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마르스 츠누키 증류소의 오크통 숙성실. [사진 제공·최수현]
해외 수출의 일등공신은 일본산 위스키. 하지만 점차 쌀 소주를 베이스로 한 ‘재패니즈 진’(Japanese gin)의 위상이 높아지고 있다. 급기야 일본 증류식 소주수출촉진협의회(焼酎輸出促進協議会)가 미국 증류주시장에 출사표를 내밀었다. 독특한 크래프트 소주를 기획하고, 식전 및 식후용 제품을 만들며, 칵테일 레시피도 마련하겠다는 계획이다. 서구권에서도 통할 수 있는 디자인 개발, 미·일(美日) 합작 제품 출시, 믹솔로지스트(mixologist·음료 및 칵테일 전문가) 양성, 그리고 양조장 관광 상품도 개발한다고 한다.
고구마소주가 고구마 농업 뒷받침
일본 기리시마주조가 고구마소주 제조에 사용하는 자색고구마와 백고구마, 그리고 기리시마주조의 고구마소주 제품들. [사진 출처·키리시마주조]
일본 소주시장도 1980년대까지는 한국과 비슷했다. 그저 저렴한 술이 최고였다. 증류식 소주의 수준이 높지 않은 것도 한 이유였다. 특히 고구마소주에서는 퀴퀴한 냄새가 났고, 이를 없애려고 다양한 인공감미료를 첨가했다.
하지만 이내 기술이 발전하면서 고구마 특유의 단맛과 부드러운 향을 낼 수 있게 됐다. 자연스럽게 인공감미료는 사라졌다. 지금도 일본은 오로지 고구마와 물, 그리고 쌀 입국(일본식 누룩)만으로 고구마소주를 빚는다. 이후 쌀소주, 보리소주도 상승세를 탔다. 이러한 제품 발전에 힘입어 원료의 맛을 즐기는 술 문화가 서서히 확산하면서 증류식 소주가 대세로 자리 잡았다.
증류식 소주의 성장을 도운 또 다른 요인은 일본 정부의 소주 명칭 변경이다. 과거 희석식 소주는 소주갑류(焼酎甲類), 증류식 소주는 소주을류(焼酎乙類)로 불렸다. 거대 공장에서 나오는 희석식 소주가 ‘신식’이라는 판단에서다. 하지만 2003년 ‘갑’과 ‘을’이 역전됐다. 증류식 소주의 명칭을 소주을류에서 ‘본격(本格)’으로 바꾼 것이다. 영어로는 ‘real’이다. 증류식 소주가 ‘진짜 소주’가 됐다.
물론 일본 증류식 소주가 발전한 가장 큰 요인은 고구마 농업의 체질이 개선됐다는 데 있다. 기업 수요가 늘어 농민이 안심하고 고구마를 재배하면서 고구마 품종도 다양해졌다. 현재 일본의 고구마 생산량은 80만t(2017년 기준). 이 중 20%가 소주 원료로 쓰인다. 고구마소주 산지로 유명한 규슈지역의 가고시마현과 미야자키현에서 생산되는 고구마는 절반 이상이 소주 원료로 활용된다. 일본 고구마산업을 소주가 뒷받침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구마소주 아이스크림’부터 ‘열대과실향 소주’까지
일본 기리시마주조 양조장에서 고구마를 선별하는 모습(왼쪽)과 기리시마주조의 고구마소주 비교 시음장. [사진 제공·명욱]
기리시마주조는 엉뚱하게도 전기를 생산한다. 미야자키현에 위치한 이 회사의 공장으로 들어오는 고구마는 하루 425t. 물을 넣어 소주를 제조하고 나면 수분을 포함해 850t의 고구마 부산물이 남는다. 이는 3만4000㎥의 바이오 가스(메탄가스)를 생성하는데, 이것으로 발전해 2만2000가구가 사용할 수 있는 전기를 만든다. 또 연간 사용하는 공장 연료의 65%를 바이오 가스로 채운다고도 한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기리시마주조는 이산화탄소 발생량을 연간 3000t 감소시키고 있다.
