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교회가 있던 페르가몬.
성령에 이끌린 사도 요한은 밧모 섬 동굴로 가서 쓴 ‘요한계시록’에 이 일곱 교회를 언급했다. 초대교회가 있던 도시는 에베소, 서머나(스미르나), 페르가몬, 사데(사르디스),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두아디라다. 일곱 교회는 초기 기독교 전파의 구심점 구실을 한 곳이었으나 지금은 이슬람 국가인 터키 영토에 속한 탓에 유적만 쓸쓸히 남아 있다.
요한계시록에도 언급
예수가 죽은 후 기독교는 한동안 예루살렘 밖으로 교세를 확장하지 못했다. 스데반의 갑작스러운 순교와 그에 뒤따른 기독교 박해로 많은 기독교인이 예루살렘을 떠나 주변 지역으로 흩어지면서 복음을 전파하게 됐다. 이들이 복음을 전한 지역은 초대교회가 있던 일곱 도시와 페니키아, 지금의 키프로스인 구부로, 그리고 시리아의 안디옥(안디오크)이다.
로마시대 에베소는 화려하고 부유한 도시였다. 상업과 학문의 중심지로, 세계 고대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아데미(아르테미스) 신전이 있었을 만큼 큰 도시였다. 에베소를 둘러보면 아름답고 거대한 도시였음을 실감할 수 있다. 폭이 21m나 되는 쭉 뚫린 대리석 길과 그 양편에 늘어선 많은 코린트 기둥은 가히 장관이다. 거대한 원형경기장과 도서관, 그리고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보다 무려 4배나 컸다는 아테미 신전 터 같은 것도 로마제국 당시 에베소가 로마에 이어 두 번째로 큰 도시였음을 보여준다.
초기 기독교의 교세 확장 당시 큰 구실을 한 사도 바울 역시 에베소를 여러 차례 방문했다. 특히 세 번째 전도여행 때는 3년간 에베소에서 선교 활동을 했다. 5월 초 필자는 일곱 교회를 차례로 방문했다. 먼저 마리아가 말년에 살았다는 에베소의 ‘성모 마리아의 집’을 찾았다. 이곳은 파나야 카풀루에 있는 벽돌로 지은 조그만 교회다. 19세기 초 에멀리히라는 독일 수녀가 계시를 받고 찾은 곳이기도 하다. 촛불이 아늑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교회 중앙 제대에 성모 마리아 석상을 경건히 모셨다.
‘요한계시록’에 서머나라고 기록된 터키의 이즈미르는 오스만제국 이래 유일한 국제 무역항으로 번성했던 곳. 도시 곳곳에 유럽 대도시를 연상케 하는 풍물이 남아 있다. 야외 원형경기장, 큰 공중목욕탕, 체육관 등 여러 시설이 로마시대 당시 이 도시가 얼마나 번영했는지를 말해준다. 서머나의 초대교회 터를 찾아보았으나 뚜렷한 곳이 없어 시내 한복판에 자리한 ‘폴리갑 순교교회’를 찾았다.
폴리갑은 요한의 수제자로 서머나에서 순교한 성인이다. 순교 당시 나이는 86세. 총독은 그의 나이를 고려해 자기 앞에서 예수를 부인하면 살려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폴리갑은 “지난 86년간 나는 예수를 섬겼소. 그는 한 번도 나를 버린 일이 없었소. 어떻게 그를 모른다고 해 나를 구원하신 주님을 욕되게 할 수 있겠소”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화형을 당했다. 화염 속에서도 그는 성가를 부르며 장렬히 순교했다.
이즈미르를 벗어나 북쪽으로 약 100km 떨어진 페르가몬으로 갔다. 신약시대 때 이름이 버가모인 이곳은 옛날 페르가몬 왕국의 수도로 크게 번창했다. 많은 유적이 남은 이곳의 볼거리 중 단연 으뜸은 도서관이다. 에우메네스 2세가 건설한 이 도서관은 당시만 해도 알렉산드리아(현 이집트) 도서관 다음 가는 규모였다.
이곳의 발명품 가운데 유명한 것은 양의 가죽을 편 뒤 표백, 건조시켜 만든 양피지다. 라틴어로 페르가메라는 양피지 원명은 이 도시 이름을 딴 것이다. 만약 이곳이 기독교 국가의 영토였다면 이렇게 홀대당하지 않았을 터. 페르가몬 교회 역시 폐허가 돼버렸다.
에베소의 성모 마리아 동상.
페르가몬에서 남동쪽으로 약 60km 떨어진 지점에 있는 두아디라는 기원전 100년경 무역 도시로 발전했던 곳이다. 비옥한 평원에 자리한 이 도시는 빌립보교회 최초의 여성 신자인 루디아의 고향이다. 초대교회 터는 사람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폐허였다. 그 옛날 성당 건물에서 썼을 것으로 짐작되는 크고 작은 석재만 외롭게 뒹굴고 있었다.
사데는 기원전 12세기경 번성했던 리디아 왕국의 수도로 군사상, 상업상 크게 발전했던 도시다. 이민족의 침입으로 패망을 거듭했던 사데는 터키에서는 드물게 고고학적 발굴을 잘 진행했다. 대리석으로 건축한 체육관과 7000명이 입장할 수 있는 유대인 화랑이 대표적이다. 옛 유대인 화랑으로는 최대 규모라고 한다. 아데미 신전 터도 옛날의 웅장함을 짐작게 했으나 지진 등으로 파괴돼 지금은 크고 작은 석주만 널려 있다.
사데의 초대교회 유적은 아데미 신전 터 남쪽 끝에 있다. ‘요한계시록’에는 사데 교회를 칭찬한 대목이 나온다. 로마시대 시민은 부와 권세의 상징으로 자주색 옷을 입었는데 사데 교회 교인만 이를 무시하고 흰옷을 즐겨 입었다는 것. 요한은 이런 숭고한 자세를 지닌 사데 교인을 높이 평가했다.
사데를 떠나 45km쯤 가자 알라세히르라는 한적한 소도시가 나왔다. 신약성경에 기록한 빌라델비아(필라델피아)가 있던 곳이다. 미국 동부 대도시 필라델피아의 지명도 여기서 유래했다. 이곳의 초대교회 터 역시 뚜렷하게 남아 있지 않았다. 그나마 비잔틴시대에 건축했다는 교회 유적지 한 곳이 있는데 이 또한 큰 돌기둥 두 개와 주춧돌만 남은 황량한 모습이었다.
마지막 행선지는 라오디게아였다. 라오디게아는 전형적인 헬레니즘 도시로 극장, 신전, 경기장 등 여러 유적지가 남아 있다. 이곳은 눈병을 고치는 안약 산지로도 유명하다. 로마시대 유명한 의사였던 갈렌도 이곳 안약을 추천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영적인 눈을 뜨려면 안약을 사서 바르라”라는 대목을 적었는지도 모른다. ‘요한계시록’ 중 라오디게아 교인에 대해 언급한 부분 또한 흥미롭다. 이들을 빗대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고 미지근하다”라는 대목이 있는데, 당시 라오디게아 교인의 신앙심이 그다지 깊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거룩한 성지를 제대로 발굴하고 복원해 잘 관리했으면 하는 진한 아쉬움이 남는 여행이었다. 피로 얼룩진 순교 현장을 돌아보며, 초기 기독교인이 얼마나 헌신적으로 신앙생활을 했는지 절감할 수 있었다. 바로 이 같은 초창기 성도의 신앙심이 있었기에 중세 기독교 사회를 거쳐 오늘날과 같은 기독교 전성시대를 맞이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