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연히 산신령이 나타나 금도끼, 은도끼, 쇠도끼 중 하나를 고르라 한다면 그것은 쉽다. 가장 값나가는 것을 고르면 되니까. 그러나 스물아홉 살 여성에게 일, 결혼, 공부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라 한다면 그것은 아주 복잡한 일이 되고 만다. 무엇이 가장 가치 있는 선택이 될지, 지금으로서는 도무지 가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대학 졸업 후 사회에 진출한 지 어언 4, 5년. 풋풋한 후배에게 ‘귀여운 막내’ 자리를 물려준 지 꽤 됐고, 이제 사회의 ‘때’도 좀 묻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만족스럽지 않은 것도 괴로운데, 나의 진짜 꿈이 무엇이었는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해 더 슬프다. 두려운 나이 서른이 되기 전에 어떤 변화, 도약이 필요하다.
제스프리 한국지사장, 성공한 여성 기업인
최근 ‘여자 나이 스물아홉, 일할까 결혼할까 공부할까?’(북하우스)라는 흥미로우면서도 서글픈 제목의 책을 펴낸 김희정(39) 엔젯오차드 대표를 만나러 가기 전날, 낮에는 서른 되기 전에 해치운다며 서둘러 결혼한 친구가 임신 소식을 알려왔고, 야근을 마친 늦은 밤에는 적금에 퇴직금까지 탈탈 털어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는 친구와 차를 마셨다. “서른이 되기 전에 뭔가 결정해야 했어.” 떠나는 친구가 말했다. 그럼 나는 어쩌나. 일할까 결혼할까, 아니면 공부할까?
“책 제목은 제가 직접 지었어요. 10년 전, 스물아홉 살 때 가장 궁금해했던 질문이거든요.”
숟가락으로 떠먹는 과일은? ‘키위’라는 정답을 알고 있는 사람은 김 대표를 절반쯤 아는 셈이다. 지난해 3월까지 그는 그린키위와 골드키위를 수출하는 뉴질랜드 기업 ‘제스프리’의 한국지사장이었다. 스물아홉 나이에 제스프리 한국지사 1인 사원 겸 사장이 되어 10년 만에 한국을 세계에서 두 번째로 뉴질랜드 본사에 많은 이윤을 안겨주는 시장으로 성장시킨, 성공한 여성 기업인이다.
김 대표는 “스물아홉 살 후배들에게 한 가지라도 기억에 남을 만한 조언을 해주고 싶다는 마음에 책을 썼다”고 했다. 그러나 이 책은 마치 개인의 ‘실패 및 실수 보고서’ 같다. 대학 졸업 후 5년간 광고회사에서, 그리고 제스프리에서 10년간 일하면서 저질렀던 각종 사건(?)을 가감 없이 책에 실어놨다. 역설적이게도 이 점이 그의 책을 여타 자기개발서와 구별짓고 있으며, 그런 실수와 실패에서 나온 결론들에 좀더 진득한 설득력을 부여한다.
그의 조언은 매우 직설적이면서도 현실적이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일을 하다 보면 성격을 버리게 된다는 게 내 지론이다.’ ‘육아와 직장생활은 병행할 수 없다.’ ‘일은 삶의 비균형을 요구한다.’ ‘출산이 경력 관리의 엄청난 장애요소 같아 보이지만, 사실이다.’ ‘회사는 내 영어의 미숙함을 참을성 있게 기다려주지 않는다.’ ‘사내정치는 반드시 필요하다. “난 그런 더러운 판에 끼고 싶지도, 알고 싶지도 않아요” 라고 한다면 그냥 집에서 잘 쉬면 된다.’
요즘 국내 드라마에서 인기 코드로 자리잡은 혼전 동거에 대해서도 그는 약간은 도발적이고 명쾌한 조언을 내놓는다. ‘먼저 살아보고 결혼을 결정하라. 단, 동거 사실은 가능한 한 주변 사람들에게 숨겨라’라고.
“뉴질랜드인 동료에게 들은 이야기예요. 사귀던 남자와 결혼하겠다고 하니까 남자친구의 부모가 반대했대요. 어떻게 동거도 안 해보고 결혼하느냐고요. 그래서 2년간 동거한 뒤 결혼했다고 하더라고요. 저도 그게 맞다고 생각해요. 결혼과 연애는 정말 다르거든요. 하지만 한국에서는 동거에 대한 시선이 좋지 않잖아요. 그러니까 몰래 해야죠. 모든 걸 다 말해도 좋은 직장동료, 선후배 같은 것은 없어요.”
