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대 가는 부자 없다’ 절반은 틀려
본의 아니게 당시 논란에 휩싸인 이가 바로 일본 도쿄 경제대 하토리 다미오(服夫民夫) 교수다(현재는 도쿄대 대학원 소속). 한국 재벌 관련 전문가로 손꼽힌 덕에 국내 언론에 자주 등장했다. 최고의 재벌 규제책을 묻는 질문에 그는 우리 속담으로 답하곤 했다. “3대 가는 부자 없다.”
한국 재벌 오너는 가족 승계에 집착한다. 그러나 모든 자손이 물려받은 부를 잘 관리하란 법은 없다. 따라서 한국 재벌 문제는 장기적으로 정책이 아닌, 시장 원리에 의해 풀릴 것이라는 전망이었다. 재벌에 호의적인 오피니언 리더가 이 비판적 학자의 논리를 가끔씩 차용한 것은 역설이었다. 그들은 이 주장의 다양한 함의(含意)는 배제한 채 재벌을 그냥 내버려두라는 주장의 근거로 인용하곤 했다.
20여 년이 흐른 지금, 당시 예상은 얼마나 적중했을까. 결론부터 말한다면, 절반은 맞았다. 외환위기 당시 상당수 재벌이 몰락했다는 것이 그 증거다. 몰락 정도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30대 재벌 가운데 절반이 넘는다는 것이 통설이다. 그 가운데 상당수가 2, 3세 승계를 완료했거나 진행하는 그룹이었다. 그들은 급격한 경영 환경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채 부모에게 물려받은 부를 잃고 말았다.
그러나 외환위기 이후 10년은 하토리 교수의 예상이 완전히 빗나간 시기였다. 재벌 문제는 결코 시장에서 풀리지 않는다는 점이 분명해졌다. 당장 편법 승계가 만연했다. 편법 승계에 대한 사회적 반감이 비등해지자 또 다른 승계 방식이 등장했다. 가족 승계 과정에서 그룹을 분리하고, 그 과정을 전후해 계열사를 크게 늘리는 방법이다.
물론 계열 분리와 무관하게 몸집을 키우는 경우도 있다. 실질적으로 오너의 자손이 소유한 계열사에는 그룹이 일감을 몰아줬다. 대기업의 풍부한 잉여자금과 이명박 정부 초기의 친기업적 분위기도 이런 방식이 확산하는 데 일조했다.
가족 승계 방편으로 이뤄진 계열 분리와 계열사 확장은 20년 전의 재벌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당시 재벌 문제의 핵심은 문어발식 다각화였다. 사업 연관성이 없는데도 경쟁 그룹을 의식해 계열사를 늘리는 것이 문제였다. 지나친 다각화는 중소기업의 사업 기회를 앗아가는 것은 물론, 재벌의 경쟁력 자체를 저해한다는 지적이 많았다.
삼성 에버랜드 사건과 SK그룹 분사
에버랜드 전환사채(CB) 저가 발행을 공모해 회사에 970억 원대 손해를 끼친 혐의로 기소된 허태학 전 에버랜드 사장이 2007년 5월 29일 항소심 선고공판을 마치고 서울 고등법원을 나서며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요즘 재벌은 아메바처럼 분화를 거듭하면서 양적으로 성장한다. 이러다간 생태계 전체를 지배할 수도 있다. 적정 수준으로 분화한 이후에는 분화를 중단하는 실제 아메바와는 다르다. 외환위기,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환율 효과에 따른 실적 호전과 맞물려 재벌(주로 수출 특화 대기업 집단)은 점점 더 부자가 되고 국민은 더 가난해지는 불균형이 가속화하고 있다.
우리 재벌이 2, 3세 승계를 재고하기 시작한 계기는 삼성 에버랜드 사건이었을 것이다. 이 사건의 발단은 1996년 에버랜드가 오너 가족에게 전환사채를 헐값에 배정한 일이었다. 그것이 불법인지를 두고 10년에 걸친 법정 분쟁이 벌어졌다. 삼성 대 시민사회단체의 대결 양상이었다. 이 분쟁은 결국 삼성의 승리로 끝났지만 이 과정에서 삼성이 치른 대가도 컸다. 재벌들은 편법 승계를 했다간 여론의 반발이 얼마나 클지를 실감했을 것이다.
LG그룹은 삼성 에버랜드 사건 와중에 계열 분리를 마무리했다. 2003년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한 후 2년여에 걸쳐 GS와 LS그룹을 분리했다. 별다른 논란 없이 완료했다. 이 작업은 이후 진행할 승계의 선행 과정 성격이 강했다.
SK그룹이 최근 주요 계열사를 잇따라 분사시킨 것 역시 계열 분리를 앞둔 사전 정지작업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이 결과만 놓고 보면 재벌은 곁가지를 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가지 묻기 방식으로 개체수를 늘렸다는 의혹을 살 만하다.
계열사 확장이 승계 작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점은 2006년 현대자동차그룹의 글로비스 사건 당시 확인했다. 현대자동차그룹은 ‘황태자’ 정의선 부회장이 최대 주주로 있던 글로비스에 일감을 몰아줬다. 그 과정에서 있었던 각종 비리가 법의 심판대에 올랐다. 법원은 계열사 부당 지원 혐의를 인정했다. 하지만 회사가 누려야 할 사업 기회를 대주주가 사적으로 악용한(사업 기회의 편취) 혐의에 대해선 인정하지 않았다.
무차별 확장과 업종 확대의 끝은?
그 후 계열사를 늘리고, 그곳에 그룹 일감을 몰아주는 관행은 일상화했다. 이마트 내 피자사업은 신세계 정용진 부회장의 가족 챙기기라는 평을 들었다. 이 밖에도 재벌 오너 일가의 사업 기회 편취 논란은 끊이질 않는다. 자산 기준 4위 안에 드는 한 재벌의 비상장 계열사 인수를 추진해온 외국계 인수합병(M·A) 전문가의 말을 들어보자.
“에버랜드 사건이 주목받던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해당 재벌 그룹은 계열사를 팔겠다는 의지가 확고했다. 후계 승계 작업을 위해 매각 자금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200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갑자기 태도가 돌변했다. 회사를 더 키워 상장할 수 있는데 왜 파냐는 것이었다. 승계 작업과 관련해 전과 다른 묘수를 찾은 인상이었다. 몇 년에 걸쳐 그 회사를 좇았던 나만 처지가 곤란해졌다.”
승계 작업의 일환으로 가속화하는 계열사 확장과 일감 몰아주기는 대주주를 제외한 주주는 물론, 관련 중소기업의 피해도 수반하게 마련이다. 정부가 사업 기회의 편취를 막는 법률 장치를 강구하는 한편, 중소기업 적합업종 제도를 부활하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대기업이 기업 생태계의 전 영역을 건드리는 것을 막겠다는 취지다.
그러나 재벌의 아메바식 분화 혹은 가지 묻기식 확장의 결과를 가장 우려해야 하는 것은 재벌 자신일지도 모른다. 이미 상당수 그룹 계열사의 부실화 징후가 뚜렷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하반기 기준으로 45대 재벌 계열사 10곳 가운데 3곳 가까이가 자본 잠식 상태다. 지나치게 시장이 좁거나 경쟁이 치열한 분야에 무작정 뛰어든 결과다.
재벌 방계그룹 오너 일가가 잇따라 머니게임에 뛰어드는 것 역시 먹을거리가 부족한 현실과 무관치 않다.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향후 10년은 다시 하토리 교수의 예상이 적중하는 시기가 될지도 모르겠다. ‘3대 가는 부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