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연재의 2009년 새해 첫 원고를 어디서 써야 타당할 것인가. 그런 밑도 끝도 없는 생각을 여러 번 한 끝에 나는 한 해의 물러섬과 나아감의 한복판에 서 있는 광화문으로 나갔다. 아마도 그곳에 이 한반도의 곳곳으로 뻗어나가는 도로원표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1914년에 처음 세워진 도로원표를 따라서 속초와 울진과 마산과 여수와 군산과 대천의 아득한 거리가 수백km의 숫자로 환원되어 지금 서 있는 곳의 중력이 만만치 않음을 느끼게 된다.
세종로 네거리에 서서 북으로 광화문 너머 북악산을 멀리 보고 남으로 태평로 따라 숭례문으로 뻗은 길의 희끄무레한 빌딩을 바라보는 것, 동으로 혼잡한 차량의 행렬을 쫓아 종로 저 멀리 확장되는 공간을 보고 서쪽으로 이 대도시의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을 말하려는 듯한 흥국생명 앞의 거대한 ‘해머링 맨’을 바라보는 것. 그렇게 사위를 한번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광화문 앞, 세종로 네거리의 상징성, 역사성이 느껴진다.
광화문 하고 말해보았을 때, 이 단어는 순식간에 우리를 파란만장한 역사의 현장으로 이동시킨다. 600년 조선 역사는 그렇다 치더라도 현대사 100여 년이 이 광화문 앞에서 벌어졌다. 지금의 중장년층에게는 세종로 네거리가 더욱 각별하다. 국제극장 간판이 당당하게 서 있던 것을 시작으로 그 동서남북의 거리와 골목에서 작고 작은 한 개인의 생애가 얼마나 거룩하게 형성되었던가. 당주동 무교동 정동 서린동 수송동 청진동의 실핏줄 같은 거리와 골목은, 그리고 그 공간들의 대대적인 변화 양상은 오늘의 중장년층이 겪어낸 20세기 후반의 격동을 일그러진 형태로 보여준다.
소설가들에게 광화문과 세종로 네거리는 단단하게 굳어진 이미지의 피부를 벗겨내고 싶은 대상이 된다. 수백 년 역사의 소용돌이를 견뎌낸 네거리의 어제와 오늘, 그 구릿빛 역사의 껍질을 소설가들은 벗겨보고 싶은 것이다.
중장년층에겐 격동의 무대
세상 어떤 소설과 단 하나의 공통점도 찾아볼 수 없는 두 권의 소설집, 곧 최순덕 성령충만기와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를 낸 이기호는 그로테스크한 상황을 먼저 제시한다. 이기호의 단편 수인, 그 주인공은 원자력 사고로 이 나라가 잿더미로 변해버린 것도 모르고 산중에 처박혀 소설을 쓰고 또 쓴다. 그러다가 뒤늦게야 해외로 ‘탈출 이주’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는 유엔의 평결을 받게 된다. 이런 이야기 자체는 그 표면의 정당성을 따져서는 곤란하다. 알레고리, 즉 작가의 추상적인 생각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다른 구체적인 대상이나 상황을 설정하여 길게 뻗어 치는 라이트훅 같은 방식으로 이기호는 오늘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수인의 주인공은 어떻게 되었을까. 잿더미로 변해버린 이 비루한 현실을 벗어나 프랑스로 ‘탈출 이주’를 희망하는 주인공에게 유엔의 심판관은 ‘첫 소설’을 구해오라고 명령한다. 그 책은 어디 있는가. ‘교보문고’ 안에 있다. 그런데 이럴 수가. 교보문고는 몇 번이고 덧칠한 것처럼 두껍게 시멘트로 봉인이 되어 있다. 주인공은 시멘트로 봉인된 교보문고 입구에서 곡괭이질을 시작한다. 지금 주인공은, 그러니까 소설가 이기호는 비루한 현실을 벗어나기 위하여 그 상태보다 더 절망적인 멍에를 어찌 되었거나 짊어지겠노라고 말하는 중이다. 광화문의 역사가 실은 그렇게 빚어진 것이기도 하다. 오래전에 시인 최두석은 대꽃 8이라는 작품에서, 후배 소설가가 쓰게 될 거대한 역사적 공간의 압력을 노래한 바 있다.
