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노보드 김윤호 선수. [사진 제공 · 대한장애인체육회]
국가대표 2년 만에 메달 유망주
김윤호 선수는 2018 평창동계패럴림픽에서 첫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스노보드에서 메달을 목에 걸겠다는 각오다. [박해윤 기자]
직장과 선수 생활을 병행하는 국가대표는 보기 드문데 어떻게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았나요.
“장애를 입고 몇 해 뒤부터 계속 공무원시험 준비를 했어요. 그러던 중 인천시설공단이 조경업무를 담당할 직원을 뽑더라고요. 마침 조경 관련 자격증이 있던 터라 지원해 합격했죠. 스노보드 국가대표가 된 것도 모집공고가 난 걸 지인이 알려줘 지원했어요. 선수 생활 초창기에는 회사에서 공가 처리를 해주지 않아 연차를 내고 훈련과 경기에 참가했는데 지금은 회사에서 배려를 많이 해주세요. 다행히 조경 업무는 겨울에 일이 적은 편이라 동계 시즌에는 스노보드 국가대표로 활동할 기회가 많아요.”
가장 최근 경기 성적은 만족할 만한 수준이었나요.
“지난해 10월 네덜란드 뱅크드 슬라럼 국제대회와 11월 핀란드 스노보드 크로스 국제대회가 최근 경기인데, 둘 다 17위 정도를 기록했어요. 성적으로만 보면 국제대회 데뷔전인 2016년 미국에서 경기가 11위로 가장 좋았죠. 그런데 실력적으로는 점점 발전하고 있어요. 점프나 웨이브를 할 때 충격을 덜 받고 속도를 내는 스킬을 터득해 기록을 향상시키고 있죠. 다만 부상이 문제예요. 스노보드는 의족을 착용한 채 타는데 의족이 맞닿은 부위에 자꾸 마찰이 생겨 상처가 나는 통에 최근 다섯 바늘을 꿰맸어요. 보통 살갗에 상처가 나면 잘 아물지만 절단 부위는 혈액순환이 잘 안 돼 낫는 데 시간이 걸려요. 그 기간에 설상 훈련은 못 하고 체력 훈련만 하다 보니 경기 결과에 아쉬움이 남네요. 부상이 없었다면 10위권 진입은 가능했을 거예요.”
장애인아이스하키 정승환 선수가 말하기를 김윤호 선수가 아이스하키에서도 활약이 두드러졌다고 하던데요.
“6년가량 장애인아이스하키 선수로 생활했어요. 초창기에는 인천팀이 없어 서울팀 소속으로 매번 먼 거리를 달려가 참여했죠. 눈이 펑펑 쏟아지던 날 인천에서 성남까지 위험을 무릅쓰고 운전해 갔더니 도착한 선수들이 2~3명뿐이더라고요. ‘기왕 왔으니 우리끼리 연습하자’고 했을 정도로 열의가 대단했어요. 결혼 후 운동을 등한시한 탓에 살이 찌자 골키퍼로 밀려났어요. 그러던 중 2015년 스노보드로 전향한 거죠.”
이력을 보면 베트남 장애인육상선수권대회에서 투포환 부문 금메달을 땄던데요.
“보통 동계 종목에 출전하는 장애인 국가대표 선수는 하계 종목에도 출전할 수 있어요. 제 경우 원반던지기, 투포환, 창던지기에 나갔는데 2014, 2015년 3개 종목 모두 금메달을 획득했죠. 당시 아이스하키를 하다 보니 상체 근력이 좋아 그런 결과가 나왔어요. 그런데 스노보드로 전향한 이후 지난해와 지지난해에는 메달을 따지 못했어요. 스노보드를 타려면 상반신과 하반신의 균형이 맞아야 경기력이 향상되기 때문에 20kg을 감량했거든요. 스노보드에 집중하면서 그렇게 된 거라 아쉽지는 않아요.”
1년 칩거, 거울에 비친 모습 보고 운동 시작
장애인스노보드는 2개 세부 종목으로 나뉘는데 모두 기록으로 순위를 다툰다. 2017년 정선에서 열린 국제대회에 참가한 김윤호 선수. [사진 제공 · 김윤호 선수]
동계 국가대표 선수들은 보통 하계 대회에도 출전하는데 김윤호 선수는 2014, 2015년 국제대회에서 원반던지기, 투포환, 창던지기 등 3개 종목에서 모두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포환을 던지는 김 선수. [사진 제공 · 김윤호 선수]
사고는 어떻게 해서 났는지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친구의 사망소식을 듣고 오토바이를 타고 병원으로 향하던 길이었어요. 직진하던 중 좌회전하는 택시와 충돌해 발가락 부위에 심각한 부상을 입었죠. 대학병원 응급실로 향했는데 일요일인 탓에 의료진이 없어 서울 전문병원으로 가야 했어요. 그사이 염증이 심해졌고 절단 부위는 발가락에서 발목으로, 다시 종아리까지 올라가게 됐죠. 보통 절단하고 한 달만 입원하면 된다는데 저는 염증 때문에 반년을 입원할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았어요.”
장애가 생겼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 같은데 어땠나요.
“사고 당시에는 걷기만 해도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의사가 발가락을 움직여보라는데 전혀 말을 듣지 않더라고요. 게다가 상상통증이 너무 심해 밤마다 견디기가 힘들었어요. 그때는 의족을 착용하는 것도, 걷는 것도 불가능할 것만 같았죠. 또 교통사고 원인이 100% 제 과실로 나오는 바람에 치료비를 전액 자비로 부담했어요. 시간이 지나고 나서는 목숨을 건진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됐어요. 사고 직후 눈을 떴을 때 머리 바로 옆에 택시 바퀴가 있었거든요. 가족도 처음에는 충격이 컸지만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했죠.”
