으니 사정이 달라졌다. 미국 대선도 2002년 한국 대선 때처럼 병역 문제가 선거쟁점으로 떠오르게 된 셈이다.
민주당은 이미 재향군인 집회에서 “국내에서 받게 돼 있는 군복무조차 제대로 수행하지 않은 대통령을 선출해서는 안 된다”고 몰아붙이고 있다.
어느 나라든 그렇겠지만 특히 미국에서는 정치인으로 성공하는 데 참전 경력이나 전쟁 중 무공이 큰 자산이 된다. 독립전쟁 이후 전쟁을 통해 성장한 미국의 역사에서 이 같은 경향이 나타난 듯하다. 케네디 대통령도 일본의 진주만 기습 후 해군에 지원, 지휘하던 어뢰정이 격침될 때 중상 입은 부하를 구해 영웅이 되었다. 전쟁 직후에 하원의원에 당선된 데에는 전쟁영웅이라는 유명세가 든든한 배경이 됐다(이때 입은 등뼈 부상을 이기려고 나중에 마약을 복용한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지만).
케리가 만약 대통령에 당선되면 이는 할리우드가 기다려왔던 대통령이 현실화되는 것이기도 하다. 몇몇 미국 영화들은 미국 대통령에게 나라를 구하는 영웅의 이미지를 입히기도 했다. 이때 ‘나라를 구한다’는 뜻은 국민의 마음을 움직여 국가적 에너지를 모은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무기를 들고 적들과 맞서는 진짜 용감무쌍한 이미지로 그렸다는 의미다.
영화 ‘에어포스 원’(사진)에서 해리슨 포드가 연기한 대통령의 영웅적 활약상이 바로 그렇다. 참전영웅 출신인 해리슨 포드 대통령은 대통령 전용기인 에어포스 원을 탈취한 테러리스트들에 홀로 맞서서 자신의 가족과 부하들을 구하는 초인적 활약을 펼친다.
외계인의 지구 침략기인 ‘인디펜던스 데이’에서도 미국 대통령은 전투기를 몰고 직접 출격해 우주인들을 물리친다.
이런 영화들이 그야말로 가상이 아닌 ‘실제 모델’을 찾게 된 셈이다. 그러니 이제 ‘에어포스 원’ 뺨치는 영화들이 줄줄이 나오지 않을까. 할리우드 제작자들이나 눈치 빠른 시나리오 작가들은 그런 욕심을 품어볼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영화를 반전운동가 출신 ‘케리 대통령’이 그리 좋아할 것 같지는 않다. 병역 기피 의혹을 받는 부시는 전쟁 영화를 즐겨본다지만 전쟁에서 피를 흘려본 사람은 그렇게 쉽게 전쟁을 얘기하지는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