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이 살아 있다는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 크리스틴을 통해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우리 시대가 갖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려 한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인간의 의지라는 것, 희망은 그러한 의지 속에서 나온다는 것을 그는 강조한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속성으로 영화를 만들어내는데도 대부분의 작품이 명화급이라는 점이다. 만만치 않은 수준을 넘어 최고의 작품성을 보여준다. 범작 수준에 그치는 것도 없진 않지만 말이다.
1월 말쯤 국내 개봉 예정인(배급사인 UPI에서는 아카데미 시상식 이후인 2월 말로 개봉을 늦출 가능성도 없지 않다. 올 시상식에서도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화제를 모을 것이 확실시되기 때문이다) ‘체인질링’은 거장이 만든 범작이지만, 그럼에도 그 안에 담긴 노인의 진정성 때문에 ‘필견(必見)’을 추천한다. 이 작품 속에는 지나간 시대에 대한 통찰과 삶의 혜안이 담겨 있다. 영화를 보고 있으면 클린트 이스트우드라는 노인이 젊은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얘기가 너무 많아 안달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는 자신이 겪었던 야만의 증후군이 아직 해소되지 않았다는 것, 그래서 그걸 극복하기 위해서는 당신들이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아가야 하는지를 얘기하고 싶어한다.
그런데 그 방식이 강압적이거나 설교식이지 않아서 좋다. 이런 얘기는 너희들이 재미없어 한다는 걸 알고 있다는 듯 슬쩍 입꼬리를 올리며 조곤조곤 이야기를 들려준다. 노인 특유의 느긋하면서도 느릿느릿한 말투를 듣고 있으면 이상하게도 그의 얘기에 빠져들게 된다. 그리고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된다. ‘우리 모두는 지나간 역사에서 자유롭지 않으며 그 속에서 배워야 할 것이 많다’는 것을.
1938년 LA 배경으로 한 싱글맘의 기구한 사연
‘체인질링’은 1938년 LA를 배경으로 한다. 당시로서는 다소 눈총을 받았을 법한 싱글맘 크리스틴 콜린스(앤절리나 졸리)가 겪게 되는 기구한 얘기가 중심. 아홉 살 난 아들 월터를 키우며 살아가는 크리스틴은 그래도 ‘잘나가는’ 전화교환수다. 전화회사에서 능력을 인정받아 매니저로의 승진을 코앞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에게 청천벽력 같은 사건이 벌어진다. 어느 날 월터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것이다. 5개월 동안 미친 듯 아들이 돌아오기를 고대하는 그녀에게 LA 경찰은 마침내 아이를 찾았다는 통보를 해온다. 하지만 문제는 경찰이 찾은 아이가 자신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 진짜 사건이 시작되는 건 이때부터다. 돌아온 아이가 자신의 아들이 아님을 아무리 주장해도 경찰은 오히려 그녀를 정신병자 취급한다. 당시 부패할 대로 부패해 시민의 지탄을 받던 LA 경찰청은 크리스틴의 주장대로 엉뚱한 아이를 그녀에게 돌려줬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또다시 여론의 비판을 받을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크리스틴은 결국 경찰에 의해 강제로 정신병원에 감금돼 전기쇼크 치료를 받기 직전에 이른다. 혹시 정말 경찰의 말대로 크리스틴은 정신이 이상해져서 아들을 못 알아보는 것은 아닐까. 경찰이 찾았다는 아이는 대체 누구일까. 아들 월터의 생사는 어떻게 된 것일까.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체인질링’은 아이를 찾아 헤매는 모성애의 눈물겨운 노력을 보여주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모성애조차 짓밟는 국가 시스템의 야만성을 부각하려 애쓴다. 영화는 미국인들의 무의식에 이식된 고정관념, 곧 국가는 결코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다는 믿음이 사실은 얼마나 취약하며 지난 역사 속에서도 국가란 실체가 얼마나 엄청난 실수를 저질러왔는지를 파헤친다. 우리가 정신을 차리고 있지 않으면 국가 시스템은 언제든 무너지고 해체될 수 있을 만큼 허약한 체질임을 보여준다. 야만의 시대에서 문명의 시대로 전환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는 것,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시대에 태어난 젊은 세대들은 종종 그 점을 잊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인간사회가 지니는 야만적 속성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세상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는 점을 영화는 강조한다.