맞벌이 여성들이 많이 하는 고민 가운데 하나는 치열하게 도전해 사회에서 성공한 여성이 되느냐, 아니면 회사는 적당히 다니면서 살림과 자녀에 더 신경 쓰느냐다. 많은 여성들이 둘 다 하고 싶어 ‘슈퍼우먼 되기’에 도전했다가 그만 넘어지고 만다.
“광고계 여자선배들 중 미혼이면서 최고의 자리까지 오른 분과 회사에서는 그다지 성공하지 못했지만 결혼해 두 자녀를 키우고 있는 분이 있어요. 두 분 다 한편으로는 행복하면서 한편으로는 아쉬운 점이 있을 테죠. 일과 살림, 둘 다 잘 하기는 어려운 게 현실 같아요. 선택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결혼한 직장여성들은 늘 자녀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게 마련이다. 제스프리에서 일하던 시절, 잦은 해외출장으로 주말에도 집에 있지 못했던 김 대표 역시 아들을 ‘남의 손으로’ 키웠다. 그러나 그는 ‘슈퍼우먼은 없다’는 쪽이다. 일하는 엄마들은 제 손으로 자녀를 키운 엄마들보다 아이와의 친밀감이 떨어진다는데….
“그건 맞는 말이에요. 저도 아들과 서로 부대끼면서 쌓이는 정이 부족한 것 같아요. 하지만 아들에게 미안해하지 않으려고요. 제 아들보다 좋지 않은 환경에서 자라는 아이들도 얼마나 많은데요.”
제스프리 키위가 처음 들어온 2000년 봄, 김 대표는 키위 3만 박스를 팔지 못해 쩔쩔맸다. 그러나 6년이 지난 2006년에는 300만 박스, 약 1억8000개의 키위를 한국에 들여올 정도로 성공을 거뒀다. 이런 성공의 정점에서 자진해 내려오기란 쉽지 않은 법이다. 그러나 김 대표는 한국시장에서 완벽하게 자리를 굳힌 제스프리를 스스로 그만뒀다.
“가진 게 바닥이 드러날 때는 쉬어 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스프리가 성공을 거두자 일에 대한 열정이 바닥났어요. 그러니까 엄살이 늘고, 시건방져지고, 공허해지더군요. 마흔 살이 되기 전, 한 번 더 ‘리스크 테이킹(risk taking)’을 해보자고 결심했죠.”
누가 봐도 열정적인 사람이다. 하긴 그는 대학 시절에도 무모하리만치 용감한 선택을 한 바 있다. 해외여행자가 드물었던 1987년 봄, 스무 살이던 그는 앞으론 영어를 잘해야 한다는 막연한 생각에 세계지도를 펼쳤다.
“호주대륙 서부에 ‘백조 호수(Swan River)’라는, 예쁜 이름의 호수가 있는 도시가 눈에 들어오더군요. 그래서 ‘여기다!’라고 떠났죠.”
마흔 되기 전 ‘리스크 테이킹’ 컨테이너 박스에서 회사 차려
그곳은 시드니와 동서로 정반대쪽에 자리한 서호주의 퍼스(Perth)였다. 지금은 많은 한인 유학생들이 나가 있지만, 김 대표가 퍼스의 머도크대학에 다니던 4년 내내 한국인 유학생이라곤 그를 포함해 딱 2명뿐이었다고 한다.
김 대표는 지난해 10월 뉴질랜드 친환경 제품을 수입, 제조하는 회사 엔젯오차드를 세우는 것으로 ‘리스크 테이킹’을 시작했다. 높은 연봉, 청담동의 멋진 사무실이 자동으로 따라붙는 프랑스 명품 주방가구업체의 한국지사장 자리를 제안받았지만 거절했다. 대신 경기도 일산의 컨테이너 박스에 직원 5명을 둔 회사를 차렸다. 그는 “기대한 리스크의 3배, 아니 10배다. 파도를 기대했는데 이건 해일 수준”이라며 웃었다.
다시 스물아홉 살로 돌아간다면 일, 결혼, 공부 중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그는 서슴없이 “공부”라고 대답했다.
“그때는 일을 선택했어요. 두려웠거든요. 다시 직업을 구할 수 있을까, 나이 서른에 공부하기가 버겁지 않을까 싶었어요. 하지만 회사 안에서 지위가 올라갈 때나, 다른 회사로 옮겨갈 때 학위는 유용한 것 같아요.”
욕심을 버리지 못하는, 미련한 스물아홉 살 기자가 물었다. 일, 결혼, 공부를 다 잘하면 되지 않을까요?