이루어진 지 스무 해쯤 되어 보이는 대숲에는 삼십대의 상인도 오십대의 품팔이도 들어가 섰습니다. 철모르는 어린이도 섞였습니다. 대숲이 술렁거리더니 일제히 전진하기 시작했습니다. 서걱이는 행진의 걸음마다 외마디 외침이 폭발했습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귓속으로 파고드는 이 소리는 종로에서 광화문으로 곧장 달려갔습니다. 소리가 부딪친 전방 바리케이드에서는 돌연 총포가 난사되었습니다. 이에 대나무들은 쓰러지며 대꽃을 피웠어요.
한 송이 피면
또 한 송이 거품 뿜으며 피고
이꽃 저꽃 저꽃 이꽃 우르르우르르 무리져 피는
피다가 모두 죽는
대꽃.
중견 소설가 이승우는 취화당일기에서 이 역사적 공간의 흥망성쇠를 복화술로 들려준다. 이 소설은 “‘취화당일기’라는 고문서의 존재를 나에게 알려준 사람은 소설가 이완이었다”로 시작한다. 이러한 서두는 대번에 이 소설이 ‘가짜 이야기’임을 말해준다.
이 소설 속에서 화자 ‘나’는 폭설이 내린 어느 날 애인과 모텔에 들어가 사랑을 나눈 뒤, 갑작스럽게 그녀와 헤어지게 된다. 준비 안 된 이별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던 ‘나’는 우연히 ‘10월25일 밤, 광화문’이라는 이완의 소설을 읽게 된다. 소설 속에 소설이 있는, 이야기가 새 이야기를 잉태한, 그래서 그 겹쳐진 이야기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슬그머니 뻗어나가는 방식은 보르헤스나 에코의 흔적을 느끼게 한다.
많은 문학가들, 광화문 소재로 창작
‘취화당일기’는 왕정 시절에 사회적으로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사랑을 나누던 연인이 그들만의 자유로운 공간을 찾아서 광화문 아래의 땅굴을 발견하게 되고, 그 땅굴을 따라 창경궁 왕의 침소에 이르러 사랑을 완성한다는 이야기다. 이를 읽고 ‘나’는 실연의 상처에 빠진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광화문 아래에 있다는 땅굴을 찾아나서게 된다는 것이다.
10월25일 밤에 김소령은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에 앉아 뜨거운 눈빛을 교환하고 있는, 현실의 눈을 피해 어딘가로 스며들기를 간절히 염원하는 안타까운 연인들 앞에 나타나 그 비밀을 알리고, 그리고 그들을 그곳으로 안내한다. 그들은 그날 밤 땅속의 굴을 통해 창경궁 안에 들어간다. 그들이 이른 곳은 50평 정도 되는, 한가운데 나무침대가 놓인 넓은 지하 방. 그들은 그곳이 현실의 보이지 않는 뒤쪽이란 걸 안다. 자신들의 사랑의 간절함과 안타까움이 만들어낸 보이지 않는 틈, 일종의 블랙홀이란 걸 안다. 그리고 그들은 그 비현실의 공간에서, 어쩌면 거기 놓인 침대가 2백 년 동안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함께 잔다. 아무도 그들을 방해하지 않는다.
이러한 상상은 흡사 이 한반도의 현대사를 떠받치고 있는 월대(月臺)와도 같은 광화문과 세종로 네거리를 새롭게 성찰해보려는 의지의 결과들이다. 세종문화회관의 열주들, 교보빌딩과 정부종합청사라는 마천루, 이순신 장군 동상과 그 시야로 내려다본 세종로 태평로의 파노라마를 이 소설가들은 탁구공만큼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축구공 정도의 크기와 탄성으로 주물러보고 싶은 것이다. 왜냐하면 광화문과 세종로 네거리는 이 절묘한 상상력에도 너무나 거대하고 둔중하기 때문인데, 시인 이문재가 광화문, 겨울, 불꽃, 나무에서 들려주고 있듯, 광화문 일대는 밤에도 잠들지 않는 곳이기 때문이다.