퇴원 후에는 어떻게 지냈나요.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어요.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으니까요. 당시에는 정상적인 생활은커녕 결혼도 못 할 것 같았어요. 하루는 우연히 거울을 보게 됐는데 너무 초췌한 몰골이더라고요.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 싶어 일단 나가서 등산을 시작했어요. 그 후로는 자전거, 스노보드 등 이런저런 운동을 하면서 마인드가 차츰 바뀌었죠.”
장애인 선수는 대부분 운동을 시작하면서 긍정적으로 바뀐 것 같은데 김 선수도 그런 사례였나요.
“저도 그랬어요. 장애가 생긴 이후 반바지를 한 번도 안 입을 정도로 남들에게 다리 보이기를 꺼렸어요. 그런데 장애인아이스하키를 하러 갔더니 제가 제일 경증이더라고요. 살짝 뛸 때면 동료들이 ‘이야~ 쟤는 뛸 수도 있네’라며 부러워하더라고요.(웃음) 매사 비관적이었는데 운동하면서 많이 바뀌었죠. 또 장애인 선수들과 고민을 나누고 의지하면서 인생을 다시 생각하게 됐어요.”
여러 인터뷰에서 장애가 있는 사람과 결혼을 결심해준 아내에게 고마움을 표했는데요.
“공무원시험을 상당 기간 준비했는데 1점 차로 떨어지는 등 잘 안 됐어요. 그러던 중 교회 목사님이 신학대 입학을 권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2008년 입학했어요. 거기서 와이프를 만났죠.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들었지만 기회가 없었어요. 어느 날 대학 야간반 총무를 맡고 있던 와이프로부터 연락이 와 ‘더 낸 회비 5000원을 돌려줄 테니 계좌번호를 알려달라’고 하더라고요. 이때다 싶어 ‘계좌로 받는 건 못 믿겠다. 만나서 받겠다’고 했고 그날 이후 연애하다 1년 뒤 결혼을 결심했어요. 장애가 있고, 젊은 시절 방황했던 일 때문에 처가에서 결혼을 반대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장인어른께서 ‘내 딸이 좋다면 됐다’며 허락해주셨어요. 정말 감사했죠.”
두 아이의 아빠이기도 한데 아이들은 국가대표인 아빠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나요.
“아직 일곱 살, 네 살이라서 국가대표가 뭔지 잘 모르는 것 같아요.(웃음) 전지훈련을 보름가량 가면 그냥 회사 출장 가는 줄로만 알더라고요. 아이들이 태어나고 가장으로서 책임감도 생기면서 운동에 임하는 자세가 많이 달라졌어요. 첫째가 태어났을 때 저를 꼭 닮은 걸 보고 더 힘을 내야겠다고 다짐했죠.”
“시상식장에 애국가 울리도록 할 것”
아내, 큰아들, 둘째 딸과 함께 셀카를 찍은 김윤호 선수. [사진 제공 · 김윤호 선수]
김 선수에게 평창동계패럴림픽은 어떤 의미인가요.
“삶의 목표죠. 자국에서 열리는 패럴림픽에 참가할 수 있는 선수가 몇이나 되겠어요. 장애인이지만 목표의식을 갖고 있고, 부끄럽지 않게 좋은 성적을 내고 싶어요. 성적은 일단 금메달을 노리고 있어요. 자국에서 열리는 이점이 분명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시상식장에 애국가가 울리도록 할 거예요.”
캐나다, 미국, 러시아 등 동계 스포츠 강국 선수들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나요.
“그런 선수들과 경쟁에도 자신은 있어요. 뛰어난 해외 선수를 보면 장애를 입기 전에 이미 스케이트보드 프로 선수로 활약한 경우도 있더라고요. 또 나이키 등 글로벌 기업에서 장애인스노보드 국가대표 선수팀을 지원하기도 하고요. 지원 규모와 체계 면에서 국내와 비교가 되긴 해요. 우리는 장애인 실업팀이 거의 없잖아요. 그나마 정부에서 해외 전지훈련 등 각종 지원을 많이 해주고 있어요. 평창이 끝이 아니라 베이징동계패럴림픽에서도 메달을 꿈꿀 수 있도록 꾸준히 지원해줬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평창동계패럴림픽이 두 달 앞으로 다가왔는데 훈련은 어떻게 하고 있나요.
“1월 캐나다 국제대회가 예정돼 있어 둘째 주부터 국내 훈련을 시작해요. 오전 8시 아침 운동을 시작으로 설상 운동을 하고, 오후에는 근력 운동을 하는 등 하루 평균 8시간씩 훈련하죠. 취침 전에는 감독님과 기술적으로 보강할 점에 대해 논의하고요. 패럴림픽에 임박해서는 부상을 입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박차를 가해야죠.”
국가대표 선수로 활약하게 된 것에 대해 감사를 표하고 싶은 사람이 있나요.
“직장인 인천시설공단 측에 감사해요. 사실 연차를 내고 개인 연습을 하고 있을 때 이사 한 분이 사정을 알고 공가 처리를 할 수 있도록 배려해줬어요. 또 같은 부서 동료들에게도 감사해요. 한 사람이 한 달씩 자리를 비우면 그 일을 다른 사람이 대신해야 하잖아요. 어떻게 보면 폐를 끼치는 직원인데 다들 이해해주고 응원까지 해주니 감사할 따름이에요. 그래서 비시즌에는 2배로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평창동계패럴림픽을 앞두고 국민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패럴림픽 선수들도 응원을 많이 해주셨으면 해요. 장애와 비장애 경기를 보는 비율이 많이 다른 게 현실이니까요. 스노보드뿐 아니라 6개 종목에 출전하는 모든 선수가 열심히 훈련해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도록 노력할 거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