“아마 힘들 거예요. 성공은 희생을 요구하니까. 세상에 공짜는 없어요.”
‘갈피’를 잡은 서른아홉 살은 아름답다. 10년 후 나도 그렇게 될 수 있을까.
대학 졸업 후 사회에 진출한 지 어언 4, 5년. 풋풋한 후배에게 ‘귀여운 막내’ 자리를 물려준 지 꽤 됐고, 이제 사회의 ‘때’도 좀 묻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만족스럽지 않은 것도 괴로운데, 나의 진짜 꿈이 무엇이었는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해 더 슬프다. 두려운 나이 서른이 되기 전에 어떤 변화, 도약이 필요하다.
제스프리 한국지사장, 성공한 여성 기업인
최근 ‘여자 나이 스물아홉, 일할까 결혼할까 공부할까?’(북하우스)라는 흥미로우면서도 서글픈 제목의 책을 펴낸 김희정(39) 엔젯오차드 대표를 만나러 가기 전날, 낮에는 서른 되기 전에 해치운다며 서둘러 결혼한 친구가 임신 소식을 알려왔고, 야근을 마친 늦은 밤에는 적금에 퇴직금까지 탈탈 털어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는 친구와 차를 마셨다. “서른이 되기 전에 뭔가 결정해야 했어.” 떠나는 친구가 말했다. 그럼 나는 어쩌나. 일할까 결혼할까, 아니면 공부할까?
“책 제목은 제가 직접 지었어요. 10년 전, 스물아홉 살 때 가장 궁금해했던 질문이거든요.”
숟가락으로 떠먹는 과일은? ‘키위’라는 정답을 알고 있는 사람은 김 대표를 절반쯤 아는 셈이다. 지난해 3월까지 그는 그린키위와 골드키위를 수출하는 뉴질랜드 기업 ‘제스프리’의 한국지사장이었다. 스물아홉 나이에 제스프리 한국지사 1인 사원 겸 사장이 되어 10년 만에 한국을 세계에서 두 번째로 뉴질랜드 본사에 많은 이윤을 안겨주는 시장으로 성장시킨, 성공한 여성 기업인이다.
김 대표는 “스물아홉 살 후배들에게 한 가지라도 기억에 남을 만한 조언을 해주고 싶다는 마음에 책을 썼다”고 했다. 그러나 이 책은 마치 개인의 ‘실패 및 실수 보고서’ 같다. 대학 졸업 후 5년간 광고회사에서, 그리고 제스프리에서 10년간 일하면서 저질렀던 각종 사건(?)을 가감 없이 책에 실어놨다. 역설적이게도 이 점이 그의 책을 여타 자기개발서와 구별짓고 있으며, 그런 실수와 실패에서 나온 결론들에 좀더 진득한 설득력을 부여한다.
그의 조언은 매우 직설적이면서도 현실적이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일을 하다 보면 성격을 버리게 된다는 게 내 지론이다.’ ‘육아와 직장생활은 병행할 수 없다.’ ‘일은 삶의 비균형을 요구한다.’ ‘출산이 경력 관리의 엄청난 장애요소 같아 보이지만, 사실이다.’ ‘회사는 내 영어의 미숙함을 참을성 있게 기다려주지 않는다.’ ‘사내정치는 반드시 필요하다. “난 그런 더러운 판에 끼고 싶지도, 알고 싶지도 않아요” 라고 한다면 그냥 집에서 잘 쉬면 된다.’
요즘 국내 드라마에서 인기 코드로 자리잡은 혼전 동거에 대해서도 그는 약간은 도발적이고 명쾌한 조언을 내놓는다. ‘먼저 살아보고 결혼을 결정하라. 단, 동거 사실은 가능한 한 주변 사람들에게 숨겨라’라고.
“뉴질랜드인 동료에게 들은 이야기예요. 사귀던 남자와 결혼하겠다고 하니까 남자친구의 부모가 반대했대요. 어떻게 동거도 안 해보고 결혼하느냐고요. 그래서 2년간 동거한 뒤 결혼했다고 하더라고요. 저도 그게 맞다고 생각해요. 결혼과 연애는 정말 다르거든요. 하지만 한국에서는 동거에 대한 시선이 좋지 않잖아요. 그러니까 몰래 해야죠. 모든 걸 다 말해도 좋은 직장동료, 선후배 같은 것은 없어요.”
맞벌이 여성들이 많이 하는 고민 가운데 하나는 치열하게 도전해 사회에서 성공한 여성이 되느냐, 아니면 회사는 적당히 다니면서 살림과 자녀에 더 신경 쓰느냐다. 많은 여성들이 둘 다 하고 싶어 ‘슈퍼우먼 되기’에 도전했다가 그만 넘어지고 만다.