해가 졌는데도 어두워지지 않는다
겨울 저물녘 광화문 네거리
맨몸으로 돌아가 있는 가로수들이
일제히 불을 켠다 나뭇가지에
수만 개 꼬마전구들이 들러붙어 있다
불현듯 불꽃나무! 하며 손뼉을 칠 뻔했다
어둠도 이젠 병균 같은 것일까
밤을 끄고 휘황하게 낮을 켜놓은 권력들
내륙 한가운데에 서 있는
해군 장군의 동상도 잠들지 못하고
문 닫은 세종문화회관도 두 눈 뜨고 있다
엽록소를 버리고 쉬는 겨울나무들
한밤중에 이상한 광합성을 하고 있다
광화문은 광화문(光化門)
뿌리로 내려가 있던 겨울나무들이
저녁마다 황급히 올라오고
겨울이 교란당하고 있는 것이다
밤에도 잠들지 못하는 사람들
광화문 겨울나무들
다가오는 봄이 심상치 않다
세종로 네거리에 서서 북으로 광화문 너머 북악산을 멀리 보고 남으로 태평로 따라 숭례문으로 뻗은 길의 희끄무레한 빌딩을 바라보는 것, 동으로 혼잡한 차량의 행렬을 쫓아 종로 저 멀리 확장되는 공간을 보고 서쪽으로 이 대도시의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을 말하려는 듯한 흥국생명 앞의 거대한 ‘해머링 맨’을 바라보는 것. 그렇게 사위를 한번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광화문 앞, 세종로 네거리의 상징성, 역사성이 느껴진다.
광화문 하고 말해보았을 때, 이 단어는 순식간에 우리를 파란만장한 역사의 현장으로 이동시킨다. 600년 조선 역사는 그렇다 치더라도 현대사 100여 년이 이 광화문 앞에서 벌어졌다. 지금의 중장년층에게는 세종로 네거리가 더욱 각별하다. 국제극장 간판이 당당하게 서 있던 것을 시작으로 그 동서남북의 거리와 골목에서 작고 작은 한 개인의 생애가 얼마나 거룩하게 형성되었던가. 당주동 무교동 정동 서린동 수송동 청진동의 실핏줄 같은 거리와 골목은, 그리고 그 공간들의 대대적인 변화 양상은 오늘의 중장년층이 겪어낸 20세기 후반의 격동을 일그러진 형태로 보여준다.
소설가들에게 광화문과 세종로 네거리는 단단하게 굳어진 이미지의 피부를 벗겨내고 싶은 대상이 된다. 수백 년 역사의 소용돌이를 견뎌낸 네거리의 어제와 오늘, 그 구릿빛 역사의 껍질을 소설가들은 벗겨보고 싶은 것이다.
광화문은 대한민국의 역사를 떠받치는 월대다.
세상 어떤 소설과 단 하나의 공통점도 찾아볼 수 없는 두 권의 소설집, 곧 최순덕 성령충만기와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를 낸 이기호는 그로테스크한 상황을 먼저 제시한다. 이기호의 단편 수인, 그 주인공은 원자력 사고로 이 나라가 잿더미로 변해버린 것도 모르고 산중에 처박혀 소설을 쓰고 또 쓴다. 그러다가 뒤늦게야 해외로 ‘탈출 이주’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는 유엔의 평결을 받게 된다. 이런 이야기 자체는 그 표면의 정당성을 따져서는 곤란하다. 알레고리, 즉 작가의 추상적인 생각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다른 구체적인 대상이나 상황을 설정하여 길게 뻗어 치는 라이트훅 같은 방식으로 이기호는 오늘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수인의 주인공은 어떻게 되었을까. 잿더미로 변해버린 이 비루한 현실을 벗어나 프랑스로 ‘탈출 이주’를 희망하는 주인공에게 유엔의 심판관은 ‘첫 소설’을 구해오라고 명령한다. 그 책은 어디 있는가. ‘교보문고’ 안에 있다. 그런데 이럴 수가. 교보문고는 몇 번이고 덧칠한 것처럼 두껍게 시멘트로 봉인이 되어 있다. 주인공은 시멘트로 봉인된 교보문고 입구에서 곡괭이질을 시작한다. 지금 주인공은, 그러니까 소설가 이기호는 비루한 현실을 벗어나기 위하여 그 상태보다 더 절망적인 멍에를 어찌 되었거나 짊어지겠노라고 말하는 중이다. 광화문의 역사가 실은 그렇게 빚어진 것이기도 하다. 오래전에 시인 최두석은 대꽃 8이라는 작품에서, 후배 소설가가 쓰게 될 거대한 역사적 공간의 압력을 노래한 바 있다.
이루어진 지 스무 해쯤 되어 보이는 대숲에는 삼십대의 상인도 오십대의 품팔이도 들어가 섰습니다. 철모르는 어린이도 섞였습니다. 대숲이 술렁거리더니 일제히 전진하기 시작했습니다. 서걱이는 행진의 걸음마다 외마디 외침이 폭발했습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귓속으로 파고드는 이 소리는 종로에서 광화문으로 곧장 달려갔습니다. 소리가 부딪친 전방 바리케이드에서는 돌연 총포가 난사되었습니다. 이에 대나무들은 쓰러지며 대꽃을 피웠어요.