제품 개발 및 마케팅 활동도 활발하다. 포도 품종에 따라 와인 맛이 다르듯, 고구마 품종에 따라 고구마소주의 맛과 향도 달라진다. 이에 일본 고구마소주 제조사들은 백고구마(こがねせんかん·黄金千貫), 자색고구마(むらさきまさみ·紫優), 호박고구마(たまねあか·タマアカネ)로 다양한 고구마소주를 만든다. 각각 부드러운 맛, 상큼한 맛, 과실향 맛이 특색이다. 또 누룩 균도 차별화하고 있다. 청주용 누룩(黄麹)은 부드러운 맛, 소주용 누룩(黒麹·白麹)은 진한 맛을 낸다. 여기에 더해 고구마 꽃에서 효모를 채취, 고구마소주에서 독특한 향미가 나게 한다. 한편 소비자와 접점을 늘리고자 공장 내 레스토랑을 운영하고, 지역 크래프트 소주를 제조한다. ‘고구마소주 아이스크림 가게’ ‘고구마소주 제과점’도 있다.
이러한 다양한 노력을 통해 기리시마주조는 7년 연속 일본 증류식 소주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일본 하마다주조의 폐광 양조장 ‘긴잔구라’의 내부 갱도로 들어가는 미니열차 ‘도롯코’(왼쪽)와 긴잔구라 내 소주숙성실. [사진 제공·최수현, 명욱]
기리시마주조가 여러 고구마 품종을 활용해 다양한 제품을 만든다면, 하마다주조는 가공 방식에 차별화를 둬 특이한 제품을 생산한다. 고구마소주를 만들려면 증기로 고구마를 찌는 것이 기본이다. 하지만 하마다주조는 간 고구마, 혹은 군고구마를 사용한다. 고구마를 갈아서 만든 소주는 열대과실향이 풍부하고, 군고구마로 만든 소주에서는 신기하게도 고구마의 고소한 맛이 난다. 하마다주조는 ‘체험형 테마파크’라 할 수 있는 양조장뿐 아니라 원료의 풍미를 살린 맛과 향으로도 많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추운 위스키, 더운 위스키
일본 마르스 츠누키 증류소는 창립자 고택을 개조해 갤러리 및 레스토랑으로 활용하고 있다. [사진 제공·명욱]
이곳의 특징은 위스키를 숙성시키는 장소가 다양하다는 것. 추운 곳과 더운 곳, 그리고 그 중간지대에서 위스키를 숙성시킨다. 추운 곳은 동계올림픽이 열린 나가노현의 고원 지대고, 더운 곳은 애니메이션 ‘원령공주’의 배경인 아열대 기후의 야쿠시마다. 그리고 중간지대는 해풍이 풍부한 가고시마현. 오크통에 담은 위스키는 기후 환경에 따라 맛과 향이 달라진다. 특히 기후 환경에 따라 알코올 증발률이 큰 차이를 보인다. 나가노현처럼 눈이 많이 내리는 곳에서는 증발량이 적어 천천히 숙성되고, 더운 지역에서는 증발률이 높아 빨리 숙성된다. 과거에는 증발되는 원액이 많은 만큼 채산성이 맞지 않아 더운 지역에서는 위스키를 숙성시키지 않았다. 하지만 오히려 그 맛에 매료된 애호가가 늘자 더운 야쿠시마에서도 위스키가 생산되기 시작했다. 버번(bourbon), 셰리(sherry), 럼, 브랜디, 진, 그리고 일본산 참나무인 미즈나라(水楢)로 만든 오크통에 대해서도 각기 다른 숙성 방식을 적용하고 있다.
다만 위스키는 최소 수년간 숙성시켜야 해 생산이 바로 매출로 이어지지 않는다. 이에 마르스 츠누키 증류소는 특별한 숙성이 필요하지 않은 진을 제조해 ‘크래프트 재패니즈 진’이라는 이름으로 판매한다. 또한 다양한 위스키 체험 프로그램도 운영되고 있다. 가장 눈여겨볼 부분은 창립자의 고택을 갤러리 및 레스토랑으로 개조한 점이다. 100년 전 일본 문화를 체험할 수 있다.
일본 증류주 산업은 딱 하나로 귀결된다. 지역성을 살리고, 그렇게 살아난 지역성이 좋은 스토리가 돼 사람들을 매료시킨다는 점이다. 이것이 산업 성장으로 이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 농산물과 지역 특산주의 수준도 일본 못지않다. 좋은 우리 농산물로 빚은 맛 좋은 술이 널리 사랑받는 날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