영화 속에서 크리스틴은 울부짖는다. “내 아이는 내가 가장 잘 알아요!” 하지만 정부와 경찰은 자신들이 여인의 아이를 더 잘 아는 것처럼 행세한다. 크리스틴이 수감된 정신병원의 원장은 돌아온 아이가 그녀의 아들이 맞다는 내용의 서류에 사인을 하라며 그녀를 압박한다. 사인만 하면 그녀는 당장 정신병원에서 나갈 수 있다. 하지만 사인하는 순간 그녀는 자신이 미쳤다는 것, 가짜 아이가 자신의 아들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꼴이 된다. 의사 앞에서 병원 생활이 괜찮다며 미소를 지으면 이제 정신이 돌아온 만큼 서류에 사인하라고 하고, 그런 의사에게 반항하면 전기쇼크 치료를 받게 될 참이다. 크리스틴이 처한 실존의 상황은 실로 끔찍하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야만의 상황이 어떻게 벌어질 수 있을까 싶지만 영화가 1930년대 LA에서 벌어졌던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것을 알게 될 때쯤에는 그 정서적 충격이 만만치 않게 된다.
실화 바탕 국가 시스템 야만성 고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체인질링’을 만들면서 별다른 연출의 기교를 선보이지 않는다. 허구로 가득 찬 영화를 만들 만큼 80세 노인은 시간이 넉넉하거나 한가하지 않다. 자신이 겪었던 수많은 드라마 같은 일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모자란다고 영화는 말한다. 인간이 인간에게 저지를 수 없는 일이 실제로 얼마나 벌어져왔는지, 그것만 이야기하는 데도 시간이 모자라다며 서두르는 것처럼 보인다. ‘체인질링’이 범작인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 마치 사회 사건을 다루는 고발 다큐멘터리를 보듯 시간순으로 이야기를 엮어낸 것도 그 때문이다. 이야기의 전개는 평범한 리듬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의 파장은 결코 만만한 수준이 아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1930년대의 시공간을 현재의 스크린으로 옮겨놓으며 인간사회는 지난 80년간(마치 자신의 생애가 흐르는 동안)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음을 강조한다. 지금 시대가 최고의 시절인 듯 오만하지 말라고 젊은이들에게 충고한다. 늘 주변을 돌아보며 경계를 게을리하지 말 것을 권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상의 이곳저곳에서 어머니들의 눈에 피눈물을 쏟게 만드는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잊지 말라는 것이다.
끝까지 아들이 살아 있다는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 크리스틴을 통해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우리 시대가 갖는 한 가닥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려 한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결국 크리스틴과 같은 인간의 의지라는 것, 희망은 그러한 의지 속에서 나온다는 것을 그는 강조한다.
올 2월 아카데미 시상식은 클린트 이스트우드 때문에 또 고민에 빠졌다. 예컨대 남우주연상 후보로 배트맨 영화 ‘다크 나이트’에서 광기에 가까운 연기를 펼친 고(故) 히스 레저가 유력했는데 ‘그랜 토리노’에서 감독이자 주연이었던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급작스럽게 부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랜 토리노’는 감독상과 작품상 후보로도 거론된다. ‘그랜 토리노’가 상을 받든 받지 못하든, 이쯤 되면 말년의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보여주는 에너지에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다.
‘체인질링’은 아카데미에서 어떤 평가를 받을까. 아마도 앤절리나 졸리가 여우주연상을 받게 되지 않을까. 그 누가 아들을 찾으려는 모성애의 여인을 거부하겠는가. ‘체인질링’은 이 세상 모든 어머니, 어머니의 마음을 지키려는 사람들을 위한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