한 송이 피면
또 한 송이 거품 뿜으며 피고
이꽃 저꽃 저꽃 이꽃 우르르우르르 무리져 피는
피다가 모두 죽는
대꽃.
중견 소설가 이승우는 취화당일기에서 이 역사적 공간의 흥망성쇠를 복화술로 들려준다. 이 소설은 “‘취화당일기’라는 고문서의 존재를 나에게 알려준 사람은 소설가 이완이었다”로 시작한다. 이러한 서두는 대번에 이 소설이 ‘가짜 이야기’임을 말해준다.
이 소설 속에서 화자 ‘나’는 폭설이 내린 어느 날 애인과 모텔에 들어가 사랑을 나눈 뒤, 갑작스럽게 그녀와 헤어지게 된다. 준비 안 된 이별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던 ‘나’는 우연히 ‘10월25일 밤, 광화문’이라는 이완의 소설을 읽게 된다. 소설 속에 소설이 있는, 이야기가 새 이야기를 잉태한, 그래서 그 겹쳐진 이야기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슬그머니 뻗어나가는 방식은 보르헤스나 에코의 흔적을 느끼게 한다.
다가오는 봄을 기다리는 광화문의 나목.
‘취화당일기’는 왕정 시절에 사회적으로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사랑을 나누던 연인이 그들만의 자유로운 공간을 찾아서 광화문 아래의 땅굴을 발견하게 되고, 그 땅굴을 따라 창경궁 왕의 침소에 이르러 사랑을 완성한다는 이야기다. 이를 읽고 ‘나’는 실연의 상처에 빠진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광화문 아래에 있다는 땅굴을 찾아나서게 된다는 것이다.
10월25일 밤에 김소령은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에 앉아 뜨거운 눈빛을 교환하고 있는, 현실의 눈을 피해 어딘가로 스며들기를 간절히 염원하는 안타까운 연인들 앞에 나타나 그 비밀을 알리고, 그리고 그들을 그곳으로 안내한다. 그들은 그날 밤 땅속의 굴을 통해 창경궁 안에 들어간다. 그들이 이른 곳은 50평 정도 되는, 한가운데 나무침대가 놓인 넓은 지하 방. 그들은 그곳이 현실의 보이지 않는 뒤쪽이란 걸 안다. 자신들의 사랑의 간절함과 안타까움이 만들어낸 보이지 않는 틈, 일종의 블랙홀이란 걸 안다. 그리고 그들은 그 비현실의 공간에서, 어쩌면 거기 놓인 침대가 2백 년 동안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함께 잔다. 아무도 그들을 방해하지 않는다.
이러한 상상은 흡사 이 한반도의 현대사를 떠받치고 있는 월대(月臺)와도 같은 광화문과 세종로 네거리를 새롭게 성찰해보려는 의지의 결과들이다. 세종문화회관의 열주들, 교보빌딩과 정부종합청사라는 마천루, 이순신 장군 동상과 그 시야로 내려다본 세종로 태평로의 파노라마를 이 소설가들은 탁구공만큼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축구공 정도의 크기와 탄성으로 주물러보고 싶은 것이다. 왜냐하면 광화문과 세종로 네거리는 이 절묘한 상상력에도 너무나 거대하고 둔중하기 때문인데, 시인 이문재가 광화문, 겨울, 불꽃, 나무에서 들려주고 있듯, 광화문 일대는 밤에도 잠들지 않는 곳이기 때문이다.
해가 졌는데도 어두워지지 않는다
겨울 저물녘 광화문 네거리
맨몸으로 돌아가 있는 가로수들이
일제히 불을 켠다 나뭇가지에
수만 개 꼬마전구들이 들러붙어 있다
불현듯 불꽃나무! 하며 손뼉을 칠 뻔했다
어둠도 이젠 병균 같은 것일까
밤을 끄고 휘황하게 낮을 켜놓은 권력들
내륙 한가운데에 서 있는
해군 장군의 동상도 잠들지 못하고
문 닫은 세종문화회관도 두 눈 뜨고 있다
엽록소를 버리고 쉬는 겨울나무들
한밤중에 이상한 광합성을 하고 있다
광화문은 광화문(光化門)
뿌리로 내려가 있던 겨울나무들이
저녁마다 황급히 올라오고
겨울이 교란당하고 있는 것이다
밤에도 잠들지 못하는 사람들
광화문 겨울나무들
다가오는 봄이 심상치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