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제공·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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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어진 현실의 사각형
빌리는 권투를 좋아하는 아이입니다. 사실 정확히 말하면 남자아이는 권투를 좋아해야 한다는 분위기 속에서 자신이 진짜 원하는 바를 찾을 겨를이 없었던 겁니다. 권투는 미친 짓이라는 친구에게 핀잔을 주며 호기롭게 오른 곳이 사각의 권투 링입니다. 빌리는 4개의 모서리가 형태와 위치를 고정하는 닫힌 공간이 힘겹습니다. 팔을 뻗어 상대를 치기는커녕 춤추듯이 요리조리 팔을 휘두르다 크게 한 방 맞고 쓰러집니다.사각형의 겉모양은 정적인 분위기를 풍깁니다. 변화가 없이 견고하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태어나고 죽고 다시 태어나는 자연에는 사각형이 없습니다. 인간이 자연을 구분하면서 사각형을 만듭니다. 대지, 땅에 선을 그어 만든 사각형에 나의 공간, 당신의 공간 또는 뜻을 함께하는 우리의 공간 등 소유권을 부여합니다. 확고하게 선을 그은 모양은 안정감을 주지만 지나친 경계를 형성해 소통을 가로막습니다. 사각형의 링은 빌리가 타고난 사회·문화적 환경의 고정관념을 상징하는 틀과 같습니다.
사각형 밖 새로운 세계로 입문
권투장의 명예를 더럽혔다며 핀잔주던 선생님이 오히려 빌리에게 사각형 밖 새로운 세계를 연결해주는 전령관 구실을 합니다. 체육관 한쪽을 빌려 쓰는 발레 교습반 선생님에게 열쇠를 전해주라는 심부름을 시킨 거죠. 하얀 발레복을 입고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소녀들의 모습에 이상하게 눈길이 갑니다. 쭈뼛거리더니 어느새 발레 연습용 긴 선을 잡고 섭니다. 권투용 보호구와 글러브를 낀 채 잡은 발레봉의 곧은 선은 빌리가 새로운 세계의 첫 관문을 통과하도록 도와줍니다.춤을 좋아하는 자신이 ‘호모일까’ 불안해하면서도 글러브와 신발을 벗고 선생님이 던져준 여자용 발레 슈즈를 신습니다. 기존 관념과 전혀 다른 삶에 입문한 빌리 모습에서 변형의 문을 통과하는 주제를 다룬 수메르 신화의 이난나(Inanna) 여왕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여왕은 관문을 통과할 때마다 왕관, 목걸이, 보석, 금반지, 옷을 하나씩 벗어야 하죠. 신화학자 조지프 캠벨은 이 이야기가 영웅이 자존심, 아름다움, 기존의 삶을 팽개치면 두려운 대상에 복종하면서 그 대상과 하나임을 깨닫게 된다는 뜻이라고 설명합니다. 현 관념을 버리고 버리면 비로소 새로운 것을 얻게 되는 이치를 알았던 걸까요. 아빠로부터 받은 권투 교습비 50펜스가 발레 선생님의 손에 들어가는 동안 빌리는 점점 더 깊이 발레에 빠져듭니다.
자기를 만나는 침묵의 공간
[사진 제공·네이버 영화]
‘도형, 그림의 심리학’에 의하면 피라미드 같은 성스러운 건축물과 만다라 같은 우주의 원리를 표현하는 이미지에 사용된 정사각형은 완전한 아름다움을 상징합니다. 사계절을 경험해야 한 해를 알게 되듯이, 정사각형의 4개 모서리는 각각 세상을 보는 관점을 제공하며 그것이 모두 통합될 때, 즉 모서리를 극복할 때 자기실현이라는 목표에 도달할 수 있는 완전한 형태입니다. 스스로 들어간 사각형에서 시련을 견뎌냅니다. 기존 고정관념을 상징하던 사각의 링은 완전한 재탄생의 공간으로 탈바꿈했습니다.
빌리가 그리는 선
[사진 제공·네이버 영화]
캠벨의 책 ‘신화의 힘’에는 이런 글이 있습니다. ‘행복을 찾으려면, 행복하다고 느끼는 순간을 잘 기억해두어야 합니다.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가? 이 질문이 나오면 누가 뭐라 하건 거기에 머물면 됩니다.’
하찮은 존재라 여기는 내 안의 목소리를 따뜻하게 맞이하면 ‘무언가’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냅니다. 작은 사각형 의자에 앉아 끊임없이 ‘무언가’에 몰두하는 지금, 자신만의 선을 그릴 자유를 창조하는 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