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도 우전해수욕장(작은 사진)과 태평염전.
10개국 93개 도시 ‘슬로시티’ 가입 … 아시아엔 아직 없어
이곳에서라면 이방인도 도시화와 경쟁, 비인간화를 걱정하지 않으면서 피에르 쌍소가 말한 ‘부드럽고 우아하고 배려 깊은 삶의 방식’인 느림을 맛볼 수 있을 듯하다.
요즘 증도를 포함해 전남 장흥군 우산슬로월드지구, 완도군 청산도, 담양군 창평면 일대를 ‘슬로시티’(slow city·이탈리아어로 citta lenta)로 지정하려는 움직임이 본격화되고 있다. 이들 지역의 요청으로 9월7일부터 이탈리아 슬로시티 국제연맹에서 로베르토 안젤루치 회장 등 대표단이 방한해 현지실사를 진행했다. 국제연맹의 가입인증 여부는 올해 11월 결정된다.
‘슬로시티’란 전통 보존, 지역민 중심, 생태주의 등 느림의 철학을 바탕으로 지속 가능한 발전을 추구하는 도시(지역 자치단체, 커뮤니티)를 의미한다. 이는 1986년 미국형 효율지상주의와 패스트푸드에 기초한 패스트 라이프에 반대해 시작된 슬로푸드 운동의 정신을 지역 차원으로 확대한 개념이다.
1999년 슬로시티 운동이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이후 전 세계 10개국 93개 도시(47쪽 기사 참조)가 슬로시티 국제연맹에 가입했으며, 이 도시들은 속도 지향적 삶에 반기를 들고 있다. 이 운동을 추진한 대부분의 도시들은 생태, 환경, 맛, 전통을 기반으로 하는 관광도시들로, 고용률 100%라는 경제적 효율성도 달성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슬로시티’가 되려면 국제연맹에서 제시하는 기준을 충족해야 한다. 무엇보다 인간적인 삶이 가능한 적정 인구(5만명)를 넘어서지 않으면서 전통 산업, 슬로푸드와 아름다운 경관을 갖춰야 하며, 대기업 자본이 없어야 한다. 또 세계적 네트워크를 가질 수 있는 보편적 상품이나 문화 등이 있어야 한다(상자기사 참조).
그렇다면 슬로시티 가입을 추진하고 있는 국내 지방자치단체(이하 지자체)들의 상황은 어떨까. 슬로시티 국제연맹의 실사를 계기로 각 지역의 현황을 짚어봤다.
신안군 증도
해수욕장과 염전 등 천혜 자연조건을 갖추고 있는 증도는 지난해부터 슬로시티 가입을 준비해왔다. 올해 6월 말에는 섬 전체를 자전거섬으로 선포하고 섬 내에 자전거 350대를 비치해 누구든지 탈 수 있도록 했다. 대체에너지 개발을 위해 800kW급 태양광 발전소(12월 준공 예정)를 건설 중이며, 에너지 소모가 적은 친환경 교통시스템 구축 방안도 모색하고 있다.
태평염전은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석조소금창고를 국내 최초의 소금박물관으로 활용하고, 된장 간장 젓갈 등 천일염을 바탕으로 한 전통음식 개발과 환경친화적 숙박시설 건설, 소금을 활용한 힐링센터와 염생식물원 조성 등 증도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해 다양한 투자를 계획 중이다. 박우량 신안군수는 “도민들에게 느리게 사는 삶도 새로운 대안이 될 수 있음을 알리고 싶다. 도민의 의견을 수렴해 시간 자체를 1시간 정도 늦게 가게 하는 방식도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슬로시티 인증을 추진 중인 완도군 청산도(사진 위), 장흥군 우산슬로월드지구, 담양군 창평 한옥마을(왼쪽부터).
완도군은 2006년 문화관광부의 ‘가고 싶은 섬’ 프로젝트 시범사업(사업비 174억원) 지역으로 선정된 청산도를 슬로시티와 묶어 개발하는 방안을 모색 중이다. 청산도는 인구 2508명에 청동기시대 지석묘, 당리 민속가옥, 해녀 등 섬 특유의 민속 문화와 독특한 농경·어로 문화가 풍부하게 살아 있는 곳이다. 특히 이곳은 경관이 아름다워 영화 ‘서편제’와 드라마 ‘봄의 왈츠’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군 관계자는 “아름다운 휴식과 특별한 체험이라는 청산도의 발전 방향이 슬로시티와 꼭 들어맞는다. 슬로시티 인증을 통해 또 하나의 브랜드로 관광사업을 발전시켜 나갈 계획이다”라고 말했다. 청산도의 경우 도민들이 특히 적극적이다. 지난 5월 군이 슬로시티 가입 추진 내용을 놓고 ‘가고 싶은 섬 추진위원회’ 소속 주민들과 의견을 교환했을 때 적극적으로 환영 의사를 표현했다.