“광고계 여자선배들 중 미혼이면서 최고의 자리까지 오른 분과 회사에서는 그다지 성공하지 못했지만 결혼해 두 자녀를 키우고 있는 분이 있어요. 두 분 다 한편으로는 행복하면서 한편으로는 아쉬운 점이 있을 테죠. 일과 살림, 둘 다 잘 하기는 어려운 게 현실 같아요. 선택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결혼한 직장여성들은 늘 자녀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게 마련이다. 제스프리에서 일하던 시절, 잦은 해외출장으로 주말에도 집에 있지 못했던 김 대표 역시 아들을 ‘남의 손으로’ 키웠다. 그러나 그는 ‘슈퍼우먼은 없다’는 쪽이다. 일하는 엄마들은 제 손으로 자녀를 키운 엄마들보다 아이와의 친밀감이 떨어진다는데….
“그건 맞는 말이에요. 저도 아들과 서로 부대끼면서 쌓이는 정이 부족한 것 같아요. 하지만 아들에게 미안해하지 않으려고요. 제 아들보다 좋지 않은 환경에서 자라는 아이들도 얼마나 많은데요.”
제스프리 키위가 처음 들어온 2000년 봄, 김 대표는 키위 3만 박스를 팔지 못해 쩔쩔맸다. 그러나 6년이 지난 2006년에는 300만 박스, 약 1억8000개의 키위를 한국에 들여올 정도로 성공을 거뒀다. 이런 성공의 정점에서 자진해 내려오기란 쉽지 않은 법이다. 그러나 김 대표는 한국시장에서 완벽하게 자리를 굳힌 제스프리를 스스로 그만뒀다.
“가진 게 바닥이 드러날 때는 쉬어 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스프리가 성공을 거두자 일에 대한 열정이 바닥났어요. 그러니까 엄살이 늘고, 시건방져지고, 공허해지더군요. 마흔 살이 되기 전, 한 번 더 ‘리스크 테이킹(risk taking)’을 해보자고 결심했죠.”
누가 봐도 열정적인 사람이다. 하긴 그는 대학 시절에도 무모하리만치 용감한 선택을 한 바 있다. 해외여행자가 드물었던 1987년 봄, 스무 살이던 그는 앞으론 영어를 잘해야 한다는 막연한 생각에 세계지도를 펼쳤다.
“호주대륙 서부에 ‘백조 호수(Swan River)’라는, 예쁜 이름의 호수가 있는 도시가 눈에 들어오더군요. 그래서 ‘여기다!’라고 떠났죠.”
마흔 되기 전 ‘리스크 테이킹’ 컨테이너 박스에서 회사 차려
그곳은 시드니와 동서로 정반대쪽에 자리한 서호주의 퍼스(Perth)였다. 지금은 많은 한인 유학생들이 나가 있지만, 김 대표가 퍼스의 머도크대학에 다니던 4년 내내 한국인 유학생이라곤 그를 포함해 딱 2명뿐이었다고 한다.
김 대표는 지난해 10월 뉴질랜드 친환경 제품을 수입, 제조하는 회사 엔젯오차드를 세우는 것으로 ‘리스크 테이킹’을 시작했다. 높은 연봉, 청담동의 멋진 사무실이 자동으로 따라붙는 프랑스 명품 주방가구업체의 한국지사장 자리를 제안받았지만 거절했다. 대신 경기도 일산의 컨테이너 박스에 직원 5명을 둔 회사를 차렸다. 그는 “기대한 리스크의 3배, 아니 10배다. 파도를 기대했는데 이건 해일 수준”이라며 웃었다.
다시 스물아홉 살로 돌아간다면 일, 결혼, 공부 중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그는 서슴없이 “공부”라고 대답했다.
“그때는 일을 선택했어요. 두려웠거든요. 다시 직업을 구할 수 있을까, 나이 서른에 공부하기가 버겁지 않을까 싶었어요. 하지만 회사 안에서 지위가 올라갈 때나, 다른 회사로 옮겨갈 때 학위는 유용한 것 같아요.”
욕심을 버리지 못하는, 미련한 스물아홉 살 기자가 물었다. 일, 결혼, 공부를 다 잘하면 되지 않을까요?
“아마 힘들 거예요. 성공은 희생을 요구하니까. 세상에 공짜는 없어요.”
‘갈피’를 잡은 서른아홉 살은 아름답다. 10년 후 나도 그렇게 될 수 있을까.