장흥군 장평면 우산리·유치면
‘느린 세상, 건강한 장흥’을 군정 목표로 내세우고 있는 장흥군은 2006년 행정자치부 주최 ‘살기 좋은 지역 만들기’에 선정된 우산리 ‘우산슬로월드지구’와 유치면 일대를 슬로시티로 신청했다. 이 지역 1286명 면민은 표고버섯을 대표 지역농산물 브랜드로 키워가고 있으며, 표고버섯을 산림청의 지리적 표시제 제2호로 등록했다. 버려지는 표고 자목을 활용해 장수풍뎅이를 사육하는 장수풍뎅이마을(유치면 반월리)에도 도시 관광객이 부쩍 늘었다. 전통 방식의 장담그기, 청국장 제조, 유기농 수산업 확산, 지렁이 생태학교 운영 등도 슬로시티 인증을 위해 추진해온 사업이다. 군 관계자는 “장흥은 11만4000명이던 군 인구가 20년 사이에 4만3800명으로 줄었고, 노령화로 국가 및 지방 개발계획에서 늘 소외됐다. 하지만 요즘은 자연환경과 공동체 문화가 살아 있는 지역으로 재인식되고 있다”라고 말했다.
담양군 창평면
담양군은 18채의 전통가옥이 모여 있는 창평면 유천리 일대가 슬로시티로 지정되길 기대하고 있다. 면민은 모두 4200여 명. 이곳은 전통적으로 죽부인 대자리 등 죽세공품과 죽염된장, 한과, 쌀엿 등 전통음식을 생산해왔다. 또 이곳은 전국 유일의 한국대나무박물관, 전국 유일의 죽림욕장인 죽녹원 등이 있어 자연환경과 전통문화가 살아 있는 웰빙형 관광명소로 급부상 중이다. 군 관계자는 “슬로시티 가입으로 개발되지 않은 자연환경과 문화유산을 보존하고, 여유 있는 삶을 되찾을 수 있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슬로시티 가입을 준비하는 지자체 가운데는 준비 기간이 짧고 주민 홍보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곳도 있지만, 각 지자체들은 가입이 무난하리라 기대한다. 또 한국슬로시티 유치위원회에서는 적어도 3곳 정도는 가입이 가능하리라 내다보고 있다. 태평염전 손일선 대표도 “슬로시티의 창시자 사투르니니가 지난해 증도 염전을 둘러보며 ‘신이 키스한 곳’이라고 극찬하면서, 아시아 최초의 슬로시티 가입을 위해 협력하겠다고 말했다”며 가입을 낙관했다.
물론 슬로시티 지정이 전부는 아니다. 유치위원인 장희정 신라대 교수는 “지자체장의 임기가 바뀌어도 정책의 연속성이 보장돼야 하고, 관광상품화를 위해 지속적으로 콘텐츠를 개발해야 한다. 유통 경로, 일정 수준의 품질관리를 위한 민간자문기구도 필요하며, 국제 교류와 모니터링을 위한 정부의 지원제도도 갖춰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슬로시티 가입을 계기로 농어촌과 중소도시의 새로운 발전 모델이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인가. 슬로시티 한국유치위원장 손대현 한양대 교수는 “대도시화, 한미 FTA 등의 영향으로 농촌산업이 수세에 몰려 있는 국내 현실에서 슬로시티는 세계적 네트워크 가입을 통한 농어촌 지역의 국제적 브랜드화, 전통과 자연생태 관광상품화, 중소도시의 경제 자립 모델 제시 등의 효과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창시자인 사투르니니는 “이탈리아의 올리브, 와인 생산지를 중심으로 시작된 슬로시티 운동이 이제 유럽뿐 아니라 아시아 지역으로도 확산되고 있는 추세이며, 슬로시티는 향후 인구 5만 이하 중소도시의 세계적 발전 모델로 주목받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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